하늘을 우러러볼 때이다

오종권 2022. 7. 15. 15:05

*용서의 캔버스

 

그녀가 내 곁을 스치다

그 긴 손톱으로 내 얼굴에

핏빛 어린 상채기를 내었으나

내가 웃음으로 그 곳을 매만지자

그녀는 우리의 캔버스에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그렸다.

그녀가 아끼던 거울을

내가 잘못 깨뜨렸으나

그녀가 파편을 주워담으며

무안함을 달래는 시선을 내게 던지자

나는 우리의 캔버스에

하얀 백합 한 송이를 그렸다.

금혼식 날

우리 집의 한 벽면 전체를 가린

캔버스에 가득 찬

각양각색의 꽃들

식물도감에도 없는 희한한 꽃들이

우리의 마음들을 눈부시게 하고 있었다.

 

 

*2월의 끝

 

3개월 전

머뭇거리던 가을을

사정없이 밀어젖히고

험상궂은 낯으로 찾아온 겨울.

숨소리조차 들릴세라 죽이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치는 광야에서

코빼기 빼꼼히 내밀지 못하고

수레바퀴 소리에 얼음장이 꺼질까

침묵으로 그저 나아가고만 있었다.

자락 사이로 언뜻 훈기를 느낄 때

눈은 그쳐 있었고

지평선은 보이기 시작하였다.

환하고 둥근 얼굴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데이트와 결혼

 

나는 그녀와 함께

들에서 산에서 강가에서

연을 날렸다.

연만 보고 달리다

강에 빠지기도 하고

내리막길에서 엎어지기도 하고

그녀가 연줄을 잘못 당겨

연줄이 끊어지기도 하고

연이 전선줄에 걸리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그럴 때마다 실성한 듯

마냥 웃기만 하였다.

연은 끝 없이 용서하므로.

 

내가 그녀와 함께

비행기를 조종하였을 때

우리는 각자 앞만 바라보며

살짝 건드려도 터질 듯 잔뜩 팽팽한 얼굴로

웃음을 잊고 있었다.

시야에 실 같은 구름이 흘러도

굵은 전선인 줄 착각하고

높은 산을 바라보고서도

병풍의 그림인 줄 알면서

비행기는 심한 난기류에 흔들렸다.

추락의 몇 고비를 넘기면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 되었다.

비행기는 한 번의 실수도 용서하지 못하므로.

 

*봄의 멜로디

 

몽롱한 들판의 끝에서

아지랑이가 들려온다.

가뭇없이 사라졌던

그의 발자국은

클래식의 선률에 따라

사뿐히 떨어지는 꽃잎.

창틀에서 숨 죽이고 있는

햇살에 마음 녹이고 있자니

건듯 부는 바람도 나를 쓰다듬고

잊고 있던 사랑의 움을 틔운다.

무작정 저기 들판 끝까지

천천히 걸어서

소리를 맞이하고 싶다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

한 週의 끝에

시간이 쌔근거리고 있다.

 

*거룩한 책

 

어려서 한 줄만 읽고,

좀 커서 한 문단만 읽고,

더 커서는 한 페이지만 읽고

덮었던 책.

늙어 갈 무렵

의미도 모르면서

읽기 위하여 읽은 책.

더 늙어 가면서

내가 이해했던 대부분이

잘못 이해했던 것임을 알고서

기뻐 눈물을 쏟았던 책.

지구를 주시고

그만큼 많은 것을 열어 주시어

온종일 지구 위에서 책을 펼침만으로

묵상 속에 잠기나이다.

 

*자유의지

 

백화점 어느 넥타이 가게에

빨간 색 민무늬 넥타이만.

홍등가 여인의 립스틱

보다 짜릿하게 나부끼고 있다.

손님은 힐끗 바라보기만 하고

그 옆 가게에서 멈춘다.

오만 가지 색깔과 무늬의

넥타이들이 교태를 부리는 가운데

이것저것 고르고 또 고르고

한참 걸려서

窈窕(요조)한 하나

마음에 차오르며

기쁨이 넘쳐 흐른다.

한참의 수고가 기쁨으로 바뀌는 시간.

정직한 땀이 돌려 주고 있다.

 

*바람이 부는 이유

 

저 푸른 하늘에 닿은

나무 끝가지에 스치는

바람의 뜻을 어린 나에게

알려 줄 때 나는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바람은 마냥 제멋대로만 부는 줄

알고 있었던 나에게

바람이 그런 이유로 부는 것을 알려 주고

나무 끝을 향하여 자라는 마음을

심어 준 덕분에 그만큼 자란

나는 눈을 꿈벅거리지도 않았다.

바람은 그런 이유로 불지도 않았고

제멋대로 불지도 않았다.

오늘도 하늘거리고 있는

나무 끝을 내려다보며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고교 졸업 50주년을 기념하며

 

바다를 바라보던 우리는

바다를 닮기 위하여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했다.

鐵船이 드나들던 부두만큼

우리의 마음은 붐비고

여드름처럼 좌충우돌

희디흰 깃의 소녀를 생각하던

얽힌 실타래 같은 시간들.

철봉을 잡지 못하던 꼬마가

코 아래 거뭇해진 낯으로

철봉을 잡고 한 바퀴 회전할 때

평행봉 도립을 마친 소년은

굵어진 웃음으로 박수를 친다.

수학 문제로 골치를 싸맨 오후 내내

홈런 공 치는 소리가 툭 떨어질 때

문제가 술술 풀어지고

몰래 다가오던 잠이 멋쩍게 물러선다.

 

반백 년을 훌쩍 넘어

그 자리로 되돌아간 우리는

어제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봄이 오는 소리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바람결에 풍기는

움 돋는 내음

흙 속 깊디깊은 곳에서

물 차오르듯 올라온

아가야 손가락 같은

아지랑이가 간지럼을 타고 있다.

툽상스런 사내가

제풀에 지쳐 돌아갈 때까지

지그시 눈 감고 참아 온 나날들

옷자락을 여미며

삽짝 밖을 나온 새악시가

파릇한 나물 캐러 가는 길에

싱그러운 햇살 내리고 있다.

 

* 간발의 차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머리카락 끝에

태산이 매달려 있다

나비의 날갯짓이

불러 일으키는 태풍처럼.

