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想集

사람 사랑 삶

오종권 2017. 10. 20. 22:14

사람, 사랑,

저자 소개

 

오종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사법시험 합격. 부장검사 역임. 현재 변호사. 문예지에 시와 단편소설 당선. 한자능력검정 특급, 한자한문지도사.

소설 파문’, ‘별들의 노래’, ‘’, 시집 犬生(견생)’ 7, 수상집 바로 곁에서 반짝이는 것들2, 법률 서적 행정법’, ‘형법 노트’(이상 전자책과 블로그책 포함) 논문 수 편 등 집필.

들어가는 말

 

대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거의 동시에 같은 종류의 두 가지 울림을 느꼈다. 하나는 교정에서 베토벤의 로맨스 2F장조를 들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국어 수업에서 論語(논어) 중에 있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이를 익히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글을 배웠을 때이다. 그것들은 마치 last song syndrome(또는 ear-worm)처럼 내 귀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잔잔하지만 수평선까지 밀려가는 물결처럼 나를 여태 은은한 감동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살면서 어떠한 것을 듣거나, 보거나, 먹거나, 읽을 때 기분 좋은 쩌릿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을 지탱해 갈 수 있는 힘을 여간 얻는 것이 아닐진대, 이렇게 좋은 선율과 한문 고전의 좋은 말씀은 나를 지탱해 왔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더 크나큰 획을 그은 것은 그 후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가의 종교관에서 사람의 목표는 현상 배후에 있는 그 존재와 친교를 추구하는 것인바, 자신의 자아를 이 절대적인 영적 실재와 조화시킬 목표로 그 일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 말에 비로소 공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이 종교를 떠나서 고전 중의 고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흔히 성경을 가리켜 세계 역사를 움직인 책이라고들 한다. 지당한 말이다. 특히 서양사는 성경을 빼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이 무엇이길래 세월을 뛰어넘어서 지금까지도 대단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과연 성경과 논어 등 유학상의 고전은 우리네 험한 삶의 갈림길마다 선연한 빛을 번뜩이며 길을 밝혀 주고 있다. 또 우리의 피부에 스치는 가녀린 바람에서도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듯, 우리네 삶에서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도 성경과 한문을 비추어 보면 의외로 많은 것들을 건져 낼 수 있는 계기를 잡게 한다. 한 가닥 실마리가 난마처럼 엉킨 실타래를 푸는 단초가 되듯, 사소해 보이는 생각을 지레 멈추지 말고 끝까지 밀고 들어가다 보면 영락없이 성경이나 한문의 빛을 받게 되어 또 굵직한 것을 건지게 된다.

특히 성경을 통하여, 우리 사람이라는 것이 만물의 영장이라곤 하지만 어찌 보면 버러지만도 못한 목숨에 불과한 존재라고 여겨지던 것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사람이란 여호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感泣(감읍)하게 된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람이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혹자가 말했듯이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나게 된 존재로서 살기 위하여 사랑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점철될 때 사람다운 삶이 된다. ‘사랑하다살다가 발음과 철자에 있어서 비슷하듯 영어에서 ‘love’ ‘live’, 독일어에서 ‘lieben’‘leben’이 또한 비슷한 것이 그저 우연한 것일 뿐인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면 69.3%가 한자어로 되어 있는 언어를 쓰는 만큼 한문에서, 또 글로벌 시대에 세계인의 한 사람으로서 필경 성경에서 지혜를 구하여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 이렇듯 성경과 한문이 비춰준 상념들을 정리하여 틈틈이 문자화한 것들을 책으로 엮어 보았다. 블로그북으로 이미 발행한 것들 중 일부도 끌어내어서 종이책으로 엮었음을 부기해 둔다.

 

2017. 7.

 

해갈의 빗소리를 들으며 서초동에서 저자

목차

 

1. 다수결의 병폐

2. 大人者 言不必信 行不必果 惟義所在(대인자 언불필신 행불필과 유의소재)

3. 한문 속의 미녀들

4. 絶學無憂(절학무우)

5.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6. 有感

7. 눈의 양면성

8. 작은 듯 큰 즐거움

9. 인간의 장래

10. 간발의 차이

11. 소녀들의 喫煙(끽연)

12. affirmation, visualization

13. 음악 예찬

14. 등산 예찬

15. 암기 습관

16. 贈賂者(증뢰자)의 자살

17. 마스크

18. 제도와 실무의 괴리

19. 인생의 기복-롤러코스터

20. 메르스 공포

21. 양심을 버림

22. 불과 얼음

23.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세상

24. 크리스마스 有感

25. 사람은 자기가 걷는 길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

26. 誘惑魔力(유혹의 마력)

27.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28.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특권성

29. 진리를 감사함

30. 세상 지식의 허구성

31. 성경과 君臣 關係(군신 관계)

32. 습관의 변화

33. 세상의 문제들의 완전한 해결책

34. 참다운 행복의 길

35. 벗 관계를 통해 얻는 지원

36. 사람으로 태어난 것의 은혜로움(*28장의 보충임)

37. 부활의 희망

38. 벼랑 가에서 춤추는 시각장애인들

39. 성욕의 파장

40. 핏줄의 힘과 부부

41. 노인 요양 병원을 방문하고 나서

42. 언어 有感

43. 말은 곧 그 사람이다

44. 하와의 말을 들은 아담

45. 교육과 변화의 상관관계

46. 가치 있는 것들을 모르고 지냄

47. 선녀와 나무꾼

48. 영원한 생명

49. 알파고

50. 우주는 리듬

51. 본성이 충족되는 세상

52. 성경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53. 특히 성경 중 창세기에 있어서 완벽한 문장은 성령의 작용의 증거이다

54. 낙원에 대한 소망

55. 배우지 않으면 늙는다

1. 다수결의 병폐

 

대법원의 판결은 흔히 큰 영향을 가져오기 때문에 대법관들 중 찬성자와 반대자가 명시되고 중대한 사건의 경우 공개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이 주목을 받기도 하고,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소수 의견이 다수 의견이 되기도 하면서 그 대법관이 각광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오늘날 전 세계의 보편적 정치제도인 민주주의에 있어서 핵심 장치라고 할 수 있는 다수결 제도에 관하여 잠시 되짚어 본다.

어느 단체이건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하여 토의를 한다. 의장 등 주재자가 일방적으로 회의를 이끌어 가는 단체가 아니라면 대개 회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여 한두 가지 내지 서너 가지의 의견이 나오고 좀 더 토론이 진행된 끝에 두 가지 의견이 마지막으로 남게 된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이면서 방법론적 차이가 있을 뿐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찬성과 반대 등의 정반대 의견으로 나뉘면 어려움이 따른다.

얼마간의 난상숙의 끝에 대개 민주주의 방식이라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다수결로 표결을 하게 된다. 다수결이 과연 의결 방법으로서 가장 좋은 것일까? 사실 다수결을 채택하고 있는 데에서도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고,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차선책인 다수결을 채택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을 때 언제까지고 토의와 토론을 계속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의견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자 중에는 편견을 무턱대고 고수하는 자도 있고, 감정적으로 우기는 자도 있고, 전제되는 사실 중 뭔가를 잘못 알고 핏대를 올리는 자도 있으니, 다수결이 차선의 편법은 될 수 있는 경우도 흔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깊은 통찰력을 가진 의견이 소수로 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 뛰어나다라는 말 자체에 소수라는 의미가 있다. 운동장에 서 있는 백 명의 키가 대부분 180cm 정도라면 181cm인 학생에게 뛰어나다는 말을 쓰지 않지만, 대부분 170cm 정도인데 그중 몇 명이 180cm라면 뛰어나다는 말을 쓸 수 있다. 그렇듯 뛰어나다라는 말 자체에 탁월한 것은 少數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데, 토의할 때는 그 소수가 탁월함이 아니라 고집스러움, 부족함, 부적절함 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司馬遷(사마천)史記’(사기)에서 千羊之皮不如一弧之腋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천양지피 불여일호지액 천인지낙낙 불여일사지악악-천 마리 양의 가죽이라도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보다 못하다. 천 사람의 말이라도 선비 한 명의 말보다 못하다)이라고 했다. 사실 전문가 1명과 비전문가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그 전문가의 소관 사항에 관하여 토의를 한다면 10 1로 전문가의 의견이 열세에 있다 하더라도 그 전문가의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제대로 토의를 하지 않고 형식적인 토의를 잠시 하다가 표결에 부쳐 결정한다면 전문가의 의견은 채택되지 않을 게 뻔하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비단 전문적인 사항이 아니라도 뛰어난 통찰력이나 식견을 갖고 있는 사람의 의견은 그렇지 않은 다수의 지식인의 의견보다 더 나은 경우도 왕왕 있다.

예를 들건대, 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언하였다. 당시 경제 장관을 비롯하여 많은 장관, 정치가, 경제학자 등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통치자는 그것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지금 그 건설을 비판하는 사람은 만나볼 수 없다. 그때 그것을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하였다면 아마 큰 표차로 부결되었을 것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영화는 다수결의 맹점 내지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살인 피고인에 대하여 배심원회의에서 배심원 11명은 유죄를 주장하였고, 오로지 1명만 무죄를 주장하였는데, 무죄 주장자가 수의 절대 열세에 절망하여 자기의 주장을 양보하였다면 피고인은 전기의자에 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조리 있게 끝까지 무죄의 근거를 또박또박 개진하였고 장시간 토의가 허용되었기에 유죄 주장자는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의 의견을 무죄로 바꾸었고 결국 무죄로 평결이 된 것이다. 이러한 극적인 예는 실제로는 자주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비화도 그 예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제안한 맥아더의 지지자는 당시 거의 없었다고 한다. 급기야 미국의 3군 수뇌부들이 다 모인 회의가 열렸고, 3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많은 참모들이 그 작전을 반대하였다. 이에 맥아더는 45분간의 열변을 토하며 그들을 설득하여 결국 그들의 찬성표를 얻어 내었고, 결과 성공률 5천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것이다.

또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3대 철학자들 모두도 다수결 내지 민주주의를 비판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 정치는 폭민정치라고 비난하였고, 플라톤은 민주주의 국가의 문제점은 지도자가 무능하고 부패한 것이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도 선거제도를 나쁜 제도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민주주의를 우중정치라고 비판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이 바로 다수결 때문이다. 한국의 자유당 시절의 선거를 고무신 선거라고 풍자한 것도 무식한 부녀자들에게 고무신 한 켤레 사 주면 표를 주고, 그러한 표들로써 국회의원 등에 당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보자의 인품이나 재능, 정치 능력 등에 대하여 지식인들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데 무식한 부녀자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요즘이라면 매스컴이 워낙 발달하여 후보자들의 면면에 대하여 좀 더 알 수 있지만 당시는 누가 누구인지를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투표를 하였다.

또 여론이라는 것은 마치 불길 같아서, 다수 의견 쪽에 붙은 불길에 더 많은 사람이 쏠리면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어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확산되어 마침내 이성을 태워 버린다. 1세기 때 유대인 사회에서 극소수파에 불과한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처형되었고, 전 역사에 걸쳐서 그러한 일들은 수없이 되풀이되었으며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요컨대, 여론 때문에 역사는 수시로 뒷걸음질 쳤고, 반전되거나 뒤틀리거나 우왕좌왕해 왔다.

물론 여론의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역기능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그 역기능의 원인은 여론이나 다수 의견이 주로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데 있다. 여론은 말()과 같아서 마부의 채찍질에 따라 미친 듯이 달린다. 마부가 비교적 덜 이성적이라면 말의 질주는 대단히 위험하고, 길 아닌 데도 거침없이 달리게 마련이다. 다수결에 있어서도 다수 의견을 주도하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사람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다수에서 떨어지는 데서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껴서 무비판적으로 다수 의견을 따르게 되는데 이를 동조화 현상이라고 하고, 어빙 제니스는 이를 집단사고라고 명명하였다.

케네디 행정부 시절 큐바의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이 바로 이 집단사고 때문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당시 주요 각료들이 그 작전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당시 주도 세력인 몇몇 각료들의 주장에 감히 반대를 하지 못하고 동조하였던 것이다. 또 개미 떼의 행진에서 관찰된 바로 선두의 개미를 따라가다가 선두의 개미가 잘못된 길을 선택하면 뒤따르는 개미들의 떼죽음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소위 원형 선회(circular mill) 현상 역시 무비판적인 추종의 치명성을 말해 준다.

다수결의 역기능을 최대한 제어하기 위하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히 토의하고 회의 참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차분하고 이성적이어야 하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누구든지 정치적, 경제적, 감정적, 사회적, 개인적, 이기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파벌이나 참여자 간의 친소관계가 있으며, 다루어지는 사안에 대하여 충분하고도 깊은 지식이 모자라거나 더욱 중요한 점으로 모두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무한정 토의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다. 이래저래 다수결은 문제투성이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다수결을 대체할 만한 방법이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초등학교 때부터 토론 문화를 더 활성화하고, 감정에 쉬 휩쓸리는 한국적 정서를 적절히 제어한다면 다수결의 문제를 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2. 大人者 言不必信 行不必果 惟義所在(대인자 언불필신 행불필과 유의소재)

 

맹자를 읽다가 깜짝 놀란 구절을 발견하였다. ‘大人者 言不必信 行不必果 惟義所在즉 큰 인물은 반드시 말한 것을 신의 있게 행하려 하지 않고, 행동은 반드시 말한 대로 이루려 하지 않는다. 오직 의가 있는 곳을 따라가기만 한다. 즉 어느 원칙에 무조건 고착하지 않고 사정 변화에 따라 다만 의롭게 행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큰사람은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믿어주기를 요구하지 않고, 행동을 하면서 좋은 결과를 요구하지 않으며, 오직 정의가 존재하는 바를 말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앞의 해석에 따름) 가히 충격이었다.

先行其言 而後從之(선행기언 이후종지), 言行相違 辱及于先 行不如言 辱及于身(언행상위 욕급우선 행불여언 욕급우선), 言勿異於行 行勿異於言 言行相符 謂之正人 言行相悖 謂之小人(언물이어행 행물이어언 언행상부 위지정인 언행상패 위지소인) 등등. 어려서부터 거짓말하지 마라’, ‘食言(식언)하지 마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고, 그것이 至當之事(지당지사)라고 생각하여 왔는데 이것은 또 무엇인가? 원문이나 해석이 잘못되었는지 몇 번을 곱씹어 보아도 잘못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참뜻은 과연 무엇인가?