석달 가뭄에 갈라지는 논바닥에

패연히 쏟아지는 폭우를

얻기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을 모아

머리카락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강철 같이 되어

하늘에 걸린 거미줄에

날아가던 비행기가 걸리듯.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짜투라기 시간들이 모여

태산을 견딘다.

 

* 뜨거운 소리

 

가녀린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을

할퀴고 있다.

입술보다 더 빨간 담뱃불이

손가락을 태우고

입술을 태우고

낯을 그을려 갈 무렵

그 뜨거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빙산이 녹아내린다는데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초미니 소녀들이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머슴애들과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고 있다.

머리 허연 노인들이

길을 비켜 가고 있다.

 

*이빨이 또 하나

 

내게 주어진 삶의

반 남짓 살았을 때 벌써

나의 이빨들은 무너지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삶처럼

제멋대로의 이빨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반 백 년을 사귄 우정이건만

세태처럼 씁쓸하다.

돌아선 친구는 어쩌다

돌아오기도 하련마는

이 친구는 하얗게 차디차다.

이제 70개 星霜을 충실히 떠받혀 온

또 하나의 친구를

떠나 보내게 되매

슬프지만은 아닌

아디오스 아미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매화, 목련, 개나리, 벚꽃, 진달래, 철쭉이

줄을 서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황사가 메뚜기 떼처럼 몰려온다.

꽃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황사의 꼬리를 물고

검은 점이 다가오며

점점 커지더니

검은 구름이 되어

장맛비를 연일 쏟아 놓는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여린 잎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가늘어지는 빗줄기의 꼬리에

불빛이 어리더니

점점 뜨거워지며

땡볕이 초목을 태우고 있다.

메마른 연못 가의 백일홍 한 그루

발갛게 익은 얼굴로 숨을 죽이고 있다.

불의 꼬리에 나풀거리는 댕기

점점 펄럭거리더니

살랑살랑 선들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한껏 곱게 차려 입은 산과 들이

지쳐갈 무렵 바람의 꼬리가

무서리에 젖기 시작하고

철 늦은 국화들이 숨죽이고 있다.

뿔뿔이 떨어진 국화꽃잎의 꼬리가

하얀 살얼음에 떨고 있다.

하늘과 땅이 쇳덩이처럼 얼어붙을 때

사람들은 집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숨이 거진 끊어질 무렵

얼음의 꼬리에 노란 모래 한 점 묻어 나고 있다.

 

꼬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원형의 무한 궤도를 그리고 있다.

 

*어린이들의 외침

 

겨울이 시작된 지 오래고 오래인데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그 밤도 시작된 지 오래인데

동이 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겨울 밤은 춥고 춥다.

겨울을 앞당겨 보려는 사람들

밤을 끝내 보려는 사람들

유사 이래로 안간힘을 써 왔건만

추운 겨울 밤이 한층 얼어붙고 있다.

사람들은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데

겨울이 끝나고 있다는,

밤도 끝나고 있다는

어린이들이 외치는 소리.

그 너머 지평선이 희부염해지고 있다.

하얗게 동이 터 올때까지

그들은 겨울 밤을 하얗게

지새며 외치고 있다.

 

* 배우지 않으면 늙는다

 

늙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어느 젊은이는 배우지 않는다.

고희를 넘기고서도

배우는 사람의 얼굴에는

검버섯 대신 꽃이 핀다.

단어 하나를 외우면 한 송이,

열 단어를 외우면 열 송이

4월의 벚꽃처럼 꽃봉오리가

하나 둘 벌어져서 만발할 때

많은 지식을 배워 눈부시다.

지식들이 모여서

잎잎이 푸르디 푸르다가

열매로 영글 때

여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젊은이 하나

주름살 가득한 낯으로

나무 아래 숙이고 간다.

 

*울음을 웃으라

 

머나먼 길을 떠날 때

목적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퍼질러 앉아 땀을 훔치고 있는

나를 그려 보라.

험준한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

헐떡거리고 있는 나의 그림을 지우고

정상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철쭉꽃 사이에서 폼을 잡고 있는

나를 그려 보라.

지쳐서 넘어지면 지친 것이 아니라

창공을 쳐다보며 누워 쉬는 것이다

산들바람이 잠시 나의 얼굴에서 쉬었다

떠나는 인사에 답하며 손을 흔들어 주라

울음이 복받쳐 오르면

북받치는 웃음으로 크게 웃으라

울음조차 따라 웃도록.

 

* 맑은 땀 방울 모여서

 

티끌이 모이고 또 모여서

태산이 되는 것과,

물방울이 모이고 또 모여서

바다가 되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

한 사람의 하루의

맑은 땀방울 하나가 모이고 또 모여서

눈부신 미래를 열어 가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

그러한 사람들만 모여서

신세계를 펼쳐 갈 때

참다운 평화가

태산보다 더 굳건하고

끝 없는 행복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리.

 

* 새벽 시간

 

새들의 웃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는 것보다

새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그들이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이

더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음보다 더 깊은

잠을 잔 것이다.

닭이 홰치는 소리를 듣고

낯선 四圍를 둘러보며

눈을 반짝거리고

군침을 삼키면

그 날은 벌써 손가락에

꼽히는 하루가 된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넘실거리는 시간 위에

너른 듯이 누워

낮잠을 잔다.

 

* 벽이 열리는가?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며

구름 위에서 놀았다

땅에서 쫓아 다니는 사람들이 가관이었다.

동살과 더불어 구름이 녹았을 때

온 몸이 쑤셨고

기어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 가고 있는데

그 뒤를 부지런히 좇아서

그 꼬리에 섞여 들었을 때

전후좌우에서 악수를 청해 왔다

웃고 떠들다 집으로 돌아오자

싸늘한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꿇어앉아 기도할 때

사면 벽이 열리며

깔끔한 차림의 사람들이

따뜻한 웃음을 웃으며 양팔을 벌리고

포옹할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숨결은 항상 곁에 있었다

깊은 산 속에서도

풋풋하고 상긋한 내음 풍기며.

손길은 항상 곁에 있었다

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벨벳처럼.

벼랑에서 떨어져

숨이 넘어갈 듯할 때에도

당신의 숨결은 약초처럼

내 숨을 고르게 하고 이어 가게 하였다.

칠흑의 감옥에 갇혀서

나를 씹어 먹을 때에도

당신의 손길은 등불처럼

내 마음을 바른 자리에 앉히게 하였다.

온 데에서 흘러드는 숨결과

온 데에서 전해지는 토닥거림은

수만 개의 반딧불이로 반짝이고 있었다.

밝히되 태우지 않는.

 

* 멜로디 예찬

 

바람 한 점 없는 호수

가느다란 주름이 잡히는가

큰 물고기 한 마리

물을 뚫고 튀어 오른다

바람이 우수수 불어 오며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모두 고개를 같은 쪽으로 기울이며

화음이 아롱진 합창을 하고 있다.

여러 마리가 번갈아 튀어 올랐다가

첨벙 물 속으로 되돌아간다

바람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면

나무들은 일제히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이며 가을 냄새

실어 보낸다.

수면을 타고 미끄러져 오는

선률의 간지러운 아픔이여!

 

*산에 가는 이유

 

들판을 가로 질러

세차게 불어 오는 바람을

막기 위하여 산은

거기 우뚝 솟아 있다.

산을 넘어 온 바람은 忠犬처럼

배를 깔고 앞발을 내민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반이나마 감당하기 위하여 산은

나무들을 품고 버티고 있다

들판이 태양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젖줄을 대며 토닥거린다.

그러고서도 묵묵한 산의

속 情에 끌리지 않는다면

산에 오를 사람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부른다면

가지 않고 배길 수 있니?

오늘도 나는 산을 오른다.

 

* 바위에 집을 지으려면

 

죄 많은 인간이

모래 위에 글씨를 쓰고 있다

강풍이 모래를 쓸어 가는데

모래보다 더 가벼운 그의 머리는

구멍 난 바켓처럼

물을 지그시 담지 못하고

틈새로 흘리고 있다.

물은 바위 위에 뚝뚝 떨어지고

오늘도, 내일도, 한정 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에

글자를 새기고 있다.

새는 물의 양보다 더 많이

물을 쉼 없이 부으면

물은 머리 속에서 차오른다

모래도 굳어지며

바위가 되고 있다.

바위 위에 집을 짓고 있다.

 

* 하늘을 우러러볼 때이다

 

모든 생물은 살아 있지만

동물은 스스로 움직인다.

모든 동물은 죽지만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한다.

약하고 쬐끄만 덩지로

강하고 큰 동물을 부리고

앉아서 문을 닫고서도

별에 가 있는 사람들을 본다.

온 땅을 헤집고 다니며

형형색색의 깃발을 꽂는다.

여기저기 구멍을 뚫으며

산을 허물고 강을 막으며

사람마저 죽여 갈 때

모든 연장을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무릎 꿇고

하늘을 우러러볼 때이다.

 

*부활

 

마지막 잎새가 떨어졌을 때

숨을 거둔 그는

새 순이 나기 시작하였을 때

돌아오지 않았다.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듬해, 그다음 해, 또 그다음해…

나무는 순환하는데

돌아온다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달에서 노는 꿈이 이루어졌어도

깊은 잠을 잘 뿐이라던 그는

종당에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동안의 폭풍우가 뚝 걷히고

황금빛 여명이 밤을 열었을 때

그는 꿈 같이 돌아와 있었다.

꿈 아닌 꿈으로.

 

* 황사

 

이 봄에도 어김없이

황사는 불어 오고 있다.

갈수록 양도 더 많고

색깔도 더 진하게

기간도 더 길게.

노란 바람은 숲을 헤집고

샛노란 바람은 도시를

노랗게 칠하고 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황금 가루에 눈이 멀어가고 있다.

종일 만진 황금 가루에 손도 노래지고.

더워져가는데 황사는

그치지 않고 마스크

마저 벗어던지는 사람이

늘어가면서

꽃이 시들고 있다.

 

* 벼랑 가에서 춤추는 소경들

 

珍羞盛饌이 차려져 있고

三絃六角이 울려 퍼지는

山紫水明한 곳.

소매자락 도포자락 휘날리며

手舞足蹈 춤사위가 볼 만한데

天涯의 벼랑 끝에서 어우러지는

소경들의 춤에

파란 하늘에서 날개를 쉬며

下瞰하고 있는 수리 떼들

눈빛이 날카롭다.

춤꾼이 아니어도

醉氣에 흥이 나면

벼랑 끝인 줄 모르는 체

가장자리로 더 다가가는 법.

杯盤狼藉 중에 해는 기울고

수리 떼는 한층 더 고도를 낮추고 있다.

 

* 용감한 사람들

 

세상에서 목숨이

가장 고귀한 줄 생각하지만

더한 것이 있다.

이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사람들

갈수록 늘고 있다.

이것은 돌이다, 똥이다

하면서 눈길을 돌리지만

어느새 고개는 되돌아가고 있다.

혼자 있을 때는 그것에 머리를 파묻는다.

악취가 향기처럼 피어 오를 때

광부처럼 파고 또 파고

지질학자처럼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황금에 이르면

목숨을 길가에 버려두고

로봇이 된다.

용감한 사람들이

목숨을 꽃잎처럼

강풍에 내맡기고 있다.

 

* 양재천 벚꽃

 

양재천을 따라

양쪽 가에 도열한 나무들을

덮고 있는 분홍빛 구름들.

하늘에서 일시에 내려와 앉은

함박꽃 웃음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눈동자들을 적신다.

간 데 없이 사라졌다가

해마다 이맘때면 돌아와

자글자글 귓전을 간지럽히는

아지랑이의 안내에 따라

환한 미소의 자태로

우리 앞에 선

폭죽 같은 꽃들

답지 않게 겸손한 자태에서

바람도 비켜 가는 듯.

 

 

* 우리의 그 시절

 

대학교 캠퍼스

해가 설핏 기우는데

눈부신 철쭉이 늘어선 옆 트랙에서

그때의 아내가 뛰고 있다.

애띠고 총명한 여학생

하나로 묶은 뒷머리칼 흔들거리고

탄력 있는 몸으로 우레탄 트랙을

공 튀듯 달리고 있다.