그렇다. 대인의 경지에 이르면 어떤 틀을 벗어나는 것이다. 공자도 비슷한 말로 大人不器’(대인불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어떤 분야에서든 대인, 즉 고수의 경지에 이르면 그 분야에서의 철칙이라고 하는 것들을 뛰어넘는다. 예컨대, 바둑에서 초심자 시절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는 것이 빈삼각은 두지 마라인데, 높은 경지에 이르면 빈삼각에 묘수 있다라는 말대로 절묘한 빈삼각을 두어 위기를 타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초심자나 중급자들이 기보를 보고 바둑을 연구하다 빈삼각의 묘수를 보고서 자기도 따라 한다고 아무 데서나 빈삼각을 둔다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어떤 장면에서도 절대로 절대로 빈삼각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얽매여 있으면 묘수를 발견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고수가 되어야 빈삼각을 둘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굳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소한 1급 이상은 되면서 빈삼각을 둘 생각이 第一感(제일감)으로 떠오르면서도 그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테니스 등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처음에는 기본 폼을 익히기 위하여 지겹도록 연습을 한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것도 연습하면서 속으로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마뜩잖은 생각을 하면서 시큰둥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대선수가 되고 나면 자유자재로 나름대로의 폼을 구사하여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고 효과를 가져온다.

마찬가지로 대인의 경지에 이르면 말한 대로 행하지 않아도 스스로 전혀 거리낌이 없고 이러는 데는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尾生之信(미생지신)이라는 사자성어의 유래가 되는 故事(고사)에서, 미생이라는 사람이 다리 아래에서 사람을 만날 약속을 하였는데, 갑자기 큰 비가 내려 물이 다리까지 차오르는 데도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피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익사하였다고 한다. 이 고사를 읽는 사람들 중 과연 몇 사람이 미생을 칭찬할까? 물론 이 고사 자체도 미생을 비웃기 위하여 나온 것이지만 그를 칭찬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경우 약속을 어긴 사람을 모두 대인이라고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너무 뻔한 사례이기 때문에 별로 다툼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실제 세상사에서는 신의와 違約(위약) 간에 갈등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 실제로 그렇게 해 왔다고 자부하는데 言不必信을 보고서 내가 너무 고지식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면서 손해를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라도 가끔 거짓말도 하며, 약속도 어기면서 살아야겠다라는 결심은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이 뒤집어지기 전에는 여전히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언불필신의 경우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예가 있을까?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역시 나는 대인이 아닌가 보다. 물론 伐謀(벌모)라고 해서 군사상으로 술수를 쓰는 것은 예외일 터이며, 그 외의 일상사에서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해답의 열쇠가 맨 뒤 구절에 있음을 알게 된다. ‘惟義所在’(유의소재) , 다만 의롭게 행한다는 것이다. 즉 위의 극히 예외적인 경우의 표준은 ()에 있다. 대의를 위하여 작은 원칙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이번에는 무엇이 인가하는 새로운 문제가 또 제기되는데, 이래서 윤리적인 문제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상적으로 쉽게 쓰는 용어로는 융통성이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이 위의 경우에 반드시 적절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렵지 않게 혼동해서 생각나는 단어이다. 융통성이란, 원칙을 밥 먹듯 어기는 사람들이 흔히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 말인데, 이를 너무 자주 남용하다 보면 원칙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으로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융통성을 적절하게 가치 있게 발휘하기 위하여는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맹자의 위 구절은 감히 대인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신선한 빛을 던져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어딘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 차원 높은 경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말을 실생활에서 과연 어느 정도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해지면서 좀은 긴장되기까지 하는 느낌이다.

3. 한문 속의 미녀들

 

한문의 사자성어를 공부하다 보면 흥미로운 것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미인[미녀]에 관한 것이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그 사실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 외모 중심의 여성관, 유희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등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하기야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글을 읽을 기회도 거의 갖지 못하였으니 글을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기이었을 것이고, 특히 남성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패륜이라고 여겨질 정도인 데다 더욱이 후세에 전해질 글을 쓴 경우는 千載一遇(천재일우)인 정도이었으니 여성 문인이 남성에 대하여 쓴 글을 대하기는 거의 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남성은 여성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호색한이 대장부로 치부될 지경이었으니, 글깨나 쓴다면 여성에 대하여 한 구절쯤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남의 글을 베껴 쓰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사람쯤 되면 머리를 싸매고서라도 독자적으로 창안한 묘사로 미인을 그렸을 것이며,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미인을 묘사하였고, 미인을 묘사하는 데는 산문보다는 로 하는 것이 제격에 맞을 것이고 節句(절구)律詩(율시)의 일부로 자리 차지를 한 것일 게다.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 있는 남성에게 곁에서 애교를 부리는 아름다운 기생은 실제로도 아름다웠을 수 있었겠지만 취기에 ()하여 더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고, 이때 멋진 시로 미인을 묘사하기라도 하면 좌중은 더욱 흥이 나고 그 시인은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사자성어 중 미인에 관한 것을 몇 개만 골라 적어 보면 이렇다. 傾國之色, 傾城之色, 綠鬢紅顔, 丹脣皓齒, 朱脣皓齒, 面若朝霞, 明眸皓齒, 雪膚花容, 如玉其人, 燕瘦環肥, 王朝美人, 月態花容, 沈魚落雁, 羞花閉月, 萬古絶色, 無比一色, 雲鬢花容, 天下一色, 天下絶色, 雪膚花容, 絶世佳人(경국지색, 경성지색, 녹빈홍안, 단순호치, 주순호치, 면약조하, 명모호치, 설부화용, 여옥기인, 연수환비, 왕조미인, 월태화용, 침어낙안, 수화폐월, 만고절색, 무비일색, 운빈화용, 천하일색, 천하절색, 설부화용, 절세가인) 등등. 이에 비하여 멋진 남자에 대한 사자성어는 나의 과문 탓인지 모르겠으나 熱血男兒, 玉骨仙風, 軒軒丈夫(열혈남아, 옥골선풍, 헌헌장부) 등 기껏해야 몇 되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미인에 관한 말을 굳이 분석해 보면 대부분이 과장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天下라든가, ‘萬古는 지역이나 시대를 통틀어서 제일간다는 것이니 얼마나 과장된 것인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여자는 특정 지역과 시대 중에서도 극히 국한된 부분에 지나지 않는데, 아예 시공을 한꺼번에 싸잡아서 최고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면 수많은 미인들과 동렬에 놓일까 봐 어떻게 해서라도 빼어난 미인이라는 점, 다른 미인들과는 비교하는 것이 실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게다. 그리고 자기가 본 미인이 가장 뛰어난 미인이라고 하면 다른 남자들에게 좀은 으쓱해질 수 있을 거라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傾國之色(경국지색)이나 傾城之色(경성지색)이라는 것도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중국의 4대 미인이라고 하는 양귀비, 초선, 왕소군, 서시 외에도 장려화, 조비연, 말희, 달기 등은 실제로 나라의 명운에 큰 영향을 끼친 미인이기도 하다. 羞花閉月(수화폐월)은 과장된 것이지만 재미있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양귀비와 초선이 얼마나 미인이면 꽃이 부끄러워하고 달이 숨을 정도인가? 이 정도의 詩的 과장법은 점수를 주어도 괜찮겠다.

그리고 미인을 자연에 빗대어 말할 때, 주로 꽃, , , 노을 따위에 비하였는데 비유의 폭이 너무 좁다는 느낌이다. 자연에 아름다운 것들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중국에 내로라하는 대문장가들이 많았는데 그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든다. 적어도 沈魚落雁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나 낙조를 등지고 날아가는 기러기들’, 이쯤 되어야 직설적인 미인의 비유보다 한결 멋있고 맛있다. 원래 그 말은 왕소군의 미모에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떨어졌고, 서시의 미모에 헤엄치던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멈추어 가라앉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과장된 해석보다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더 운치 있다.

또 흥미로운 점은 귀밑머리, 반듯한 눈썹, 하얀 치아, 하얀 피부, 불그스레한 얼굴, 붉은 입술 등이 미인의 조건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면들이 아닌 것 같고, 각종 미인대회에서도 그런 점들에 높은 점수를 준다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도톰한 입술, 계란형 얼굴 윤곽, 크고 서글서글한 눈, 큰 키에 가는 허리, 여윈 듯한 날씬한 몸매 따위가 미인의 조건이 될 터인데, 그런 면들을 언급한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미인관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족히 그럴 만하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지역마다 미인관이 다르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 점이다. 예컨대, 지척에 있는 북한만 해도 계란형 얼굴 윤곽이 아니라 동그스름한 윤곽을 미인의 조건으로 본다.

어쨌거나 미인에 관한 사자성어에서도 남성우위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남성이 여성을 유희의 대상으로서, 심지어 소유의 대상으로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고, 아름다운 여성에게 얼마나 매혹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酒色(주색)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술이 육체적으로 혼미케 하는 것이라면 은 정신적으로 혼미케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둘 다 남성의 心身(심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취기에 하여 달 같은 미인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자 그대로 羽化登仙(우화등선)하는 느낌일 게다. 또 과장된 표현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최면을 당할 수도 있어 보통급 미인도 특급 미인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고, 그리하여 스스로 만족하기도 할 것이다. 이왕이면 자기가 특급 미인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도취에 더 빠지지 않겠는가? 또 남에게 얘기할 때도 자기의 어깨가 으쓱해지고, 듣는 측도 더 흥미로워지고 호기심이 더 생겨서 이야기가 점입가경으로 들어가기 십상일 것이다.

남성들은 미인 앞에서는 얼음물 속에 손을 넣고 버티는 시간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길어지고, 재판에 있어서도 미인에게는 더 관대한 판결이 내려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미인은 예나 이제나 남성의 지대한 관심거리임은 신의 섭리이기 때문일까?

4. 絶學無憂(절학무우)

 

지혜의 왕 솔로몬은 그답지 않게 지혜가 많으면 괴로움도 많으니, 지식이 늘면 고통도 늘기 때문이다’(전도서 118)라고 읊었다. 철들기도 전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는 우리들은 처음에는 의외라는 느낌이 드는 경구이다. 독서를 불변의 미덕으로 여기고 학문을 닦는 것을 고상한 과업으로 여겨 온 우리로서는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다. 동양에서는 至樂莫如讀書(지락막여독서-가장 큰 즐거움은 독서)라는 말도 있고, 서양에서는 몽테뉴가 가장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오락은 독서라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그 유명한 말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이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렇듯 지식 내지 지혜를 얻기 위하여 가장 값싸고 효과적인 것이 독서라며 독서를 예찬해 왔는데, 지혜가 많으면 괴로움도 많다니 무슨 뜻인가?

생각해 보면 우선 지혜의 전제가 되는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서 첫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을 뿐 아니라, 금세 비워진다. 지식을 습득할 때에는 그 재미에 폭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창 그 재미를 들일 때는 문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면서 독서에 빠진다. 청소년 시절을 돌이켜 보면 책 읽는 재미에 식사 시간이 귀찮고, 심지어 잠을 자는 것까지 싫을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밥 먹으러 오라고 여러 차례 부르고 급기야 방에까지 와서 채근을 해야 마지못해 끌려가기도 하였고, 잠이라는 것을 왜 만들어 두었는지 누구에겐가 모를 불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새벽잠을 설치고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읽던 책을 부리나케 끄집어내 또 읽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는 순전히 흥미 위주로 읽고 또 읽었다. 흥미독서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대학 시절 이후에는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하여, 어떤 주제에 관한 것을 탐구하기 위하여 읽었다. 이른바 목적독서라고나 할까? 또는 지식인으로서 교양인으로서 행세하기 위하여는 다방면의 지식과 상식을 갖추어야 하므로 광범위한 독서를 하기도 하였다. 교양독서인 셈이다. 그러다가 나이가 더 들면서 이상의 동기에서보다는 여가 시간을 그런대로 값있게 때우기 위하여, 또는 심심풀이로 책을 읽게 되었다. 여가독서인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종류의 독서라도 낙담케 하는 것은 책을 읽고 나서 며칠만 지나면 읽은 것의 대부분을 까먹는다는 점이다. 흥미독서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나머지의 경우 독서라는 것이 반드시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까먹고 나면 도대체 힘들여 책을 왜 읽는지 회의가 치솟는 것이다. 통계상 독서 인구가 그리 많지 않고, 독서 인구 중에도 연간 읽는 책의 권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가 상당히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솔로몬은 책을 읽는 것은 지치게 한다(다른 번역에서는 너무 책에 빠지면 지친다)라고 하였다. 책을 읽을 때마다 읽은 족족 다 기억하거나 대부분을 기억한다면 독서 열풍이 굉장할 것이다. 엄청난 지식을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해낼 수 있겠는가 상상한다면, 인류는 벌써 외계를 자유로이 왕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력은 사실 별로 보잘것없는 것이므로 궁여지책으로 기억술 같은 것이 나도는 모양이다.

또 한 가지 독서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지식이 곧 부자가 되게 하거나, 권력이나 지위를 가지게 하는 등 소위 만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길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부와 권력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지식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현실적으로 재벌이나 권력자가 지식의 최고봉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지식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석학이나 태사 중에 재벌이나 권력자가 거의 없는 것도 확실하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디모데전서 69)라든가 曲肱而枕之 飯疏食飮水’(곡굉이침지 반소사음수-팔베개하고 눕고 변변찮은 밥 한 그릇에 물 한 잔이면 족하다)라는 지식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재벌이나 권력자가 될 수 없음이 논리적이지 않은가? 차라리 몰랐다면 할 수 있을 일도 알기 때문에, 또 그 아는 바대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와 권력의 길로 내달을 수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가?

그리고 지식은 속성상 끝없이 지식을 탐하게 되어 있다. 지식을 섭취하다 보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자신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자괴감을 부추기게 되며, 같은 분야나 비슷하거나 인접한 분야의 사람들과 선의든 악의든 경쟁하게 되므로 학습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러다 힘들면 내가 애초에 왜 이런 길을 택하였는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도 얼마든지 많이 있었는데하면서 후회하게 된다. 주위에는 공부를 별로 많이 하지 않고도 부와 권력과 인기 면에서 소위 잘 나가는사람들이 빤지르르한 얼굴을 내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음에, 솔로몬은 미련한 자나 지혜로운 자나 한없이 기억되지는 않으니, 훗날에는 모두가 잊힌다. 지혜로운 자는 어떻게 죽는가? 미련한 자와 다를 바 없이 죽는다’(전도서 216)라고 말하고 있다. 시쳇말로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며, ‘목욕탕에서 옷 벗기는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사실 과연 지혜로운 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으며, 그렇게 불린다 하더라도 그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은 훨씬 더 적을 것이고, 그것마저 지혜롭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에 기록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역사에 기록된들 죽은 사람이 무엇을 알겠으며, 더 크게 보면 그 역사라는 것도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이라도 구름처럼 살다 스러지는 것도 한바탕의 인생살이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 만하다.

그래서 노자는 일찍이 絶學無憂(절학무우)라고 갈파하였다. 즉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근심도 없다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一字無識(일자무식)인 사람이 가장 행복하냐 하면 그것도 아닐 것이다. 노자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기까지는 그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을까? 아마 범인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 ()를 깨친 말이 나왔을 것이고 보면 전혀 다르게 해석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평생 학습의 외침이 고조되고 있는 근자에 학습을 피곤하게 여기는 사람이 학습을 기피하기 위하여 절학무우를 원용할지 모르지만, 원래 그 깊은 뜻은 오히려 전혀 반대일 것이다.