저기 도서관 앞에 남녀 학생들이

무지개 빛 분수로 떠들고 있고,

몇 바퀴 뛰고 난 아내는

걸으면서 숨을 가누고 있다.

좀회양목 너머 그늘에

숨은 듯 핀 철쭉은 시들어가고

여학생은 천천히 멀어져 가는데

흰 머리 아내가 그녀를

눈빛으로 좇고 있다.

 

* 입학 50주년 모임 소감

 

세월이 켜켜이 내려앉은

얼굴들이 희미한 등불 아래 모였다.

몇 겹의 먼지 틈으로 겨우 비친

옛 모습에서 서로를 알아 보는

웃음들은 공중으로 치솟다

포물선을 채 그리지 못한 채

이내 자취를 감추고

허공을 맴도는 이야기들이

꽃망울로 맺히다 스러진다.

머리카락은 새카만데

주고받는 흰소리는

벽에 부딪혀 메아리 없이 떨어진다.

50주년! 60주년! 70주년! …

100주년!

외치는 건배의 소리가

포도주 잔 안에서 맴돌다

파문도 없이

술 안으로 녹는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

 

* 무덤이 싫은 이유

 

골목길을 깨금뛰며 다닐 때

한 번만 들어도 외우는

‘방랑 김삿갓’을 불렀고,

중학교에 입학한 봄에

‘봄 처녀’를 배워 불렀다.

여드름을 짜면서

클리프 리처드의 ‘영 원스’를 노래했고

대학에 입학한 봄에

‘봄의 왈츠’에 몸을 띄웠지.

넘기는 책장마다 선률이 흐르며

내가 있는 곳에 늘 선률이 있었고

선률이 있는 곳에 내가 늘 있었지.

왕국 노래를 부르면서,

베토벤의 현악4중주를 들으면서

조용필의 ‘허공’도 떠올렸지.

무덤이 싫은 것은

음악이 없기 때문이겠지.

 

 

 

* 봉사의 직무

 

일본에서, 네팔에서

세계 곳곳에서

대지진이 잇달고 있다.

지도자들은 돈사슬에 묶이고

꿀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지진과 돈과 꿀을

한꺼번에 싸서 던져 버리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

골목 골목을 누비고

한 집도,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마음을 비추고 헤집건만

도대체 철가면을 쓴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가던 길로 가고 있다.

햇살과 바람이 더해 가고 있다.

 

* 주봉지기천종소

 

5월의 밤

다윗과 요나단이

술잔을 거듭하면서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醉氣를 실어가고

나의 뜻을 그가 풀고

그의 뜻을 내가 품어

사이에 놓인 架橋는

더 크고 더 튼튼해지는구나!

맞장구를 칠 때마다

목젖을 적시는 짜릿함은

손가락 끝까지 전류로 흐른다.

밤은 깊어 가는데

첫 장도 넘기지 못한

이야기의 책갈피는

꿈만큼이나 두텁고

넌지시 들여다보고 있는

저 달도 갈 길을 멈추고 있다.

 

* 성욕의 파장

 

아버지는 빨간 롤즈로이스 한 대를 주셨다.

교통규칙과 자동차 매뉴얼을

꼭 지킬 것을 신신당부하시면서.

老松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직선의 잘 닦인 해안도로를

질주하면 하늘에 닿는다.

이따금 중앙선도 살짝 넘어가다가

조금 과속도 하면서

노송들을 스치듯 지나가며

아슬아슬 짜릿한 재미를 들인다.

아버지의 음성이 들릴 때

최고급 오디오의 소리를 한껏 올리며

모터 쇼를 하듯

곡예 운전을 하면

지평선에 닿은 것인가

수평선에 닿은 것인가

차는 뒤집혀지고

남녀는 벌거벗은 채로 널부러져 있다.

 

* 5월의 장미

 

5월의 푸른 하늘에

한동안 눈을 담그다 문득

녹색이 짙어져 가는 수목들로

눈길을 내리는 순간

눈동자를 찌르는 아픔.

눈에서 나는 피인가?

아름다운 아픔 한 송이.

나의 눈치를 보고 있다.

뜨거워져 가는 태양을 좇아

수목들 사이 여기저기 수런거리는 소리

잎들이 가녀리게 흔들리면서

저마다 맺힌 얘기를

안 하고는 못 배길 모양이다.

내일에는

작정하고 여기저기

여러 송이의 장미들이

우수수 솟을 모양이다.

 

* 5월의 공원에서

 

녹색이 아닌 색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니

호수마저 파랗다.

구름처럼 걷는 사람이나

풀밭에 퍼질고 앉은 사람이나

푸른 빛 얼굴로

푸른 미소를 머금고 있다.

저 나무들처럼

아무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가 되어 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따라

서로의 이야기가 흐르고

재잘거리는 소녀들이 터뜨리는

함박꽃 웃음으로

잎새들이 살랑거리며

녹색 물감을 뚝뚝 듣는다.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옛날 얘기를 하고 있다.

 

* 그렇게 그는 갔어도

 

바다에서 와서

바다로 돌아가는 해.

그냥 가기만 하는 게 아니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어

눈시울이 불어 터지도록

붉은 울음을 울고

물오리 떼와 더불어

고요히 內燃하는

발그레한 웃음 머금으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旅程을 마감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갔어도

저 해처럼

저 물오리처럼

온 몸을 정갈하게 씻고

내일 새벽에 물 속에서

불끈 솟아오르리.

 

* 값 비싼 점심

 

평생 여호와를 순전히 섬겨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허리가 꼿꼿한 그의

마흔 같이 카랑카랑한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쭈뼛

쭈뼛 서게 된다.

뭍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섬의 야자수 그늘 아래 산들바람 불고

우리가 주고받는 노래는

진수성찬보다 더 맛있다.

비싼 요리에도 거슬리는 게 있는데

우리의 노래는 부르는 족족

구름에 가 닿았다

메아리로 무지개까지 담아 돌아왔다.

술 한 잔 곁들이지 않고서도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엄마의 힘

 

엄마와 자식 사이에 놓여 있는

붉디 붉은 띠.

보이지 않으면서도

프리즘으로 보면 무지개 빛.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하면서도

돌진해 오는 차를 멈추는

중력보다도 더한 힘으로

천근 만근 세 자식을

산마루까지 끌어 올린다.

세찬 朔風 앞에서는

뿌리 깊은 거목이 되고

거센 불길과 도도한 파도 앞에서는

잠을 밀어 젖히고

피를 쏟아 부으며

터를 닦는다.

똥을 깔기고 날아가는 새처럼

자식이 훌쩍 떠날 때에도

엄마는 피로써 똥을 닦아 낸다

반짝반짝 윤이 날 때까지.

 

* 노부부

 

온통 푸르러만 가고 있는 공원에

빨간 장미 두 송이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간다.

둘이 모두 백발이어도

뉘엿 황혼에 비쳐 장밋빛이다.

조금 뒤뚱거리지만

서로를 부축할 때마다

꽃물이 배어난다.

건듯 부는 바람에 꽃 내음도 실려 온다.

멀어지면서 하나의 장미가 되어

함께 좌로 우로 흔들리는 것이

흡사 한 몸이다.

돌연 일어나는 회오리 바람에

장미 한 송이 휘날려 떨어지고

남은 한 송이 호르르 떨고 있다.

황혼은 떨어지는 어둠 속에

짙은 핏빛으로 변하고 있다.

 

* 여름 한낮

 

여름 한낮

쨍쨍한 햇빛이

마당 한 귀퉁이를 달구고 있다.

시간이 힘들게 가고 있다.

툇마루 아래 섬돌 곁에서

졸고 있는 멍멍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꺼풀이 무겁다.

안방 앞 마루의 벽시계가 정오를 알리는

소리가 구름을 타고 오는지

살랑이는 물결 따라 오는지

아득히 들리다 마는데

텅 빈 저 마당처럼

내 머리 속이 하얗다.

시간이 멈추어 있다.

큰 하품으로 기지개를 켜는데

장닭 한 마리 뒤뚱뒤뚱 사라질 때

고무줄 허리 고양이 길게 뻗으면

시간이 뒤로 가고 있다.

 

* 말 천지

 

각종 새들과 동물들이

이따금 지저귀고 포효하던 때

세상에는 지구 돌아가는 소리만.

사람이 생겨나고 늘어나서

떠들면서부터 시끄러워지고

지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확성기, 라디오, TV, 카셋트, 컴퓨터, 비디오까지

만들어 떠들면서부터는

말은 더 이상 입 안에만 있지 않았다.

말은 온통 지구를 흔들어 대고

말을 하지 않는 것들은 뒷전으로 밀어 붙이며

말은 마침내 말 많은 사람조차 짓밟기 시작하더니

말 자기끼리 피 터지게 싸우고 있다.

말로써 비로소 사람이 된 사람은

말로써 사람을 버리고

자신도 모르고 있다.

온 종일 말들이 지구를 돌고 있다.

 

 

* 백남준 아트센터

 

한 예술가가 툇마루에 누워 있었다.

한 여름 한 낮의 햇살이

마당에 패여 있는 물 없는 웅덩이에서

졸고 있고, 예술가도 졸고 있다.

딱이 잠은 오지 않고

천당에 갔다 지옥에 갔다 하다

머리를 떨치고 일어나 앉는다.

목청껏 소리를 높여

노래도 아닌 노래를 지른다.

삽짝 밖에 하나 둘 사람이 모여 들기 시작하더니

누군가 박수를 치자

하나 둘 따라 박수를 치고

노래도 아닌 노래는 이제 정말 노래가 되어

구름에까지 닿았고

무지개 빛으로 되돌아오자

마당은 온통 박수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 전자민주주의

 

미친 바람이 세차게 불면

빨간 깃발은 일제히 좌측으로 기운다

하나라도 그대로 꼿꼿이 서 있다가는

튼실한 허리도 꺾인다.

우측을 향한 파란 깃발은

내 걸 엄두도 못 내고,

그나마 잠자코 서 있으려면

차라리 깃발을 들지 않으련다.

온통 빨간 깃발이 찢기도록 펄럭여

황토빛 강물이 범람할지라도

내 한 몸 거지 같이 부지하려면

토굴에서 숨 죽이고 엎드려 있을 일이다.

용암보다 더 뜨거운 물결이

도시를 뒤덮고 지나갈 때까지.

바람은 언제나

곱게 빗은 머리카락을

蓬頭亂髮 어지럽게 흩날리게 한다.

 

* 말의 자유로써 말의 자유를 막는 일

 

아기가 말문이 터졌을 때

엄마에게 웃음 꽃이 피었다.

자라면서 말수가 줄더니

어른이 되어 말문을 닫았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터지고

수많은 忍苦의 세월이 뒤틀린 후

잉태된 아기가 태어났다.

말은 실개천을 이루고 개천이 되더니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었다.

沃土를 만들 줄 알았던 말은

둑을 무너뜨리고

전답을 휩쓸어 갔다.

다시 둑을 쌓기 시작하면서

강과 둑의 싸움이 일어나고

강줄기를 돌리려는

또 다른 강이 범람하여

강과 강의 싸움이 가열되고 있다.

마치 말문이 닫힌 때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 외로움

 

며칠 동안 함박눈이 내린 벌판

소복에 백발인 사람인가?

양 팔을 하늘로 치어 올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잿빛 하늘에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바람도 숨을 죽이고 있다.

귀 기을이면 오직 눈 내리는 소리만.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발자국을 옮긴 그 사람은 곁에

눈이 소복이 쌓인 벤치에

눈도 치우지 않고

눈처럼 사뿐 앉는다.

시간도 째깍 소리 하나 없이 앉는다.

발자국은 이내 지워지고

싸각싸각 내리는 눈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은 내린다.

 

* 마스크

 

아이들도 철들면서

마스크를 쓰기 시작한다

순백색의 얇은 마스크를.

어른이 되면 여러 색깔과 무늬의

두터운 마스크를 쓴다

사스와 메르스가 유행하지 않는데.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여러 종류의 여러 냄새의 마스크를

하나 또는 여러 개를 한꺼번에 쓰기도 한다.

민낯으로는 살아 갈 수 없는 세상

사스와 메르스가 유행하지 않는데.

사진과 동영상에서도 마스크가 인기를 얻더니

친구간에도, 부모자식간에도

제법 도타운 마스크를 쓴다.