그러나 膏火自煎(고화자전)이라는 말도 있고 보면 공부라고 하는 것이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무조건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공부를 어느 정도 하느냐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5.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영화 국제시장은 단지 한국 현대사의 상징이라는 점을 떠나서 인생과 진리의 의미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해 주는 영화였다. 주인공 덕수의 삶은 현재 한국의 70대 남자 대부분의 삶이기에 그만큼 진한 공감을 준다. 개별적으로 보면 그보다 더 참담하고 더 힘든 생애를 보낸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의 세대라면 6·25 전쟁,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원, 월남전 참전, 이산가족 찾기 등 한국 현대사의 깊은 골을 이루는 그 사건들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70대로서 위 사건들의 현장에 직접 있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던 사람보다 훨씬 많겠지만, 그 사건들의 파장은 매우 크고 높아서 한국 국민이라면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70대는 물론 그 이하의 세대들도 간접적으로는 그 영향권 내에 있으므로, 특히 전쟁을 모른 세대들도 역사와 인생의 학습을 위하여 꼭 보아야 할 영화이다.

영화는 그 유명한 메러디스호의 흥남 철수 작전에서 시작되는데, 그 배에 타느냐 여부는 곧 생존 여부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흥남 철수 작전에서 철수된 총인원은 97,000명이라고 하는데, 그만한 수의 인원이 얼음 바람 몰아치는 흥남 부두에 남게 되어 결국 거의 모두가 폭사나 아사 등으로 죽었다고 한다. 권력자 몇 사람의 손에 의하여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어마어마한 사람들에게 비참한 삶의 길을 걷게 한 것이었다. 거슬러 올라가 1945. 7. 16.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였을 때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곧바로 소련의 스탈린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면 소련이 북한 땅에 진주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후세 史家들의 주장에 생각이 미치면, 그 알리지 않은 이유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어쨌든 한 사람의 위정자의 어쭙잖은(?) 생각이 일파만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새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덕수는 바로 아래의 6세가량 된 여동생 막순을 등에 업고 메러디스호에 정신없이 올랐는데, 여동생이 그 전에 없어졌음을 배에 올라서야 알게 되었다. 급기야 아버지가 딸을 찾기 위하여 어렵게 오른 그 배에서 도로 내리면서 덕수에게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하면 덕수가 가장 노릇을 하여야 한다는 점을 신신당부하며 장남=가장이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아버지와 여동생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고, 덕수는 가장노릇을 짊어진다. 아들은 어리더라도 가장이었다. 그는 동생들의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하여 뼈 빠지게 궂은일들을 한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남동생의 학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서독 광부로 지원한다. 서독 사람들은 지원하기를 기피하는 힘들고 천한 광부 노릇도 서로 하기 위하여 지원자들의 표정에 결연한 의지가 핏발처럼 선다.

서독에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면서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에게 위안과 기쁨을 준 것은 역시 서독에 돈을 벌러 온 간호원 영자였다. 그녀 역시 서독 간호원들이 다 기피하는 시체닦이 일을 하는 간호원이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였고, 서로 간의 교제는 고달픈 이국 노동자 생활에 큰 빛을 던져 주었다. 실제로도 당시 서독에 광부와 간호원으로 일하던 남녀들이 결혼을 한 예가 많이 있었지만, 사실 산 설고 물 설고 말 선 이역만리에서 同病相憐(동병상련)의 남녀들이 결합하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이는 일이었다. 진정한 사랑으로 엮어진 남녀의 사랑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특히 이토록 어려운 여건하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덕수는 귀국 후 잠시 느긋한 삶을 즐기는가 하다가 이번에는 고모가 하던 가게를 인수하고 여동생 결혼에 들 자금을 장만하기 위하여 다시 가장으로서 월남전에 참전한다. 역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는 것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물에 빠진 여자애를 구하다가 다리에 총을 맞는 등 우여곡절 끝에 살아서 귀국한다. 남의 나라 간의 전쟁에 민주주의를 사수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하에, 실은 돈과 목숨을 바꾸기 위하여 가난한 나라 청년들이 지뢰밭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여 5천 명이 죽고, 10만 명이 부상당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돈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사랑하는 아내의 만류와 눈물을 무릅쓰고 참전한 것을 보면 돈은 사랑을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였다. ‘사람의 목숨은 태산보다 무겁다라고 흔히 말 비단을 깔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목숨이 버러지만도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파병이 돈 때문만은 아니고 국가의 지시이며, 6·25 참전에 대한 우방 미국의 요청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는 측면도 있지만, 개별적인 참전 의사표시는 국내 근무보다 알량하게 좀 더 받는 월급이라는 미끼가 큰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더욱이 월남전이 공산주의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다는 명분하에 미국의 통킹만 공습으로 시작된 것이고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이래저래 한국의 현대사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은 분명하다. 6·25 때 미국의 신속한 참전으로 한반도 전체가 적화되기 직전에 기사회생한 데 대하여는 한국으로서 미국에 백배 감사해도 모자랄 일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이 뿌린 독초의 씨를 거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의 조선 합병에 遠因(원인)이 있겠지만,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의 열강들의 이해타산은 직접적으로 한반도 분단의 결정적 원인이라 하겠다. 미국 합참 작전국은 조지 링컨 소장 주도로 미소의 남북 분할 점령을 결정했다. 그로 인하여 한국은 6·25 이후에도 두고두고 부정적 영향을 받아 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슬픔과 의 대물림이다. 이것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이산가족 찾기이다.

1983. 6. 30.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온 국민의 가슴을 눈물로써, 나아가 피로써 젖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덕수는 아버지와 여동생을 찾기 위하여 나선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전화로 확인한바 아버지가 아니었다. 가족들은 모두 눈물을 쏟아 낸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슬픔과 한의 눈물이었다. 이번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여동생이 나타난다. 국제전화로 조바심을 하며 신원을 확인해 나가던 덕수, 33년 전 흥남부두에서 잃어버린 여동생 막순이임을 확인한 덕수는 또 눈물을 쏟아 낸다. 이번에는 기쁨과 설움의 눈물이었다. 이 장면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리라. 아니, 사람이 아니리라. 혈육의 상봉! 칼로도 벨 수 없는 것이 피라고 하지 않았던가! 동생을 잃은 데 대한 어느 정도의 가책을 늘 품어 왔던 덕수로서는 동생의 안전을 확인하고는 33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었으리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식을 모르는 아버지에게 동생의 건재함을 보고할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이었다. 이러한 혈육지정이 근자에 와서는 그놈의 돈 때문에 예사로 멀어지곤 하는 것을 보는 경우가 많아서 씁쓸하기 짝이 없다.

어느덧 70대에 접어든 덕수, 자녀들과 손자녀들과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한때를 보내고 있다. 아들이 예닐곱 살쯤 된 딸에게 노래하라고 하여, 딸은 굳세어라 금순아를 노래한다. 그 흥남 부두에서 덕수처럼 여동생과 헤어진 상황을 노래한 그 노래가 아니던가! 덕수는 손뼉을 치며 흥겨워하는데, 아들은 딸을 야단친다. 이 즐거운 날에 무슨 그런 노래를 하느냐고. 이어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어린 손녀에게 무슨 저런 노래를 가르쳤느냐고 타박을 준다. 아버지는 슬며시 일어나서 옆방으로 피한다. 아들을 되레 야단칠 기력도 사라졌다.

덕수가 옆방에서 혼자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흐느끼며 독백을 하는 것처럼 덕수는 정말,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장 노릇을 다했다. 아들 세대의 젊은이들은 그것을 모른다. 책으로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덕수의 방에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거실에서 아들 손주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60여 년의 한 인생의 파란만장한 파노라마는 이로써 끝이 난다. 泰山牛毛(태산우모), 사람의 목숨은 태산처럼 무거우면서도 소의 터럭처럼 하찮은 것이다. 길가에 자라난 이름 없는 한 줄기의 풀잎이다. 바람에 견디다가 행인의 발에 밟혀 죽어 버리기도 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면 되살아나서 햇볕에 반짝이기도 한다. 살랑살랑 달콤한 바람에 간지럽히기도 하고 부드러운 햇살에 졸기도 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수시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가래침에 덮이기도 하며 구둣발이나 바퀴에 치이기도 한다. 총체적으로 보면 후자의 경우가 전자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催淚(최루)적이고 신파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좀 있지만, 감정이입을 통하여 카타르시스가 충분히 되는 긍정적 측면도 다분하다. 어쨌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생의 참다운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에 相到(상도)하게 된다.

 

6. 有感

 

술에 얽힌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인간이 생긴 이래로 술이 있어 왔다고 할 만큼 술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순전히 술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좋은 일도 일어났고, 반대로 나쁜 일도 일어났다. 아마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많을 것 같다.

인간 생활의 모든 면을 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성경에도 당연히 술이 언급되는데,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이 노아가 술에 취한 경우이다. 창세기 921절부터 925절까지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아들 함이 보고서 노아를 뭔가로써 가리지 않고 두 형제에게 알렸으며 이로 인하여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나쁜 결과를 가져온 예이다. 그러나 시편 1045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라고 하고, 전도서 97절은 즐겁게 음식을 먹고 흥겨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이미 참하느님께서 네가 하는 일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술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포도주는 비웃는 자이고 술은 제어하기 어려우니, 그로 인해 길을 잃는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라고 경고한다.(잠언 20:1) 그 외에도 음주의 유해한 면을 강조하는 예가 더 많다.

동양으로 눈을 돌려 보면, 주선이라고 불리는 이태백을 첫손가락에 꼽지 않을 수 없다. 그의 將進酒辭’(장진주사)는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一飮三百杯’(일음삼백배), 말만 들어도 아찔하다. 중국인 특유의 과장법이라는 점을 감안하여도 감이 잘 가지 않는다. 현종이 불렀을 때에도 술에 취하여 대궐에 들어갔다고 하니 배포 또한 대단하다. 오죽하면 그가 술에 취하여 달을 건지러 장강에 뛰어들었을까? 그렇게 술을 많이, 자주 마시고도 61세까지 살았으니 그것 또한 부럽기까지 하다. 酒有聖賢(주유성현)이라고 하여 몸에 좋은 술은 성인이라고 하고 좋지 않은 술은 현인이라고 하였다거나, 청주를 성인, 백주를 현인이라고 하였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건 술을 극도로 예찬한 말이다. 아무리 나쁜 술이라 하더라도 현인 반열에 든다니 말이다.

또 술을 百藥之長(백약지장)이라고도 한다. 이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지어낸 것이 아니라, 현대 의학상으로도 타당성이 있는 말이라고 한다. 단 적당히 마실 때에 한하여서이다. 알코올은 혈액 순환을 돕고 몸의 나쁜 콜레스테롤을 줄여 주므로 한 번에 마시는 적정량만 지키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 적정량이라는 것에 대하여 알코올 20mg, 65세 이상이면 그 절반, 여자이면 또 그것의 절반이라고 한다. 알코올 20mg이라면 쉽게 말하여 술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술잔으로 두어 잔 정도이다. 순전히 술을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飯酒(반주)라면 그 정도로써 밥 한 그릇을 먹기에 족한 양일 것이다.

명심보감에 보면, 君臣朋友 非酒不義 鬪爭相和 非酒不勸(군신붕우 비주불의 투쟁상화 비주불권) 이라는 말이 있다. 군신관계나 교우관계에 있어서 술이 없으면 의리가 두터워지지 않고, 싸움을 하고서 화해함에 있어서 술이 없으면 권할 수 없다는 것이다. 酒逢知己千鍾少(주봉지기천종소) 라는 말도 있다. 친한 친구를 만나면 술 1천 잔도 적다는 것이다. 술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樽俎折衝(준조절충)이라는 말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술의 지대한 역할을 말한다. 술을 마시면서 어려운 현안을 절충하고 타개한다는 의미이다. 술을 마시면 확실히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지나치게 마셔서 감정적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정도이면 서로 간에 모난 감정이나 해묵은 감정을 녹이는 데 커다란 효과를 가져온다.

나는 일흔을 넘긴 시점에 순전히 술만을 마시는 자리는 거의 하지 않지만 반주는 이따금 즐기고 있다. 예전에 폭음을 하던 젊은 시절, 장인어른이 집에 와서 얼마간 지내면서 점심, 저녁 두 끼에 소주를 곁들이는 것을 보고서 나는 무슨 맛으로 밥과 소주를 함께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간혹 장인이 나에게도 반주를 권하면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가 전문주점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뒤 언제부터인가 식사 때 육류를 보면 슬며시 막걸리나 소주 생각이 나곤 하여 반주를 즐기기 시작하였는데, 요즈음에는 그 반주라는 것이 그렇게도 감칠맛이 나는 것인 줄 미처 몰랐다는 기분이다. 사람의 식습관이라는 것이 묘해서 전에는 전혀 입에도 못 대던 것이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면 무슨 이유에선지 또는 계기에선지 모르지만 입에 당기기 시작하여 아주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반주를 좋아하는 것을 아내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한 주일에 세 번, 아니 두 번이라도 하면 인상을 쓰거나 뭐라고 잔소리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내가 반주 한 잔 하려 들면 또 술이에요?’라고 한다. 나는 술은 무슨 술? 이건 술이 아니라니까, 반주야 반주라고 나 역시 못마땅한 어조로 대답한다. ‘반주이니까 반주도 술이라는 것이 아내의 주장이고, 나는 이니까 밥에 곁들이는 반찬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적당하게 먹는 술은 보약이라고 내가 목청을 높여 우겨도 아내는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심지어 문헌을 보여 주고 글을 보여 주어도 콧방귀만 뀐다. 술 못하는 아내에게는 반주의 ()을 이해시키기가 어렵다. 버럭 역정을 내 보기도 하고, 아예 무시하고 묵묵히 반주를 들기도 하지만 낙이 반감되는 것은 사실이다. 젊은 시절 술을 몇 병씩 마시고, 3, 4차 술집을 전전하기도 한 때와 비교하면 반주는 술을 마신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인데, 그것은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고 나이에 비례하여 잔소리를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좋게 보아서 사랑 때문이려니 하며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과음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있다. 멀쩡한 사람이 술 때문에 개망신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 중에도 술에 취하여 남의 집 안방에까지 들어갔다가 혼쭐이 난 경우도 있었고, 나도 젊은 시절에 대단지 아파트에서 이웃 동에 잘못 들어가서 나의 집 호수와 같은 집을 두드렸다가 그 집 부부를 놀라게 하고 경비원이 올라오는 등의 폐를 끼친 일이 있었다. 늙으면 술에 약해질 뿐만 아니라 그 추태가 더 보기 싫을 것 같아서 한층 조심해야 할 것이다.