숨 넘어가는 사람의 인공호흡기처럼

이제 마스크를 쓰고 잠자리에 든다.

 

* 엔진 오일

 

모든 흐르는 것에는 찌끼가 있다.

휘발유에도,

강에도,

피에도,

가정에도,

사회에도,

세상 곳곳에,

흐름이 있는 어느 곳에나 있는

찌끼가 켜켜이 쌓이면

덜커덕거리고, 쿨럭거리고, 삐꺼덕거리고

바퀴가 달아날 듯한 소리.

엔진 오일이 흐르면

찌끼가 녹듯

설움도, 아픔도, 분노도, 미움도,

모든 거리도 사라지고

잘 닦인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지구도 신나게 돌아간다.

 

 

* -ㄹ까

 

일어날까 말까로 시작되는 하루

먹을까 말까

입을까 말까

갈까 말까

줄까 말까

쓸까 말까

할까 말까

잘까 말까로 끝나는 하루

이럴까 저럴까

이걸까 저걸까

여길까 저길까

이젤까 저젤까

이일까 저일까

온종일 ‘까’에서 ‘까’로 흐르는 나날

수많은 갈랫길은

하늘로, 땅으로, 바다로 안내하고 있다.

‘ㄹ까’가 우리를 울리고, 웃기고 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 가슴에 돌을 던진 그가

저 다리 건너 서 있는데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갈수록

종기가 되고 혹이 되어

악성종양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가 던진 돌도 점점 자라서

바위 만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바위를 옮겨 다리를,

다리를 부서뜨렸다.

찢어지는 물소리와 함께

치솟은 물은 내 옷을

흠뻑 적시고

몸 속까지 적셨건만

마음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는데

그는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하여

바장이며 애태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배도 없었고

파도는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겨울을 녹이는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모두 옷깃을 세우고 종종걸음을 치며,

말을 건네면 날씨보다 더 차갑게

노려보고 대꾸 없이 제 길을 간다.

허름한 차림의 깡마르고 키 작은 사내가

절름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쑥한 양복에 중절모인 신사에게 길을 묻는다.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이며

귀를 사내에게 기울인 신사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솜사탕 목소리에

팔을 들어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는데

벌써 봄 바람이 불고 있다.

휘날리는 눈보라가

사뿐 사뿐 떨어지는 꽃보라가 된다.

훌쩍 커진 키에 몸피마저 커진 사내

성큼성큼 길을 간다.

얼어 가다 만 겨울이

녹고 있다.

 

 

 

*성경=+문학

 

불과 얼음이

한 데 담겨 있으면서

불이 얼음을 녹이지 않고

얼음이 불을 꺼뜨리지 않고,

불이 있음에 얼음이 더 시원하고

얼음이 있음에 불이 더 따뜻하여

여름에나 겨울에나

쉽게 다가가는 책.

캄캄한 밤길을 밝히는 횃불이다가

꽃 축제에서 더 찬란한 모습이면서

칼 자국 하나 없이 큰 수술을 하는

너는 정녕 사람을 위해서만

오로지 사람 사랑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 같은 선물일진저.

 

* 치사적 역병

 

이 땅을 다스리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제 덩지의 열 배가 넘는

코끼리를, 곰을, 하마를 쓰러뜨렸다.

머나먼 달에까지 갔다왔다.

손바닥 안의 장난감으로

神의 경지를 넘보고 있다.

현미경으로 겨우 보이는

미물이 제 몸의 수만 배가 넘는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있다.

앞만 열심히 바라보며 달리고 있는

사람의 발을 살짝만 걸어도

집이 무너지는 소리로

여기저기 무너지고 있다.

큰 소리 쾅, 쾅 쳐대던

사람들이 속수무책

지진으로 쩍, 쩍 갈라진 땅의 틈새로

떨어지고 있다.

 

* 휠체어 미는 할배

 

크고 작은 나무 할 것 없이

온통 녹색의 절정을 향해 짙어지고

사이 사이 손바닥만 한 틈새

파란 하늘은 더 멀어지고

여기 저기 젊은 연인들

얼굴이 부서지는 통에

강아지 한 마리 흠칫 놀라 물러선다.

할매가 앉은 휠체어가 다가오는데

더 늙은 할배가 이를 밀고 있다.

휠체어가 할배를 부축하는 듯

절름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내딛고 있다.

짙어져 가는 녹음의 그림자가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데

유치원 어린이들의 합창이

산들바람 따라 흩어진다.

 

* 열쇠 없는 자물통

 

그 날 그녀와 남산타워에서

평생을 언약하며

손가락 걸기의 무한 倍나 되는

자물통을 난간에 걸었지,

열쇠 없는 자물통.

10년이 지난 오늘 그 자리에서

아내가 난간 밖 시내를 바라보는 새

나는 곁눈질로

그 자물통을 보았다.

자물통의 눈빛이 매섭고

자물통의 낯빛이 悽然하여

얼른 돌리는 내 눈길과 마주치는

아내의 눈빛이 따갑다.

유월 하순 한낮 녹음 사이로

건듯 부는 한 줄기 바람이

선뜻하다.

 

 

 

* 뻐꾸기 시계

 

숨도 쉬지 않고

情感도, 말도 없으면서

애완견보다, 때로는 사람보다

더 정이 가는 건 왜일까?

소리라고는 반 점과 정각에

울리는 뻐꾸기 소리와

조용할 때 귀기울이면 들리는

째깍거리는 숨 소리뿐.

나를 잃고 헤매일 때

정수리를 치는 뻐꾸기 소리는

나를 일상으로 황급히 돌아오게 하고,

졸려 가는 이 때 어김없이 또

잠을 쫓는 소리가 들려 온다.

반 점도 알려 주면서 내 시간을 늘이고

악몽에서 놀라 깨었을 때

석 점을 울리며 나를 토닥거린다.

늘 곁에 있어 힘을 솟게 하더니

병 들어 침묵하고 있을 때

指南力을 잃는 나도 병든 걸까?

 

* 제 복 제 차기

 

월드컵 축구 결승전

0 0에서 종료 10초를 앞두고

페널티 킥을 얻은 선수

골로 향하여 공을 찼다.

공은 골대를 벗어나서 공중을 갈랐다.