술에 취하여 큰 낭패를 당하거나 불행한 일을 당한 예는 부지기수인데, 우발적 폭력 사건의 대부분은 술로 인한 것이다. 또 취기에 ()하여 호언장담하기도 하고 제 자랑이나 업적을 떠벌이다가 언론에 보도되어 높은 자리를 내놓고 급기야 구속되기도 하고, 취하여 자다가 情夫(정부)情婦(정부)의 이름을 부르다가 간통 사실을 들킨 예도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그 예가 빠질 수 없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 아이네이아스가 인간 아버지 앙키세스의 품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포도주를 마시고 대취한 앙키세스가 그만 술김에 사람들에게 아들의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번개가 날아왔다. 앙키세스는 다리에 번개를 맞고 평생 절름발이로 지냈다. 번개의 신 제우스가 왜 앙키세스에게 번개를 쳤을까? 아프로디테는 인간들과 사랑을 나누는 신들을 자주 비웃곤 했는데, 제우스는 이렇게 고상한 체하는 아프로디테가 얄미웠다. 그래서 그도 인간과 사랑에 빠진 그녀를 놀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술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이성의 선동자 커피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액체 중의 하나로 감성의 선동자 역할을 당당히 해 왔다. 따라서 인간 생활에 절대 불가결한 것인 점을 인정하고 이를 잘 다루도록, 즉 술의 노예가 아니라 술의 주인이 되도록 조심하고 노력하여야 하겠다.

7. 눈의 양면성

 

매우 좋은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인가? 인간사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 자동차, 인터넷, 컴퓨터 등등 인간의 발명품은 물론, 사람의 五感(오감) 역시 그러하다. 오감의 중요성은 贅言(췌언)을 요하지 아니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눈 내지 시각의 양면성은 두드러진다. 양날의 칼처럼 잘 쓰면 매우 유용하지만, 반대로 잘못 쓰면 급전직하 나락의 길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 시각이다. 그래서인지 눈 내지 시각에 관한 격언이 참으로 많다.

우선 성경에 의하면(창세기 3:3-6), 인간의 비극은 눈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상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첫 조상이 풍족한 가운데 인생을 구가하다가 뱀을 사주한 사탄의 계략에 걸려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눈에 있었다. 여호와 하느님은 아담에게 그 동산의 모든 실과는 임의로 실컷 먹되,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하와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아니 하와가 뱀에게 대답하는 가운데 그것을 만지지도 말라고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아담은 한술 더 떠서 그 금지령을 꼭 지킬 것을 신신당부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사탄이 그것을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한 말에 하와는 그 과일을 쳐다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로워질만하였다. 물론 그러한 삿된 생각이 든 근본 바탕은 비뚤어진 마음이겠지만 그러한 마음 바탕을 형성시킨 직접적인 발단은 시각이었다. 시각이 아예 없었다면, 또는 시력이 약했다면 그 유혹에 그처럼 쉽게 넘어갔을까 싶다. 아마 범죄하기 전의 인간의 시력은 현재의 2.0보다 훨씬 더 좋았을지 모른다. 투시안에 가까울 정도의 놀라운 시력으로 원체 아름다웠을 그 과일을 자세히 바라보니 절로 군침이 솟았을 것이다.

전에는 하느님의 경고에 따라, 아마 그 과일을 자세히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거나 이따금 일어나는 호기심에 따라 그 근처에서 대충 보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먹어도 괜찮다는 말에 따라 처음으로 그 과일의 좌우에 바짝 다가가서 이모저모로 살펴보니 더 먹음직하였을 것이다. 마치 보석상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는 값진 보석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탐욕이 자라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 하와는 더 바라보다가 결국 그것을 훔치기에 이른다.(야고보서 1:15 참조) 그렇다면 눈은 범죄의 직접적 단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의 오른쪽 눈이 당신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 눈을 뽑아 던져 버리십시오’(마태 5:29)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런데 예수가 살았던 1세기에는 TV조차 없었고, 아름답고 값비싼 물건도 그리 흔하지 않았을 터인데도 눈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할 만큼 보는 것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고하였는데, 하물며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컬러 TV는 물론 동영상, 유튜브, 인터넷, 비디오, 영화 등 시각적인 매체들이 범람하고 있고, 소유욕을 자극하는 高價의 제품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는 더욱 자극적이다. 폭력물, 음란물, 전쟁물, 공상물 등 문자 그대로 정신을 쑥 빼놓을 콘텐츠는 한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은 오히려 오늘날 더 의미 깊게 받아들여진다. 여기에서도 성경의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타당하다는 것이 또 입증된다. 진리란 시대를 초월하고 동서를 초월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다 훨씬 더 이전인 노자의 말 爲腹不爲目’(위복불위목)도 역시 진리이다. ‘배를 위할지언정 눈을 위하지 말라.’ 배를 위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눈을 위하는 것은 그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음식이라야 먹어 봐야 얼마나 먹겠는가? 과식한들 체하여 배가 아프거나 토하거나 설사하는 정도이겠지만, 눈은 만족할 줄 모른다.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고 더 값비싼 것을 원하고 더 부도덕한 것을 원한다.

또 눈의 위험성을 실감하는 것으로 우상 숭배를 들 수 있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그냥 관념상으로만 숭배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뭔가 감각적이고 특히 시각적인 것을 만들어 놓고서 그것에 절하고 빌고 그것에 예물을 갖다 바쳐야 그 신을 숭배하는 것 같이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면 정작 그 우상이 표상하는바 진짜 신은 뒷전에 놓이고 아무런 힘도 없는, 무생물에 불과한 우상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여 떵떵거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일찍이 우상 숭배를 엄금하였다. 유명한 십계명에서도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금기였다. 그래도 인간의 시각은 못 말리는 것인가? 그 뒤로도 이스라엘 백성은 수없이 우상 숭배를 거듭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우상 숭배는 성행하였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더라도 조각과 회화를 통하여 많은 신들의 모습이 새겨지고 그려졌다. 그것들은 상상할 수 없는 高價(고가)로 팔려 나가 또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가 되었다.

한편 눈은 다른 관점에서도 매우 위험하다. 이것은 눈이 지니는 시각의 위험성이 아니라, 눈 자체에서 비롯되는 위험성이다. 예컨대, 트로이의 헬렌의 눈에 뇌쇄된 파리스로 인하여 소위 트로이의 전쟁이 3차에 걸쳐 일어났다. 이를 빗대어 헬렌의 눈이 군함 1천 척을 동원하였다라고 한다. 유명한 사냥꾼 데이비 크로켓은 단지 곰을 노려보는 것만으로 곰을 쓰러뜨렸다. 이처럼 눈의 위력은 대단하다. 또 상대의 눈을 바라볼 때 그 눈은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바라봄에 따라 눈이 전달하는 의미는 너무 다양하다. 한없이 아름답고 순수하기만 한 눈이 있는가 하면, 음험하고 탐욕스럽고 삿된 눈이 있다. 떠오르는 태양의 빛같이 눈부신 눈이 있는가 하면, 썩은 동태 눈깔 같이 어두운 눈이 있다. 사람을 꼼짝달싹 못 하게 하는 강력한 탐조등 같은 눈이 있는가 하면, 호롱불만도 못하게 희미한 눈도 있다. 眼光(안광)紙背(지배)()하는 눈이 있는가 하면 희미하게 졸리는 눈도 있다. 또 웃음이 넘쳐흐르는 눈, 슬픈 눈, 희망의 눈, 憂愁(우수)의 눈, 착한 눈, 교활한 눈, 영리한 눈, 흐리멍덩한 눈, 총명한 눈, 우둔한 눈, 교태가 철철 흐르는 눈, 窈窕(요조)한 눈, 커다란 눈, 실눈 등등 눈을 묘사하는 말은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눈을 중시하는 사람은 귀를 소홀히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듣기-잃어버린 지혜라는 책에 따르면 귀가 발달한 사람들은 눈의 기능이 발달한 사람보다 덜 공격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눈이 발달한 사람보다 침착하고, 반성적이며, 인내할 줄 아는 것이다. 말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렇게 귀는 자기 자신을 낮추고 온전히 내줄 줄 안다. 즉 눈을 중시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듣는 데에 있어서 청각적인 사람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불화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말을 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더 좋다고 하니, 듣는 데 약한 시각주의자는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기도 하다.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거나, 듣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여 사고를 쳤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하였지만,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거나 보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여 사고를 친 경우는 허다하다. 단지 보고 싶은 욕구를 넘어서, 그것에서 발단하여 갖고 싶은 욕구로 발전시켜 더 큰 사고를 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래저래 눈은 인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관이지만, 한편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을 것을하고 한탄하게 만드는, 양날의 칼을 지닌 것이다.

 

8. 작은 듯 큰 즐거움

 

나는 20대 후반까지도 굴을 먹지 못하였다. 생굴은 비릿하고 조리한 것도 물컹거리는 것이 별로였다. 그런데 어떤 계기에선지 몰라도 어느 날 갑자기 생굴이 맛있어지기 시작하였다. 초장을 듬뿍 찍어서 회로 먹는 것도 좋고, 굴무침, 굴젓, 굴탕 등 어느 것이나 맛있었다. 그중에서도 초고추장을 찍어 날로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식탁에 생굴과 초고추장이 놓여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달려 나온다. 허겁지겁해지는 마음을 달래면서 소주 한 모금을 삼키고 냉큼 생굴을 초고추장에 찍어서 입안에 넣으면 이 맛에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솟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언제부터 굴을 이렇게 좋아했지?’하고 자문한다.

내가 지금도 좋아하는 음식들의 거의 모두는 어려서부터 좋아해 왔던 것인데, 굴은 30대에 들어서서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라, 그것을 먹을 때마다 그 생각이 들었다. 갓 결혼하여서 처가 식구들이 굴을 먹는 것을 보고서 저것을 무슨 맛으로 먹는가 하면서 그들이 별나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굴을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좋아진 것을 지금도 그 이유와 계기를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이따금 주위의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못 먹는다거나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렇게 말해 준다.

살다 보면 좋아하게 될 때가 올 거야. 그때까지 눈 질끈 감고 조금씩 먹어 봐. 사람이 살면서 맛있는 걸 모르고 산다면 그것도 큰 손실이고 아쉬움이라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굴의 맛을 알 때까지 꾹 참고 계속 먹은 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참고 계속 먹어 보다 보면 그때를 앞당길 수 있는 것만 은 확실할 것 같다. 그리고 인생에서 맛있는 음식의 맛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귀한 보석을 잃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각 나라의 모든 음식을 모두 먹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소한 자기 나라에서 맛있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음식이나 전래의 유명한 음식쯤은 처음에 맛이 없더라도 꾹 참고 먹어 볼 일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전라남도에서 특히 유명한 홍어회다. 썩은 냄새가 나는 것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홍어회는 정말 전라남도 음식을 대표하는 명물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입 가까이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기겁을 할 일인데, 인상을 쓰면서 몇 점 먹어 가다 보면 그 깊은 맛을 서서히 알게 된다. 혀를 쩝쩝 다시면서 조심스럽게 더 먹어가면 갈수록 감치는 맛을 느끼게 된다. , 이런 맛 때문이구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면 이제 홍어회의 팬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썩은 냄새가 지독할수록 좋다고 하는데, 초짜에게는 그것이 과하여 코에서 피가 나는 것 같지만 고수가 되면 태연하게 썩은 것(?)을 맛있게 먹는다.

인생살이에서 대부분 첫술에 배부른 것이 별로 없다. 처음부터 단박에 좋은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이치는 사람에게도 적용되고, 여러 가지 嗜好(기호)나 취미 또는 학문에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던 사람과 재미가 별로 없던 취미 등이 지긋하게 참으면서 시간이 흐르면 끌리는 점들이 많이 드러나고 느껴지기 시작한다. 반대로, 냄비처럼 빨리 끓는 것이 빨리 식는다고, 빨리 좋아지는 것은 그 지속 시간도 짧은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호감이 가지 않더라도 무조건 우직하게 계속하여 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처음부터 싹수가 노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초기에 끊어야 한다. 물론 이것을 분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것을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감각과 지혜와 경험과 식견 등을 총동원하여 판단하여야 할 만큼 중요하다. 잘못 판단하면, 아깝게 놓치거나, 반대로 쓸데없이 시간과 활력과 비용을 허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나에게 있어서 커피도 굴과 같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 요즈음에는 커피숍이 한 집 건너 생겨나 있고, 점심 후에 길을 가는 젊은이의 상당수가 점심값에 버금가는 커피를 한 손에 들고 가는 풍경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그때 그런 풍조 때문인지 나도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더욱이 커피를 먹은 날에는 잠을 잘못 자기도 하는 것 같아서 커피를 되도록 삼갔다.

그런데 커피와 수면 간에 어떤 연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인지 학문적 연구결과도 일정하지 않고, 웬만큼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변수가 커서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나의 경우에만 해도, 젊을 때 커피를 한두 잔씩 하다가 그것마저 잘 하지 않게 된 것은 어떤 날에는 커피를 한 잔만 먹어도 잠을 설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커피와 불면이 과연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특별히 맛이 좋은 것도 아닌데 그 시커먼 것을 몇천 원이나 주고 마시는 것이 좀은 낭비 같기도 하여서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잘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어느 믿을 만한 잡지에서 커피가 인체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는 평소 그 잡지가 엄청난 검증을 한 끝에 기사를 싣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또 커피를 좋아해 볼 생각도 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다하고 커피를 다시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수면과의 관계를 예의 관찰하였다. 오전에 마신 경우, 오후에 마신 경우, 하루에 몇 잔을 마시는가, 한 잔의 양 등에 따라서 수면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쭉 관찰하였다. 그 결과 다행스럽게도 내가 커피 하루 두어 잔으로는 수면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그때부터 커피를 매일 한두 잔씩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커피의 그 독특한 향기가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고 심지어 그 순간에는 행복감마저 느끼게 해 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제 쓰기만 했던 원두커피의 맛까지도 점차 느껴가기 시작하고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쓰기만 했던 커피의 맛을 즐겁게 음미하며 마시면서, 어릴 때 아버지 곁에서 한 모금 얻어 마셨던 맥주 생각이 났다. 중학교 때인가 아버지가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실 때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한 잔 마신 일이 있는데, 어찌나 썼던지 지금까지도 그 맛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때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이렇게 쓴 걸 왜 마셔요?’라고. 아버지는 크면 쓰지 않게 된다라고 대답하셨다. 정말 그 뒤 어른이 되어 맥주를 마셨을 때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나이 때문인지, 술을 이것저것 마시면서 술맛을 알게 되어서인지, 성장하면서 체질의 변화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역시 입맛은 변한다는 것이다.