제 복을 찬 것일까?

귀국 공항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돌팔매질을 피해 다녔다.

그렇게 사라진 그는

먼 훗날

집집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허공으로 날아간 그 공 대신 그 소식을

각 집의 대문 안으로 정확하게

골인시키고 있었다.

축구장에서보다 더 큰 박수소리가

공중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제 복을 찬 것일까?

 

 

 

* 빙산

 

얼음보다 더 찬 북극의 바다

여기저기 빙산이 서 있고

流氷이 슬며시 다가온다

純白色의 빙산과 유빙에

호화 유람선의 船客들이 갑판에서

일제히 환호를 지르며

좀 더 가까이에서 보자고 소리친다.

흰 털이 온 몸을 덮고 있는

애완용 강아지처럼

流氷은 꼬리를 흔들고

선객은 ‘좀 더 가까이’를 외치며

유빙을 쓰다듬고자 팔을 내뻗는다

물 속에 잠겨 있던 流氷의 몸체는

이미 배를 부서뜨리기 시작하고

배신당한 사람의 주검들이 가득 메운

바다를 뒤로 하고 流氷은

純白色의 미소로 흐른다.

 

* 알 수 없는 그 사람

 

사람들은 반 백년이나 함께 살아 온

사람과 영 딴판인 사람과 살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면

낯선 사람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갈 때 웃는 그 사람은

영락없이 그 사람이다.

하루에 몇 차례 드나들면서 옷을 갈아 입는

그 사람은 그럴 때마다

영 딴판인 사람이다, 처음 본.

수많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하고

수많은 뙤약볕이 피부를 몇 꺼풀 벗기면서

나무처럼 늙어 가는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다.

속엣것이 조금씩 조금씩

알게 모르게 자아지듯

바래진 사진 한 장

언제 보아도 그 사람인

그 사람이 옆 자리에 누웠다.

 

* 자식이란

 

그들이 나누어 준 시간과 땀들을

1퍼센트나마 돌려 드리기 위하여

5남매 중 4남매 부부가 모였다.

여태 미혼인 막내는 혼자서

천방지축 세상을 떠돌았다.

4남매 부부가 갑론을박하고 있는 중

해는 뉘엿 서산에 닿았고

노부모의 허리도 기우뚱하다.

노을 비낀 호수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막내의 전화가 왔다

수면에서 튀어 오르는 은빛 생선들이

연신 파란 물방울 튕기면서

그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적신다.

4남매 부부의 입에서는 아직도

침방울 튀고 어둠이

여기저기 나무 꼭대기에서 내린다.

 

 

 

* 옹달샘의 여인

 

동네 뒷산자락 비켜 있는 옹달샘

고인 물이 한 바가지쯤.

수굿이 고개 숙인 여인

음전한 미소를 머금고

목 마른 나그네에게 물 한 中鉢 건넨다.

옹달샘은 또 차오르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중발을 물린

나그네에게 낯이나 씻으라며

또 한 중발의 물을 건네는

여인의 얼굴이 수더분하면서

예사롭지 않음이 서려 있어,

볼품 없이 조그만 그 옹달샘은

10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지만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여인의 손길은 향긋하기 그지없다.

천 년도 더 된 숲에서

샘물처럼 흐르는 향기.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수많은 사람들을 울려 온

종 소리는 오늘도 누리에 퍼지고 있다.

종 소리에 몰려 가는 사람들

종 소리에 몰려 오는 사람들

군중들의 함성과

그들이 흔들어대는 깃발

의 소리까지 합쳐지면

자는 아기가 깨지 않을 수 없다.

선잠을 깬 아기는 보채고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면

종 소리와 함성과 깃발이 잦아들다가

아기가 분탕질까지 하기 시작하면

다시 울리는 종 소리

몰려 오는 군중들의 함성

피를 부르는 깃발들의 펄럭거림.

겁에 질린 아기는 울다 잠들고 있다.

 

* 반가운 소리

 

땅거미와 함께 피로가 내릴 때

현관에서 들려 오는

, , 콕 누르는 소리

아픈 데를 쿡쿡 찔러대는 것이 아니라

어혈을 빼 내는 시원한 소리.

강물에 앉은 물새 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듯

화들짝 피로가 飛散하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디익은 소리.

현관이 열리면서 켜지는

불빛보다 더 환한 얼굴로 들어서는

남편이나 아들 또는 딸.

낯선 사람으로 돌아와서

금세 낯에 익디익은 사람이 되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 롤러코스터

 

롤러코스터

하늘로 치솟을 때

아이들은 천사들 앞으로 다가간 듯.

나락으로 떨어질 때

아이들은 악마들의 아귀에 떨어진 듯.

꿈에서 깨어나

롤러코스터를 내리면

타려는 사람들이 멀리까지

구불구불 줄 지어 서 있다.

끝 없이 올라갔어도

이 땅에 돌아와 있었고

끝 없이 내려갔어도

이 땅에 돌아와 있으매

그저 아련한 기억 한 줄기

밥 짓는 연기인 양 감돌고.

 

* 문병

 

한 주일에 두어 번씩

친 형제보다도 더 자주

웃음을 주고받고

힘을 주고받고

같은 일터에서 서로를 받혀 주며

오르막길에서는 밀어 주고

내리막길에서는 잡아 주던

이제 너, 잠 잘 때 외에는 눕지 말아야 할

침상에 모로 쪼그리고 누웠구나.

웃음기 사라지고 일그러진 얼굴에서

너의 흔적이 지워지고

누구나 저주하는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매

화들짝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내가 거기 누워 있는 듯

기억이 시든 꽃잎처럼 짓밟히고 있었다.

그렇게 흙이 되어 가는 것이거늘.

 

*꼬리뼈

 

사람에게 꼬리뼈가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꼬리가 없다.

태초에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꼬리가 짧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방향을 잃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텔레비전을 보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하면서부터

종일토록 꼬리뼈를 비벼대어서인지

꼬리뼈는 더욱 닳아서

백주에도 청맹과니가 되었다.

꼬리 없는 사람들만 모인 광장에

산에서 내려온 꼬리의 사내가 나타나면

그가 산에서 살 자라며

그가 잘못 왔다고 비웃으며

꼬리뼈를 자랑스럽게 쓰다듬는다.