어쨌건 내가 지금까지도 굴, 홍어회, 커피 그리고 맥주 등의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다면 인생에 있어서 그 얼마나 좋은 것들을 모르고 지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특히 커피에 관하여서는, 술과 더불어 인류 역사를 움직인 두 가지 액체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술이 감성의 선동자라면 커피는 이성의 선동자라고 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감성과 이성이 고루 필요하다. 그러므로 술을 좋아하는 만큼 커피도 좋아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9. 인간의 장래

 

옛날부터 인간의 종말 내지 지구의 종말에 대한 예측 또는 예언이 많이 있어 왔다. 잊을 만하면 불쑥 솟아나서 회오리바람처럼 한때 세상을 휘젓다가 사라지는 종말론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예측 또는 예언이라기보다는 현상의 진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고로 세상이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때, 즉 다시 말해서 세상이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보인다고 많은 사람이 공감할 때 종말론은 일세를 풍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론은 연역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귀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종말론의 당부를 떠나서 인간의 장래는 어떠할 것인가? 적어도 사람이라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것을 아무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관심을 별로 나타내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정말 장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을까?

우선 저명한 학자들의 몇 마디를 들어보자. 미셀 푸코는 문명과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은 죽었다라고 갈파하였다. 레비 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시작한 대로 끝날 것이다라고 하여 인간의 종말을 예측하였다. 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부정의 변증법에서 물화, 조직화, 관리화된 현대 문명은 그 자체가 과거의 신과 마술적 존재나 조금도 다름없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인간 위에 군림함으로써 신화의 세계로 퇴행하고 있다라고 역사의 퇴보를 말하였다. 또 누군가는 인간 유사 이래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며 행복지수는 1인당 GNP’와 반비례한다라는 주장까지도 대두되었다. 실제로 개별 국가의 국민들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수를 토대로 작성된 소위 행복지수는 1인당 GNP가 높은, 경제적 선진국일수록 행복지수의 순위는 하위권에 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세계 최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이 114위에 랭크된 것은 경악을 넘어서 일종의 코미디이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지향하고 있는 길이 방향부터 잘못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나라가 생긴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교육, 과학 등의 각 분야별로 개인적으로, 제도적으로 열심히 발전을 추구하여 왔다. 그러나 그러한 방향의 발전이 총체적인 지표로서 행복지수를 올리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GNP11만 달러를 넘어선 룩셈부르크라고 해서, 인류를 줄곧 괴롭혀 온 범죄, 질병, 기아, 불공평, 개인 간의 분쟁, 공해 등의 문제에서 해방되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거리가 멀고 멀다.

나라가 생긴 이후 전쟁, 지진 등 자연재해, 범죄, 질병, 의식주 문제, 평등, 공해, 인간관계상의 문제 등은 한 시라도, 일부 지역에서라도 사라진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사라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 간, 국가 간의 분쟁은 아마 더 잦아지고 더 악화될 전망이 더 커지고, 세계 경제상의 문제도 바람 잘 날 없이 불거지곤 한다. 이제 전쟁이 터졌다 하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범죄는 갈수록 흉포화, 광역화, 대규모화, 기동화, 無動機化(무동기화)되어 가고 있다. 사법제도가 더 정비되고 더 과학화되며 더 확충되어 있음에도 그러하다.

병은 어떠한가? 의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의료 인원과 시설도 크게 증가하였으며 사람들의 보건과 건강에 관한 의식이 크게 향상되었음에도 병은 한층 늘어나고 있다. 전에는 없었던 신종 병들이 생겨나고 에이즈처럼 쉽게 치료되지도 않는다. 이름도 듣도 보지도 못한 병들이 거의 해마다 생겨나서 창궐하고 이제 생겼다 하면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금세 세계적으로 만연된다. 공해는 과학과 산업의 발전에 따라 더 심해질 것이 확실하고, 의식주 문제와 평등의 문제도 해결될 전망이 없다. 나라마다 평등한 분배를 외치지만 빈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고 인권의 격차도 해결이 만만찮다.

인간관계는 또 어떠한가? 불과 50년 전만 해도 한 동네 사람들 간에 교류가 잦았고, 서로 간에 과일 하나라도 나눠 먹으려는 미풍이 잔존하였었는데, 지금은 바로 곁의 맞은편 집의 사람과도 서로 모르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모두가 자기 가족이라는 극히 좁은 울타리만 지키며 제 가족, 제 식구만 돌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마저 부모와 자식, 형제들 사이에도 유대가 예전 같지 않다. 피보다 진한 것은 없던 시대에서 그 피의 자리를 돈이 차지하려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놀랍게도 1900여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디모데 후서에서는 이렇게 알려 주고 있다. “마지막 날에 대처하기 어려운 위급한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거만하고, 신성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감사하지 않고, 충성스럽지 않고, 비정하고, 합의하려 하지 않고, 중상하고, 자제하지 않고, 사납고, 선을 사랑하지 않고, 배반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고, 교만으로 우쭐대고,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사랑하고,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은 더욱 악해져서, 잘못 인도하기도 하고 잘못 인도되기도 할 것입니다.”(3:1-5, 13)

여기에 열거된 19가지 현상을 하나하나 유심히 보면 오늘날의 상태와 똑같다. 이러한 일들이 국지적으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계속하여 일어날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성구에서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면 마지막 날이라는 점이다. 즉 오늘날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대하여 다른 성경에서는 말세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통상 말세라고 하면 지구가 종말을 맞는 날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인간의 제도로서는 더 이상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 확증된 때를 말한다. 인간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직결될 수 있는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의 부면에서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제도를 다 실시해 봤고, 각 제도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다른 제도를 섞거나 절충적 제도도 다 실시해 봤다. 이제 새로이 창안할 수 있고, 새로이 도입할 수 있는 제도는 더 이상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궁극적인 행복의 목적지는 여전히 요원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제도로써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온 인간의 환상, 즉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껍데기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제도로 이행되어야 할 때가 왔다. 인간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차원의 획기적인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결국, 인간의 장래는 오늘날, 즉 마지막 날에 이르러 인간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지 않으면 파멸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역사를 소급해 보면 어디에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하였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오늘날이 마지막 날이라는 혜안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날에 그러한 일들이 동시 복합적 세계적으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그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 점을 묵상한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 간발의 차이

 

올림픽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Citius! Altius! Fortius!)라는 구호를 표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 경쟁에 몰두하게 한다. 보는 사람이야 아이스크림을 빨며 흥미진진하게 즐기겠지만, 선수들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이다. 특히 100미터 달리기나 수영 같은 속도 경주에서는 0.1, 아니 0.01초를 가지고 다툰다. 심지어 사진 판독을 통하여 1밀리미터의 차이를 판별하여 승부를 가린다. 그렇게 하여 1등이 탄생한다.

1등은 그때부터 인생이 180도로 달라진다. 凸字型의 시상대의 중간,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서 시작되는 그는 신데렐라가 된다. 매스컴의 각광을 받는 것은 물론 도처에서 상금이나 격려금이 쏟아지고, 광고 의뢰가 쇄도한다. 일약 부와 명예와 인기를 한꺼번에 거머쥐게 되고, 나아가 미혼자라면 좋은 배우자까지 골라 가며 얻을 위치에 오르게 된다.

반면에 간발의 차이로 2등이 된 선수는 그랜드캐니언의 계곡만큼이나 큰 차이의 쓰디쓴 맛을 느끼며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를 흔히 승부세계의 냉혹함이라고 가볍게 표현하지만 당사자로서는 죽을 맛이다. 1등에게 쏟아지는 풋라이트의 100분의 1만이라도 2등에게 비춰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러한 간발의 차이는 어쩌면 주로 그 날 그 순간의 선수의 컨디션에 달려 있는 면도 다분하다. 그러나 일단 2등이 되고 보면 다음 시합에서 1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너무 낙담하여 선수 생활을 포기하거나, 정상적인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여 슬럼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쓸쓸히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막후로 사라진다.

이렇듯 1등만을 선호하는 경향은 실질적으로 1등과 큰 차이가 없는데도 2등을 무시하는 폐해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최선은 차선의 이라는 말까지도 생겨났다. 아무리 실력 위주의 사회라고는 하지만, 진짜 실력은 단 한 번의 테스트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간발의 차이로 희비가 크게 갈라지는 일은 문제가 있어도 매우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유사한 일은 시험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어느 해 사법시험에서의 일이다. 평균 60점 이상을 얻어야 합격하는 컷라인제가 시행되고 있을 때인데 어떤 두 수험생은 59.9859.92를 얻어 낙방하였다. 7과목의 평균 점수이니까 총점으로 보아도 0.6을 넘지 않는다. 어느 한 과목에서 단지 1점만 더 받았더라면 합격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한 채점 위원의 당시 기분에 다분히 좌우되는 것이다. 어느 글에 의하면 판결이나 채점이 식사 직후나 휴식 직후에 후하게 된다고 하였다. 한 채점 위원이 그 시간에 채점하였더라면 결과가 판이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한 채점 위원이 그때 어떤 사정으로 기분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더한 문제는 그 낙방자들 중 59.98을 얻은 사람은 그다음의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59.92로 불합격한 사람은 그다음 이후의 계속되는 시험에 줄곧 응시하였으나 성적은 오히려 내리막길이었고 끝내 사법시험 응시를 포기하였다. 경쟁사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치부하고 말 것인가? 이런 일은 시험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러 분야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곧 인생이라며 바람에 날려 버리고 말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말 것인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역시 사법시험에서 어느 수험생은 설문에 대한 답 3가지 항목을 일사천리로 써 내려가고 있다가 갑자기 그중 한 항목이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필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다가 감독관에게 새로운 답안지를 요청하였다. 틀린 답안을 작성하면 감점이 될 것을 우려하여 그것을 흔적도 없게 하려면 새 답안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감독관은 다가와서 물끄러미 그가 쓴 답안을 내려다보더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대로 하지라고 넌지시 말하였다. 수험생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지금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그때라도 틀렸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굳이 새 답안지를 요청하여 부리나케 새 답안을 썼다.

그는 마치는 벨 소리와 동시에 답안 작성을 끝내고 상기된 얼굴로 교실을 나섰다. 친구들에게 하마터면 감점을 당할 뻔했다면서 다행스럽다는 어조로 말하였다. 그러자 두어 친구가 의아해하면서 그 지운 답안이 정답일 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친구들의 말이 맞았다. 정답인 답안을 지운 것이었다.

뒤에 보니 평균 점수가 0.7이 모자라서 낙방한 것이었다. 총점으로 보면 5점가량이 모자랐는데, 지운 항목을 지우지 않았다면 넉넉하게 합격하였을 것이었다. 다행히 그다음 시험에서 그는 합격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우선 합격 기수가 1회 늦어지는 것은 평생 따라다니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동기생들도 전혀 다르며, 그 후의 발령지나 만나는 사람이 모두 달랐다. 심지어 그것은 결혼까지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시험 시의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른 그 잡념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사람들이 쉽게 입에 올리는 운명의 장난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저 순전한 우연인가? 순전한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뒤에 연관되는 일들이 너무 중요한 것이 많아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다. 보다 일상적이고 자질구레한 일들도 평생 동안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반 편성을 할 때 어느 반에 편성되고, 그 반에서도 누구와 짝이 되는가는 평생 동안 지대한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또 그다음 해에 새로운 반 편성이 되고 새 짝이 생기며, 학기 중에도 짝을 바꾸었을 때 그 짝이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때도 많이 있다. 이를 두고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로 운명론적인 견해를 표하고 있지만, 운명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필연적 우연이란 말이 적당할 것 같다.

아내와의 만남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많은 우연들이 쌓이고 쌓여서, 만나고 교제하고 우여곡절을 극복하여, 결혼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엿보인다. 그래서 손으로 물을 움켜쥐는 것 같이 딱 잡히지는 않지만 어떤 필연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어, 여기에도 역시 필연적 우연이란 말을 붙여 본다.

 

11. 소녀들의 喫煙(끽연)

 

요즘 節煙(절연)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담뱃값을 대폭 인상하여 애연가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가격 인상이 담배를 끊게 하거나 줄이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연구 결과가 없다. 참고로 소주의 경우 가격 인상에 따른 소비의 감소가 매우 미미하다고 한다. 즉 가격탄력율이 0.06이라고 하여 거의 영향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소주는 서민의 술이요, 애환을 함께 나누는 국민 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몸에 해로운 면이 많은 만큼이나 서민의 생활에 도움도 많이 되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반하여 담배는 유익한 것이라고는 한두 가지에 불과하지만 해로운 점은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끽연 인구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여성, 그중에서도 소녀나 미혼 여성의 끽연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수년 전만 해도 화장실에서나 컴컴한 뒷골목에서 기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젊은 여자들이 뒤돌아서서 담배를 피웠었는데, 이제는 대담하게(?) 대놓고 길가에서 의젓하게 피워댄다. 이것도 발전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인가? 남녀평등이라는 것인가? 예전에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여자가하는 말이 따라붙었다. 그런 투의 말은 거의 언제나 여성 비하의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라면 괜찮은데 여자가 감히 그런 행동을 하다니 무례하고 당돌하며 불량하다는 등의 나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길을 가거나 마트 따위의 편의점 앞에 놓여 있는 탁자에 앉아 있을 때, 남학생들이나 청년들이 담배를 피우며 가거나 편의점 옆 탁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나처럼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는(나도 오래전에는 담배를 피웠었다) 볼썽사나운데, 하물며 여자가 그럴 때는 속이 뒤틀렸다. 언젠가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편의점 앞의 옆 탁자에 앉더니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빼 물더니 라이터를 켰다. 동시에 나의 마음속에도 불이 켜졌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아무렇게나 뿜었다. 정면으로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스듬히 옆의 방향으로 뿜어진 연기는 나에게도 날아왔고 대번에 냄새가 났다. 담뱃불이 반짝일 때마다 나의 마음의 불이 켜졌고 그 연기만큼이나 나의 속도 탔다. 나는 가만히 못 본 체할 것인가, 한 마디 할 것인가 생각하였다. 그대로 참으면 별일은 없을 것이고 내가 연기만 조금 마실 뿐인데, 그러지 않고 한 마디 하면 상대의 반응에 따라 일이 어떻게 진전될지 알 수가 없다. 경우에 따라 좀 시끄럽게 될 수도 있다. 일흔 줄을 바라보는 소위 어른으로서 그냥 묵과하는 것은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그럴 게 아니라 나 하나만 참자. 참는 것은 시끄러워질 것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행동이지 않을까?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상념이 뒤엉키고 있었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잘 쉬고 있는데 갑자기 웬 고민이람?

나는 우선 떠오르는 대로 그녀가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것의 이유와 타당성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직감적으로는 그 어린 것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못 됐다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논리를 정리하자니 마땅치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한참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무례한 짓이라 금기시되어 왔다. 특히 동석한 자리에서는 연하자가 담배를 굳이 피우려면 자리를 피하여 밖에 나가서 피우고 들어와야 했다. 조금 편한 자리에서는 연장자에게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느냐라고 질문 아닌 양해를 구한 다음 피운다. 서열 관계가 엄한 자리에서는 아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 동석한 경우가 아니고 다른 자리에서는 그런 예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 경우에도 나이 차이가 많은 경우에는 연하자 측에서 스스로 조금 몸을 사리는 편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관습이 지금은 거의 무너져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동석자나 동행자의 경우 나이 차이가 많을 때는 담배를 피우는 연하자나 그것을 보는 연장자가 쌍방 모두 좀은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어쨌건 1차적으로는 이상과 같은 관습을 근거로 들자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대방이 연하자라고 해서 연장자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따지고 들면 뭣이라고 대답하여야 하는가? 五倫 또는 五常을 근거로 들기에는 세태가 너무 현대화되어 있다. 연장자니까 공경하여야 한다고 하면 서양 문물의 영향을 듬뿍 받은 젊은 세대에게 코웃음을 당할 만큼 시대가 바뀌어 있다. ‘에덴의 동쪽에서처럼 서양 영화에서 동생이 형을 때리는 장면을 보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연장자 앞에서 연하자가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담배를 피우는 폼이 건방져 보이기 때문일까? 손가락에 담배를 끼워 갖고 있는 것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아 고개를 쳐들고서 허공을 향하여 연기를 후- 내뿜는 것이 연장자 방향으로가 아니더라도 건방져 보이는가? 그 장면을 아무리 건방지게 생각하려고 해도 별로 건방져 보이지는 않는다. 어릴 때 간혹 들은 어른들의 말로 손가락에 담배를 딱 끼워 갖고 건방지게라는 말은 그때도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다. 어릴 때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는 것이 건방진 것이구나 하고 그냥 생각했었지만, 지금 와서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렇게 건방지게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그새 나도 관념이 그만큼 완화된 것인가? 담배 연기를 내뿜는 것도 연장자 쪽이 아니라면 역시 별로 건방질 것이 없다. 다만 요즘에는 연기의 유독성이 많이 강조되고 있는 때라 嫌煙權(혐연권)을 내세울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이것도 금연장소가 아닌 한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음에,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왜 더 나쁜가? 연구 결과에 의하면 가임여성은 담배가 태아에게 매우 해롭다는 것인데, 이것도 개인의 문제일 뿐, 옆의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혀 남이라면 그가 몸에 해로운 음식을 먹더라도 다른 사람이 간섭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건 빨건 먹건 제3자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서 젊은 여자가, 심지어 소녀가 피우는 것은 왜 더욱 나쁜가? 이것은 중고 학생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이유와 흡사할 것이다. 담배는 인체에 해롭기 때문에 미성년자에게는 아직도 교육이 더 필요한 시기이므로 그러한 차원에서 부모나 선생님이 간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건강에 좋은 생활 습관을 키우라는 것이다. 일단 어른이 되면 건강 관리는 개인의 몫이 된다. 그때까지라도 학교에서는 좋은 습관을 배양하도록 금연을 강요하는 것이고, 이것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미성년 소녀의 경우에는 학교 안이 아니더라도 어른으로서 제3자라도 금연을 권고하거나 충고할 수는 있을 것이다. 미성년자가 길가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다면 이를 목격한 어른이 이를 방관하여서는 안 되는 이치와 같다. 그리고 담배는 어른이 피우는 것이라 청소년 시절부터 담배를 피우면 겉 자란 아이로 어른 흉내를 냄으로써 불량해지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성년인 젊은 여자가 노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이다. 그 여자가 노인의 권고에도 말을 듣지 않거나 심지어 대든다면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전개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다만 혐연권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 아닌가 생각된다. ‘당신이 담배를 즐길 권리가 있듯이, 나도 담배 연기를 맡지 않을 권리가 있다. 당신은 담배를 단지 즐기는 한순간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나는 담배 연기를 맡아서 당장에 거슬림은 물론 혹시 간접흡연으로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좋아하고 다른 한 사람이 싫어하는데 둘 중 하나만 선택하여야 한다면 좋아하는 측이 양보하여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건강에도 해롭다면 그쪽 편을 드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또 굳이 담배를 피우려면 당신이 다른 데 가서 피우든가, 내가 자리를 피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그러면 연장자보다는 연하자인 당신이 양보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 정도의 논리이다. 어떤가? 설득력이 있는가?

나는 순간적으로 스치는 이상의 생각들을 무기로 삼아 그 여자에게 젊잖게, 의식적으로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한 마디 하였다. ‘나는 담배 연기를 몹시 싫어해요. 다른 데 가서 피우면 어때요?’

그러자 그녀는 나를 순간 노려보듯 보더니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비벼 끄고, 발딱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이렇게 때 아닌 전투에서 내가 판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뒷맛은 쉬 개운치 않았다.

 

12. affirmation, visualization

 

요즈음 서점에 쏟아지는 책들을 보면 처세에 관한 것이 대종을 이루는 것 같다. 그것도 철학적으로 행복의 본질을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심신에 더 건강하게 그리고 즐겁게 사는 것인가 하는 가볍고 요령에 치우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전혀 무시할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지친 삶을 헤쳐 나가는 데 꽤 도움이 되는 것도 상당수 있었다. 커피 한 잔 같이 간단한 말 한 마디라도 실제로 적용할 때 그런대로 힘을 주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을 요약하면 affirmationvisualization이다. 표현은 달리하고 장황한 설명과 예를 들고 있지만 결국 그 두 단어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affirmation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라거나 내가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루에 20회 자기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visualization네가 그것을 머리에 그려 보면 그것을 이룰 수 있다라는 것으로서 소위 image training을 하라는 것이다.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먼저 두려움의 열 가지 얼굴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정적인 생각의 소용돌이로부터 빠져나와라. 그리고 우리 몸이 외부의 현실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의 이미지와 상상에도 반응한다는 인간의 기능 원칙을 사용하라. 당신이 특정 행동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의 근육은 이와 상응하여 자극된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구체적이며 융통성 있는 상상은 당신이 힘들 때 강한 동기를 부여하고, 실수와 약점이 아니라 가능성에 시선을 맞추도록 한다. 상상 속에서 두려움을 유발하는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이를 통해 당신의 기대 불안감에 더 잘 대처하는 법을 배운다. 눈을 감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정신적으로 심취하

. 최고 성능의 헤드폰을 끼고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거나 소파에 누워 있다고 상상하라. 불안을 만드는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전문가들은 이를 인지 재구성Cognitive Restructuring’이라고 부른다)은 성공적인 불안 극복의 핵심적 요소이다.

다음에, ‘유쾌하게 힘을 얻는 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집중 받는 것은 커지고 강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부정적인 것이 힘을 받아 모든 일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불평불만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라. 생각이 머무는 곳은 어디에나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부정적인 사고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라. “지금 원하는 상황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상상하라.” 초보자인 경우에는 30일 동안 매일 동일한 목표에 집중하면서 시각화 연습을 해야 한다.

행복론에서는 말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마구 바둥거리기 때문에 생긴다. 더욱 나쁜 것은 함부로 몸을 움직임으로써 말을 겁먹게 하는 것이다. 종아리에 경련이 일어나면 비명을 지르게 돼 있다. 그러나 발바닥을 펴고 바닥을 힘껏 밟으면 금방 낫는다. 벌레나 숯가루가 눈에 들어갔을 때 눈을 비비면 두세 시간은 고생하지만, 가만히 코끝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눈물이 나와 낫게 된다. 태평한 체하려는 사람은 어깨를 으쓱하는 법을 알고 있다. 잘 보면 이 동작은 결국 허파에 바람을 넣어주는 동작이다. 결국, 심장을 진정시켜주는 동작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될 수 있는 한 만족스러운 기분을 유지하는 일이다. 상상력은 이 인간 세계의 여왕이다. 거의 모든 고장은 바로 나의 관심과 걱정이 만들어낸 것이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에서는 디팩 초프라의 말 소망에서 의지가 생겨나며, 의지는 당신에게 새로운 운명을 열어줄 것이다.”를 인용하고 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마크 앨런이 말하는 백만장자 되기 4단계 속성 코스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라. 둘째, 어떻게든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그 일에 매진하다 보면 누구보다 더 그 일을 잘하게 된다. 셋째,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라. 마지막으로, 늘 계획하고 실천하라. 핵심은 성공한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다음에, ‘슈퍼리치의 습관에 있는 글을 인용해 보자.

골프를 잘 치려면 내가 치려는 방향으로 마음속에서 일직선을 죽 긋는 거야. 그리고 내가 치는 공은 그리로 갈 거라고 아주 단단히 믿어. 그러고서 치면 십중팔구는 그 마음속의 길을 따라 공이 날아가지.” “매일 리마인드한 꿈만 이루어지더군요. 단언컨대 그 꿈 없이는 하루도 못 살겠다 싶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져요.” 머릿속에서 자신의 경기나 공연을 미리 생각해보는 것,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박수를 받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자신감을 가져다준다. 에픽테투스의 말도 귀담을 만하다.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긍정 습관에서는 숙제하듯 살지 말고 축제하듯 살자고 하면서 음악과 음주를 예찬한다. 혼자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노래를 부를 것을 권한다. 유명한 테너 호세 카레라스는 심각한 질병을 앓는 사람에게도 음악은 완벽한 안식처가 된다고 하였다. 또 보들레르는 근로는 나날을 풍요롭게 하고, 술은 일요일을 행복하게 한다고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이 장수의 비결로 알려져 있어 노인의 우유라고 불린다. 사실 술은 좋은 친구, 좋은 안주, 좋은 이야기의 3박자가 어우러질 때 금세 더 건강해지는 것 같다.

뜨거워야 움직이고 미쳐야 내 것이 된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생각만 하는 사람의 문제는 바로 그 생각이다라고 말하였고, 헤겔은 부정 위에 긍정이 있다면, 그 위에는 열정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즉 이것저것 생각만 하는 데 묶여 있지 말고 열정, 즉 강렬한 긍정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 단순함이 필요하다. 부정적인 여러 가지 생각은 힘만 뺄 뿐이다. ‘단순함이 당신을 최고의 자리에 서게 해 준다는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의 말이다. 여우는 많은 작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도 있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의 저자인 짐 콜린스가 이 두 가지 유형을 기업의 전략으로 승화시켜 해석한 바도 있다.

이제 리더의 자격에서 몇 가지 인용해 보자.

무조건 긍정적으로 봐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하라. 그러면 상대방도 그렇게 할 것이다. 또한, 사람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대하라. 그러면 상대방은 그렇게 될 것이다.” 괴테의 말이다. “걱정은 내일의 슬픔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힘을 없앨 뿐이다.” 또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을 믿으면 다른 사람을 확신시킬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만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받아들이면 세상 전체가 자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어떤 글에서는 긍정적 태도의 중요성을 이런 식으로 강조한다. 일단 26자의 알파벳 순서대로 숫자를 붙이자고 했다. A1을 붙여주고 B2, C3, D4... 이런 식으로 가면 Z26이 된다. Hard work98점이었다. Knowledge96점이다. luck47점이었다. money72점이었다. leadership89점이었다. “그럼 100점짜리는 뭘까요?” “마음먹기(attitude)”입니다. 즉 긍정적 태도라는 것이다.

또 동영상 ‘secret’의 요점은 이러하다. 첫째 끌어당김의 법칙을 내세운다. ‘당신의 생각과 감정이 당신의 인생을 창조한다 구하라, 믿으라, 받으라. 알라딘의 램프에서 나타나는 지니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붓다도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의 생각의 결과다라고 하였다. 둘째 감사하기이다. 감사하기가 생활화, 습관화, 나아가서 체질화되면 언제나 좋은 것을 끌어당긴다. 고마움의 돌멩이라는 것이 있는데, 매일 호주머니에 넣어 둔 돌을 만질 때마다 고마운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사람의 요청에 개울가에서 주운 돌멩이 3개를 보내 주었는데 3개월 후에 사경을 헤매던 자기 아들이 나았다고 회답하였다. 단지 생각에만 그치지 말고 그 바라는 바의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 행복감, 만족감 등을 실제로 느껴라. 영감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믿고 행하라. 10만 불 지폐를 그려 천장에 붙여 놓고 수시로 10만 달러짜리 인생을 상상하라. 한 달쯤 뒤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빚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청산한 후의 풍요로운 생활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다. 셋째 자신을 존중하라, 그러면 남이 자신을 존중한다. 남의 장점만 보라, 그러면 남도 자신의 장점만 본다. 당신의 기쁨과 행복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불치병에 걸린 여자가 계속 자신이 나았다고 자기암시를 하고, 나은 거처럼 행동한 결과 완치되었다. 이때 가장 부정적인 요소는 스트레스이다. 남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하면 병은 더 악화되므로, 대신 병이 완전히 나았다거나, 자신이 완전무결하게 건강하다고 생각하라. 뭔가에 저항하면 그것은 더 강해지고 더 악화된다. 고로 반대 운동은 역효과이므로 대신 잘된 장면을 계속 상상하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에 집중하라. 생각하는 대로 된다. 에너지는 관심을 따라 움직인다. 우주는 에너지다. 우리 몸도 소멸하지 않는 에너지로 되어 있어 계속 존재할 수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연결된 하나의 에너지장이다. 인간 개개인이 창조자이다, 창조할 수 있는 에너지 덩어리다. 기분이 좋아지는 일은 기쁜 일을 더 당긴다. 인간은 잠재력의 5%만 사용한다. 왜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그것보다 된 경우를 수시로 상상하고 즐겨라.

그렇다. 이상의 여러 문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마음으로 기름칠을 해야 한다. 리더의 자격은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감만큼 젊고, 회의만큼 늙는다. “우리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부정적인 것이 힘을 받아 모든 일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불평불만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라. 생각이 머무는 곳은 어디에나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디팩 초프라의 말이다. “부정적인 사고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라. 지금 원하는 상황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상상하라.” 또 데카르트는 우유부단이 최대의 악이라고 하였다. 비관주의는 기분의 산물이고 낙관주의는 의지의 산물이다. 승자는 어떤 문제에서도 해답을 찾아내고, 패자는 어떤 해답에서도 문제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미 일어난, 또 일어날 듯한 좋지 않은 일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응용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는 모든 일을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여라. 왜냐하면, 일단 일어나 버린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일은 불행을 이겨내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중국의 세계적인 석학 임어당은 참다운 마음의 평화는 최악의 사태를 감수하는 데서 얻어지며, 이는 심리학적으로 에너지의 해방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물론 일어날 것 같은 재앙을 예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되, 한편으로는 그 예방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을 때 최악의 경우 어떤 일까지 일어나더라도 사실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는 마음가짐이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칸트의 유명한 실천명제로서 하여야 한다면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맺는다.

 

13. 음악 예찬

 

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한 몫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음악이 먼저 알려져서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좋은 음악은 영화의 작품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상품성으로도 큰 효과를 가져 온다. 좋은 음악으로 유명해진 영화에 있어서, 영화를 보다가 문득 그 음악이 없었다면 영화의 효과나 재미가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그 작품성이 훨씬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음악은 영화에 있어서 단순한 양념 정도가 아니다.