 

*더 이상 시소는 아니다

 

불과 얼음을 함께 지니고 살아 가면서

불이 너무 뜨거워

얼음을 녹여서도 안 되고

얼음이 너무 차서

불을 꺼 버려서도 안 되거늘

불과 얼음의 시소는

노상 균형을 잃는다.

하여 詩와 노래가 생겨나고

달에 갔다 오면서 문자를 날리며

불과 얼음의 시소는

다시 균형을 되찾는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 뚝 떨어지는 물로 불길이 잦고

얼음이 꽝꽝 얼어 붙기 시작하면

화롯불에 더욱 가까이 가게 마련이지만

더 이상 시소는 아니다

기울 듯 기울 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시소만 시소다.

 

* 불면의 밤

 

하루를 끄고

숨의 심지도 낮추었을 때

개구장이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채곡채곡 쌓이는 잠을 헤집는다.

나를 닮은 아이

아내를 닮은 아이

내가 아는 사람들을 닮은 아이들

숨바꼭질하며 분탕질한다

마당 한 귀에 꼭꼭 묻어 두었던

보고 싶지 않은 일기장을 꺼내는가 하면

공상과학 영화 이야기를 지껄인다.

야단을 쳐서 쫓아내려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아, 대신

그들의 이야기에서 실오리를 잡는다.

불면의 밤에는 시인이 된다.

 

* 내가 있는 곳

 

무지개 빛 구름 위에서

잠자리에 든 것이 분명한데

쓰레기 썩어 가는 시궁창에서

깨어 난 나를 발견하였다.

나를 꼬집고 때려 보니

탁류 도도히 흐르는

물가에 누워 있었다.

물은 점점 차올라 나에게 다가와

나는 벌떡 일어나서 열심히 달렸다

거센 물결이 목덜미를 잡을 듯 쫓아왔을 때

나는 산꼭대기에 올라 있었고

분명히 거기에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무지개 빛 구름 위에서

깨어 난 나를 발견하였다.

머리를 힘껏 흔들고 찬 물을 끼얹으니

나는 산꼭대기에서 하산하고 있었다.

 

* 캠퍼스에서 들은 선율

 

도저히 누를래야 누를 수 없는

바람 소리

새 소리

왁자지껄 떠드는 젊은이들의 소리

를 누르고 구름에서 들리는 듯

나를 꼼짝없이 데리고 간 그 소리.

늙지도 않는다.

맑은 샘에서 온 몸 깨끗이 씻고

송어처럼 치솟아 들리는 소리.

나는 늙어 가는데

너는 늙지도 않는다.

반 백년 전 캠퍼스에서

처음 너를 만났을 때

살아 가는 기쁨의 한 조각을 건진 것과

똑 같이 지금도 너는 그때 그 젊음으로

나를 에돌며 더 깊어진 기쁨을 주는데

다만 달라진 것은 하나뿐.

 

* 채워지지 않는

 

산을 오를 때는 언제나

땀을 몇 바가지나 쏟지만

물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가

새로운 물을 채워 준다.

하산하고 세월이 지나면

그 산은 잊고 또 다른 산을 오른다.

어차피 내려올 산, 잊을 산이지만

누가 나를 떠미는가?

주말이면 이미 산을 오르고 있다.

책을 읽어도 읽어도 또 읽는 것처럼.

한 과정을 끝내 갈 무렵

다음 과정을 더듬고 있음은

채워지는 공간이 채워지는 만큼

뒤로 더 물러나기 때문이리라

그 빈 공간이 채워질 때까지.

채워질 수 없는.

 

* 울부짖는 사자를 대적하라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낮은 소리로 으르릉거리는

사자의 소리를 듣는가?

사자가 우리의 일을 넘보며

소리 없는 미소를 짓고

신이 나게 훌라춤을 춘다면

그때라도 정신을 차릴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일에 沈潛하여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때

야트막한 철책을 뛰어넘고

사자는 바로 곁에서

산천이 떠나가라 포효한다

기절하지 않더라도 때는 늦다.

잠이 쏟아질수록

훌라춤보다 더 세차게

머리를 상하좌우로 힘껏 흔들며

새벽을 맞이할 일이다.

 

* 기다려 온 태풍

 

여름이면 온 세상을 초토화시키는

태풍이 저 南洋에서 발달하여

이리로 가까이 오고 있단다

메마른 대기인데

습기가 벌써 느껴지는지

사람 사람의 얼굴이 밝아지고

건네는 말과 말에 생기가 묻어 나며

바람을 우습게 알고 있다.

태풍은 코 앞에 다가와 있다.

 

동서고금의 모든 채찍들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싹 타들어 가도록 말려 왔는데

아마겟돈을 기다리는 사람들

傳令들의 숨결을 피부에 느끼고

솟구치는 미소를 가누면서

그 날을 알리는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태풍을 기다리는 사람들

아마겟돈이 코 앞에 다가와 있다.

 

*유토피아로 가는 배

 

유토피아로 떠나는

호화 유람선이 부두에서

뱃고동을 울리고 있다

표 없이 탈 수 있는 배

다만 그 언어로만 말할 수 있으면

탈 수 있다는 배가

연신 곧 떠난다는 신호를 울리고

부두로 사람들이 몰려 들고 있다.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의 간절한 몸짓을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그 언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귀마개로 귀를 막은 채

비웃고 때리며 발을 걸며

승선을 방해하고 있다.

뱃고동은 갈수록 더 크게 울리고

그 소리에 빨려 드는 사람들.

그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멀어지는 사람들.

 

* 공기와 언어

 

민족별로, 나라별로

각기 다른 말을 쓰고 있음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 수 없음을

에베레스트에 올라서

공기의 값을 아는 것만큼이나 느끼는가?

값 없이 숨을 쉬듯이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값 없이 말을 하기 시작함은

값으로 따질 수 없기 때문일까?

아예 공기와 말을 거저 주심은

숨을 쉬고 말을 할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지 못할지라도

큰 한숨 몰아쉴 때나

抑何心情 토해낼 때라도

하늘 한 번 쳐다보라는 것.

값 없는 것이 無價임을

삼복더위에 샘물 뒤집어 쓰며 느끼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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