그러나 음악은 영화에서 나와서도 독자적인 생명력을 얼마든지 유지한다. 영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음악은 요즈음에 와서는 간단한 마련만으로 원하는 음악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게 됨으로써 더욱 음악 자체만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스마트폰이니, 태블릿이니, 아이팟이니 해서 수천 곡의 음악을 저장해서 아무 때 아무 데서나 들을 수 있는 세상이고 보니 음악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높이 여겨진다.

만약 음악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상상하기조차 싫은 상상이지만, 아마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겨울 들판에 눈보라를 맞으면서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창조주께 감사드려야 할 일이 많고 많지만, 나로서는 우선 음악을 주시고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청각을 주신 점을 꼽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음악 전문가도 아니고, 악기 하나 다룰 줄 아는 것도 아니다. 이따금 혼자서 아무 노래나 부르는 정도일 뿐이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기억하건대, 국민학교 저학년 때 나는 길을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방랑 김삿갓이나 앵두나무 처녀같은 유행가를 깨금 뛰면서 불렀다. ‘방랑 김삿갓은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던 신익희가 갑자기 서거하였을 때 한창 유행하였는데, 가사를 그 일에 맞춰 개사한 것이 유행하였다. 나는 어디에선가 그것을 주워듣고서 아무런 뜻도 모르면서 금방 배워 갖고 신나게 부르고 다녔다. 아버지가 그 가사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나는 겸연쩍게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불렀다.

그때부터 중학교 때까지는 대중가요를 즐겨 들었고 또 불렀다. 고교 시절에는 팝송을 듣기 시작하였고,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클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3월에 대학 강당에서 음악 감상회가 있었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곡이 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였다. 넓은 강당의 큰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왈츠는 계절에 맞추어 내 마음도 생동하게 하였다. 그 후 길을 가다가 어쩌다 음반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듣곤 하였는데 항상 여운이 남았다. 그러다가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마침 그 집에 전축이 있었고 클래식 음반이 몇 장 있었다. 나는 시간만 나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었다. ‘운명이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는 말을 그 전에 들은 적이 있어서 그 유명한 첫 선율을 들을 때마다 나의 운명을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이듬해 캠퍼스에 음반을 팔러 온 행상이 당시로 말하면 유성기라는 것을 틀어 놓고 학생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내가 지나가면서 그 선율이 너무 좋아 길을 멈추었다. 곡목이 베토벤의 로맨스 2F장조라고 하였다. 나는 매우 가난하였지만 큰마음을 먹고 음반 4장짜리 한 질을 샀다. 그 후 낡아빠진 유성기도 구하여 그 음반을 듣고 또 듣고,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시공부를 할 때에도 클래식 방송을 하는 시간에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공부하였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습관이 되어 있다.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서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고 묻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전혀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대답한다. 공부란 대개 지겨움을 수반하는 것이라, 음악에 귀 기울이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따금 좋은 선율을 들으면 그 지겨움이 반감되는 기분이었다. 멋진 음악이 흐르면 나는 공부하면서도 나름대로 지휘를 하는 시늉을 하고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나는 성경 공부를 할 때나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줄 때가 아니면 가능한 한 음악을 틀어 놓고서 일을 한다.

이따금 흘러간 가요도 즐겨 듣는데, 그것은 후딱 흘러간 옛날을 생각하게 하면서 애잔함과 추억의 아련함을 안겨 준다. 오래전의 노래가 여전히 듣기에 좋은 것이라면 일종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가요라고 해서 혹자는 얕잡아 보기도 하지만, 대중가요에는 서민이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애환의 표현이 들어 있어서 히트송들은 언제나 들어도 좋다. 국악은 주로 FM 라디오를 통하여 듣는다. 한국인이라면 한국 특유의 정서가 녹아 있는 국악은 국악대로의 멋이 넘쳐흘러서 쉽게 좋아진다. 특히 한국적 정서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하는 이 서려 있는 가락은 심금을 울린다. 팝송도 가끔 듣는데, 역시 내가 2, 30대에 즐겨 듣던 곡을 듣는다. 주로 미국에서 생긴 것인데도 우리의 정서에 잘 어필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의 바탕은 다 같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은 클래식에서 더욱 두드러진데, 수백 년 전의 서양 음악이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여전히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을 보면 역시 음악은 만국의 언어이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것인가 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현존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음악이다라고 말하였듯이 음악에는 민족과 국경과 세월이라는 장벽이 없다. 또한, 마틴 루터는 음악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사한 아름답고 자유로운 예술이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귀가 단지 소리를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음의 진동을 그대로 뇌로 전달하여 선율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람 외 어느 동물이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만 주어진 대단한 선물이다. 정말 하느님에게 특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또 헤르만 헤세는 시를 짓는 것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음악은 곧 이기도 하다. 좋은 음악은 좋은 시를 감상하는 것과 같다.

물론 시가 없어도 살듯이 음악이 없어도 산다. 그러나 현재 그것들을 비교적 풍요롭게 누리고 있어서 그 가치를 잘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기의 경우에 그러하듯이 음악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가치를 크게 느낄 것이다. 공기가 없는 만큼 즉각적으로 나쁜 결과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이 없다면 마치 식물이 볕과 물과 공기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여 시들시들하다가 죽어 버리는 것처럼 삶의 생기가 서서히 빠져나갈 것이다. 물론 그 생기를 다른 것으로 채우는 방법도 있겠지만, 큰돈이나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음악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음악은 정신건강에도 유익하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이다. 특히 불안증에 시달릴 때 눈을 감고 좋아하는 음악에 정신적으로 심취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최고 성능의 헤드폰을 끼고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거나 소파에 누워 있다고 상상하면서 모차르트 음악 같은 것을 들으면 좋다. 그리고 불안을 만드는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이른바 인지 재구성(Cognitive Restructuring)도 성공적인 불안 극복의 핵심적 요소인데 음악이 이에 기여한다. 또 사람의 뇌파 중 주파수가 7 내지 14인 것을 알파(Alpha)파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의 뇌파가 정상적인 주파수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상태다. 우리가 잠들기 직전이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연구자들은 뇌파가 알파파 수준에 있을 때 우리 몸에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알파파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에는 명상이나 영창(詠唱), 기도, 감미로운 음악 감상, 자율 훈련법, 바이오피드백 등을 이용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음악이 큰 작용을 한다.

또 정신은 육체에 긴밀하게 작용하므로,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만큼이나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언짢은 일이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만사를 제쳐놓고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한결 나아지고 대범해진다. 나는 지금까지 건강을 비교적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는 편인데, 상당한 정도 음악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듯 음악은 단지 오락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생활이 아니라 생존을 위하여 절대 필수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국악 한 가락에 이따금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이 글을 쓴다.

 

14. 등산 예찬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팬이나 마니아가 된 사람들 중에는 애초 그것을 매우 싫어하거나, 체질적으로 또는 성향을 보아서 그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꽤 많다. 나의 경우 등산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젊을 때 친구와 함께 여러 산을 좀 다녀 볼 요량으로 장비 일습을 갖추고 축척 500분의 1 산악지도까지 구입하여 몇 군데 산을 다녔었는데, 열 군데도 가지 못하여 어떻게 가지 않게 되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쨌든 흐지부지하게 중도폐가 되고 말았었다. 그러고 나서는 등산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는 인식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어서 20여 년을 산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50대 중반에 구안와사를 앓고, 무언가 건강을 보살피고 증진시키는 운동 같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딱히 등산이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우연히 등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름 휴가 끝에 특별히 갈 만한 데가 없어서 가까운 산에나 가 보자고 하여 관악산에 간 것을 계기로 하여, 아내가 남대문시장에 간 김에 꽤 값이 나가는 등산복 일체를 사 갖고 왔다. 그러니 옷이 아까워서도 산에 가야 했다. 나는 원래 산 것은 반드시 사용하는 천성이 있다. 책을 사면 꼭 다 읽어야 했고, 음식은 다 먹어야 했으며, 옷은 꼭 닳을 때까지 입어야 했다.

관악산을 갔으니, 이제 청계산을 가야 했고, 이어서 도봉산과 북한산에 가야 했다. 그렇게 하여 이 산 저 산을 다니게 되었다. 같은 산이라도 여러 코스가 있어서 갈 때마다 다른 코스를 택하는 것도 재미였다. 그러다 같은 산만 여러 번 다니는 것이 덜 재미있어서 전국의 유명 등산 지도 200’이라는 책을 사서 우선 국립공원을 다 가 보기로 하였다. 등산로도 잘 되어 있고 山紫水明(산자수명)한 곳이라 경치 구경도 할 겸 선택한 것이다. 초기에는 힘들지만 그런 기대가 있어서 참고 걸을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경기도에 있는 산만 다 가 보기로 하였다.

서울을 벗어난 산은 접근성이 쉽지 않아서 산악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인터넷에서 산악회를 찾으면 그 숫자는 부지기수였다. 산악회를 따라가는 산행은 교통이 편리하고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먼 산을 개인적으로 가려면 우선 지도나 교통편을 자신이 샅샅이 조사를 하여야 하고, 그래도 교통편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하산한 뒤 버스가 끊겨서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간 때도 있었다. 덕유산에서 하산하여 구천동에서 막차를 타고 무주에 갔더니 서울행 막차 버스가 떠나고 없었다. 할 수 없이 대전 고속버스터미널까지 택시를 탔다. 5만 원이 나왔다.

경기도에 있는 산만 타고 말자는 생각을 처음에 했지만, 점점 더 욕심이 생겼다. 더 먼 지역의 산이라도 여러 곳의 산악회가 행선지를 다양하게 하고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갈 때마다 다른 산을 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근 10년 만에 위 책의 200개 산 중에 남해안 부근에 있는 산들만 제외하고는 거의 다 가 본 셈이 되었다. 170개는 될 것이다. 그곳은 너무 멀어서 왕복 승차 시간만 해도 근 10시간이나 되어서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 책에 나와 있지 않은 곳도 갔고, 서울 시내 산은 각각 수십 회씩 갔다.

등산이 건강에 좋은 것은 여기서 구태여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지만 꼭 한 가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산소를 많이 마실 수 있는 점이다. 지상의 산소와 질소의 비율은 평균 2178이고, 설악산 대청봉은 산소가 23이고 서울 서초동은 19쯤 된다고 한다. 대청봉과 서초동과의 산소 비율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대청봉에 갈 때는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수없이 많은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하므로 그 맑고 많은 산소를 얼마나 많이 흡수하겠는가? 산소통에 코를 갖다 대고 일부러 숨을 가쁘게 쉬면서 호흡해 보라. 과연 몇 분간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설악산 산행을 하면 저절로 호흡을 많이 하게 되니, 한 번 갔다 오면 그때 마신 산소로 모르긴 해도 아마 한 달쯤은 너끈하게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증거로 설악산이나 지리산을 무박 산행을 하면 보통 새벽 서너 시경에 등산을 시작하여 열 서너 시간을 걷는데도 이튿날 피곤한 줄 모른다. 무박 산행이면 사실 잠을 거의 못 잔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몸으로 열 서너 시간을 산행하고 그 다음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일하여도 피곤한 줄 몰라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매우 궁금하였었는데, 알고 보니 산소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나무 등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와 계곡에서 나오는 음이온도 건강에 그럴 수 없이 좋다 하니 一石(일석) ()인가?

그뿐인가? 나만의 특별한 奇行이 있는데, 나는 산악회 버스를 타고 왕복하는 중에 잠을 자지 않는다. 자지 않는다기보다는 잠이 오지 않는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을 산행하고 귀경하는 버스 안에서 많아야 20분가량 살풋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면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그러면 나는 스마트폰에 입력해 둔 많은 읽을거리들을 읽는다. 등산 중에는 여러 가지를 암기하거나 詩想(시상)을 떠올리거나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一石 인가?

그뿐만 아니다. 나만의 특별히 유쾌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소개하자면 이렇다. 아내는 워낙 염려증이 심한 데다 나의 안전에 지나치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그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이다. 그래서 아내가 등산에 따라나서는 경우가 많은데, 한 번은 전남 광주에 있는 무등산을 산행할 때 아내는 너무 멀다면서 따라가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나는 아내의 前歷(전력)에 비추어 또 출발 직전에 번의할 가능성이 있어서 몇 번이고 아내로부터 다짐을 받았다. 내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출발할 때, 아내도 잠이 깨었으나 일어나지 않고 잘 다녀오라고만 말하였다.

정오를 좀 넘었을까? 무등산 서석대 앞에 이르렀을 무렵 전화가 왔는데 아내였다. 자기도 무등산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을 되물었어도 같은 대답이었는데, 내가 떠난 직후 마음이 바뀌어 곧 뒤따라 나섰다는 것이었다. 평소 산악회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갔더니 딱 한 대만 정차하고 있었는데, 그 버스가 희한하게도 무등산행이었다. 자리가 있는지를 물었더니, 만원이었는데 방금 한 사람이 취소하여서 한 자리가 비어 있다는 대답이었다. 아내는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인도라고 생각하고 그 버스를 탔다. 그런데 그 버스의 산악회는 나의 산악회 버스가 도착한 곳과는 반대 방향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내가 서석대 앞에 있을 무렵 아내는 정상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상을 밟고 쉬지도 못한 채 곧장 내려갔다. 저만치에서 아내가 뛰다시피 오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만인데 반가웠다. 그러나 아내는 그 버스에 짐을 두고 왔기 때문에 다시 그 버스로 돌아가야 했다. 불과 5분간 만나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나서 다시 헤어져야 했다.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다가 헤어지는 것과 같았다. 헤어진 다음 그날 밤 내가 귀가한 뒤 한 시간쯤 지나서 아내가 귀가하였다. 이것을 나는 무등산 상봉이라고 명명하였다. 산을 좋아한 덕분에 이런 별난 일도 경험하였고, 그 후 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이 사건은 종종 입에 오르내렸다.

전국 도처에 있는 산을 다니면서 한국이 참으로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먼 데 벽촌까지도 도로망이 잘 되어 있고, 편의시설들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四通八達(사통팔달) 길은 전국 어디든지 뚫려 있어서 당일 코스로 어디든 갔다 올 수 있었다. 그만큼 먹고 살 만하게 되었고, 따라서 오래 살기 위하여 건강을 지킬 셈으로 등산을 하는 사람이 무척 많아졌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각종 취미활동 중에 등산을 선호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맞는 말일 것이다.

 

15. 암기 습관

 

세종대왕은 百讀百習(백독백습)을 습관화하였다고 한다. 18세기 실학자 안정복은 글은 만 번쯤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중종 때의 문인인 윤결은 맹자를 1000,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은 논어를 2000, 조선 중기의 문인인 정두경은 사기를 3000번 읽었다고 한다. 영정조의 실학자 이덕무는 논어를 병풍처럼 늘어세워 외풍을 막았고 漢書(한서)를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이불 삼아 덮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논어와 한서를 수시로 읽고 또 읽는 방편이었다. 이것은 한문의 뜻을 알기 위하여서는 讀書百遍 義自見(독서백편 의자현)’이라는 말처럼 수십 번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미약한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하여서이기도 하였다.

공부를 하다 보면 가장 아쉬운 것이 기억력이다. 한 번 보아서 평생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 전부가 소롯이 기억 창고에 저장되어 실력과 지식이 늘어나니 공부할 맛이 나겠다. 공부를 하다가도 중도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다. 힘들여 암기해 놓았는데 며칠, 아니 다음 날이면 잊어버려서 정말 공부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력을 증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묘책(?)을 내놓기도 하고, 나름대로 모종의 요령을 익히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의 어머니는 반복이란 말이 증명하는 것처럼 다른 묘수나 王道가 없다. 적당한 날의 간격을 두고 계속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이 면에서는 좀 우직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연상법이나, 이미지와 연계하는 법, 작은 소리로 되풀이 읽는 법 따위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반복법을 보충하는 것일 뿐이다. 반복법에 대하여 나는 체험적으로 그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

나는 취미가 암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엇이든 암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암기를 취미로 하기 시작한 것은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한 직후이었다. 서울에서 어느 목적지로 가려면 육상으로 가자니 교통 정체가 심하여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는데, 목적지로 가려면 몇 호 차를 타서 어디에서 환승하여 몇 호 차를 타는지 환하게 알지 못하면 외출할 때마다 지하철 지도를 보고 한참 걸려서 방법을 알게 된다. 당시에는 지하철 지도 앱이라는 것이 없었던 때이므로, 나는 이것이 불편하여 아예 외워 버리자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8호선까지 있었고, 생소한 역명도 숱하게 많아서 제대로 외울 수 있을까 좀 우려하면서 시작하였는데 다행히 빨리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서울 지리가 환하게 들어왔고, 외출 때마다 편리하였다. 머릿속에서 지도가 펼쳐졌다. 누군가 지리를 물으면 지도를 보지 않고서도 몇 호선을 타고 무슨 역에서 내려 몇 호선을 갈아타세요.라고 자신만만하게 알려 준다. 흐뭇하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기적으로 암기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조금씩 조금씩 잊어버리기 때문에 계속 되풀이하여 외워 주어야 했다. 또 지하철과 역이 자꾸 늘어나서 그때마다 업그레이드를 해 주어야 하였다. 온수역에서 부평역까지는 아마 생전 갈 일이 없어 보이는데도 외워야 했다. 중도에 되풀이를 그만두자니 그때까지 줄기차게 암기를 되풀이해 온 것이 아까워서 또 외웠다. 최근에는 경의경춘선까지 외웠다. 외울 때는 힘들지만, 다 외우고 나면 자료가 축적되어 가는 데서 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그 맛에 외우는 것이다.

다음에, 베토벤과 괴테가 만났다고 하는데, 그들이 당시 각각 몇 살이었는가 궁금하여 각자의 생년을 알아보았다. 베토벤이 1770년생이고, 괴테가 1749년생이니 21세 차이였다. 당대의 유명 인사들의 나이를 알고 있으니 그들 간의 교류에 관하여 참고가 되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하여 국내외 인사들 중 역사적 인물들의 생년을 거의 다 외웠다. 국사와 세계사를 다시 익히면서 연대를 외웠다. 연대와 나이는 과거로 소급하여 어느 사건이나 어느 상황 또는 인물을 생각할 때 좀 더 사실적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읽는 모든 책이나 글에 대하여는 워드로 메모를 해 두고, 이를 스마트 폰에 동기화시켰으며, 최근에는 드롭박스를 이용하여 사무실 PC에서도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그리고 틈틈이 암기하였다. 등산할 때, 전철 안에서, 길을 갈 때, 쇼핑할 때 등등 무료하면 외웠다. 그러다 보니 이젠 완전히 취미가 되었다. 한 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게 되었다. 무료할 새가 없었다. 기다릴 때 무언가를 읽는 것이 보통이지만 읽을 여건이 되지 않으면, 그저 눈을 감고 암기하면 된다. 물론 우선해야 할 생각이나 일이 있다면 그것부터 먼저 하고 나서 하는 것이므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10여 년을 암기해 온 결과,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이 막연하고 대충 알던 지식들이 나의 몸에 찰싹 붙는 것 같았고, 나의 주위를 선명하게 떠도는 것이었다. 연설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쉽게 그 지식을 동원할 수 있었고, 대화의 소재가 풍부해졌다. 누가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상황 하에서도 대화를 리드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자라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한궤도 같은 이 암기 습관을 언제나 끝낼 것인가, 죽어야 끝날 것인가 하면서 좀 지겨운 느낌이 일어날 때도 있다. 주기적인 암기를 좀 늦추면 잊어버리는 양이 늘어나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으므로, 무한궤도에서 내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 힘들여 공들여 암기하여 쌓은 지식을 거의 다 날려 버릴 각오를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그것을 아까워하는 한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 기억이 오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과학적으로는 기억이라는 것이 뇌의 신경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라는 것에 학습한 바가 새겨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것에 깊이 새겨져서 마치 바위에 글자를 새기듯 풍우에도 흐려지지 않게 되어야 평생 기억한다고 한다. 소우주라고 불리는 인간의 뇌에 대하여는 많은 연구가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우주의 창조주가 있다면 소우주의 창조주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아마 그 둘은 같을 것이다. 그러면 그 전지전능하다 할 수 있을 창조주는 뇌를 왜 그렇게 부실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아니면 최초에는 완전하였었는데, 뒤에 모종의 일로 인하여 부실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창조주를 전지전능하다고 가정한다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죽음이나 병 같은 불완전성이 첫 조상의 범죄로 인하여 시작된 것이라고(창세기 2:16, 17; 3:19) 알려 주는 만큼 후자가 그 원인이라고 알려 준다. 그러면 역시 성경에 의하여 엄청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온 이유가 바로 그 원죄를 대신 속죄, 代贖(대속)하기 위함이니까 그 대속의 가치가 이 땅에서 온전히 실현될 때 첫 조상이 범죄하기 전에 가졌던 완전성을 회복하게 되고, 따라서 기억력도 완전성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16. 贈賂者(증뢰자)의 자살

 

잊을 만하면 터지는 사건이 뇌물 사건이다. 재벌과 정치인 및 고위 관료 간의 커넥션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이 벌어지는 유형은 대체로 이러하다. 처음에 어떤 단서에 의하여 빙산의 일각처럼 조그만, 그렇지만 다소 수상한 돈거래가 드러난다. 초기에 그와 관련된 고위 인사들은 한결같이 극구 부인한다. ‘사실무근이다라는 말은 누구도 믿지 않는 말이고, ‘소문이 사실이라면 직을 사임하겠다라고 해도 대개 코웃음을 친다. 그러자 최근에는 목을 걸겠다고까지 말하는 인사도 생겼다. 목을 건다면 자살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현재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뜻의 흔히 비유적으로 쓰는 말인가?

다음에,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하다. 서로 자기의 정파적 유리 여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밝혀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누가 봐도 불리한 사실이 드러나도 교묘하게 그것을 뒤틀어서 자기편에 유리하게 해석을 하여 되레 공격을 하고 나선다. 정치인들은 도대체 국민들이 안중에 없어 보인다. 선거 때만 반짝 국민을 생각하는 체할 뿐이다.

최근에 터진 아무개 사건의 경우도 그 전형적인 틀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번 사건이 종전의 비슷한 사건과 좀 다른 것은 엄청난 뇌관을 장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들의 이름이 다수 거명되고 있다. 우선 자살한 아무개가 남긴 메모에 적힌 8명의 이름은 모두가 현재의 실세들이다. 모두가 극단적인 표현을 구사하면서 수뢰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대개 자살한 자가 남긴 유서는 증명력이 높은 것으로 치부된다. 형사소송법상으로도 증거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뢰자가 수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다만 그것만으로 수뢰자의 수뢰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미흡하다 할 수 있겠지만, 특별한 경우 그것이 특별히 신뢰할 만한 정황 하에 작성된 것이라고 인정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수뢰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曾子(증자)人之將死 其言也善’(인지장사 그언야선) 이라고 말했듯이 사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은 일응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임종할 때 가족들에게 남기는 말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죽어 가면서까지 남을 모함하는 물귀신 작전을 쓰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철천지원수의 관계라면 자기가 죽고 나서도 그 원수가 잘사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가 곤궁에 처하도록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경우일 것이다. 남이 장군이 역모로 몰리자 영의정 강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그가 남이의 결백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자 남이는 강순과 함께 역모를 공모하였다고 진술하여 강순도 남이와 함께 車裂刑(거열형)을 당한 예가 있기는 하다. 그런 경우는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는 유언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기소하기까지 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매우 높은 선택이다. 더욱이 피의자가 고위 인사이고 보면 섣불리 기소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피의자는 끝까지 혐의 사실을 부인하고 보는 것이다. 정치적 모함을 받고 있다거나, 앞으로 있을 대선이나 총선에 있어서 라이벌 관계에 있을 사람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게 만든다. 소위 표적 수사라는 것이다. 결국, 여러 가지 직접증거나 간접증거 등이 수집되고 급기야 구속이 되고 나아가 기소가 되어도 자신의 죄과를 시인하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1심에서 유죄가 나도 마찬가지이고, 2심을 거쳐 대법원에서도 유죄가 확정되어도 자신의 누명을 더 큰 목소리로 강변한다. 심지어 형을 다 살고 나올 때에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였는데 앞으로 밝혀질 것이라면서 事必歸正’(사필귀정)을 되뇌기 일쑤이다. 그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가 믿거나 말거나 그는 여전히 공작의 희생물임을 계속 강조한다.

또 이런 유의 사건에 있어서 피의자들의 공통점은 죄책감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사진상으로도 너무 당당하다는 것이다. 다른 범죄의 피의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거나 수건 따위로 낯을 가리거나 민얼굴을 드러내기를 극히 꺼리는 최소한의 양심을 드러내는데, 이런 수뢰 사건의 피의자들은 안중근 의사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반대파에 의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다는 듯한 인상을 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중 좀 순진한 국민들은 그들이 정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최소한 피의자들의 가족들은 그러한 극구 부인을 지푸라기로 삼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자기의 가장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인 피의자가 설마 그런 죄를 지었겠느냐 하며,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하는 인간의 속성에 따라 그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극구 부인하는 피의자들의 상당수는 적어도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자신이 범죄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사람은 늙어서도, 아니 죽을 때까지라도 최소한 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심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어느 정도 먹혀들 여지가 있는 것은 실제로 현실 정치에 있어서 그런 모함을 하는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 어둡던 시절에는 빈번하기도 하였다고 하지만 현재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의 망령이 완전히 씻겨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얼마쯤은 긴가민가하는 생각도 일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정치인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은 철면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 것 같다. 자신의 밑구멍을 드러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태연하고 초연할 수 있는 超無感覺(초무감각)이 필요하다. 요즈음은 비디오 시대라 TV는 물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수뢰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자주 보이고 있는데,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표정 연기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정치로 대성하려면 저렇게 연기를 잘해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곤 한다.

어쨌거나 이 세상을 잘 돌아가게 하려고 선두에 나서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면모들이 저 모양인 것을 보면 세상의 장래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어디로 가든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은 극히 이기적이고 다른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을 재확인하면서 성경의 예언이 확실하다는 것을 한층 더 느낄 뿐이다. 따라서 성경에 들어 있는 나머지, 가까운 장래에 있을 예언의 성취가 더 기다려진다.

 

17. 마스크

 

메르스 공포가 거리를 나라를 휩쓸면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흔히 보게 된다. 마스크가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채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공기 감염이 되지 않는다는 의학계의 발표가 있었는데도 막연히 불안한 심리에서 그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위에 마스크를 이런저런 이유로 쓰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산에 가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모처럼 산에 와서 맑고 삽상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왜 저렇게 답답하게 마스크를 쓰는가? 아무래도 호흡이 원활하지 않아 오르막길을 오를 때 숨이 차면 더 불편할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 않은지, 아니면 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건강을 위하여 참는지 그렇게 시종 쓰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마스크는 위에서와 같은 경우처럼 주로 위생적인 면에서 착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마스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정체를 가리기 위하여 쓰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자신의 흉측한 몰골을 가리려고 하거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이다. 오페라 오페라의 유령이 전자의 경우라면,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달타냥의 제3부인 철가면이 후자의 경우이다. 전자는 파리 오페라극장을 무대로, 천사의 목소리를 타고났지만 사고로 흉측하게 변한 기형적인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괴신사가 아름답고 젊은 프리마돈나를 짝사랑하는 이야기로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오페라이다. 후자는 어린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루이14세가 되자, 야심가 로슈포트는 왕을 납치하여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철가면을 씌운 채 감옥에 가두고 쌍둥이 동생으로 하여금 왕의 행세를 하게 하는데, 로슈포트의 음모를 알게 된 달타냥은 삼총사와 힘을 합쳐 왕을 구한 뒤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이 이야기는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는데, 최근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쌍둥이 형제로 12역을 맡은 아이언 마스크1998년에 제작되어 국내에서도 상영되었다.

그런가 하면 초능력을 꿈꾸어 온 사람들이 마스크라는 신비의 도구를 사용하여 현실을 초월해 보려는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짐 캐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마스크가 바로 그 예이다. 평범한 은행원 스탠리는 어느 날 그는 우연한 기회로 고대 시대의 유물인 마스크를 발견하는데 이 마스크는 아주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어서 스탠리가 마스크를 쓰면 초인적인 힘을 가진 불사신이 된다. 이것만으로도 영화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소재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스크는 사람의 얼굴을 가리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나 영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도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예컨대 사진 합성 변형 프로그램인 포토샵에서나 동영상 프로그램인 플래시에서 마스크는 흥미진진하고 찬탄할 만한 기능을 발휘한다. 이 때문에 영화의 테크닉이 크게 발전하고 영화를 보는 재미를 대단히 증폭시켰다. 반면에 마스크가 본래 의미하는 실제를 가리는 것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한편 요즈음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성형수술도 넓게 보면 마스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의 자기 얼굴을 가리고 인공적인 것을 덮어씌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예 이전 것을 없애 버리는 점에서 그것을 남겨 두는 원래의 마스크와 다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자기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면에서는 같다. 이것은 동일성을 완전히 찾지 못하게 하는 점에서 마스크 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보듯이 마스크는 다양한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을 투사하기도 한다. 사람은 반드시 몰골이 아니어도 자신의 정체를 가리고 싶어 할 때가 종종 있다. 현대의 제반 현상의 특징 중의 하나로 들고 있는 익명성도 바로 그러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익명은 아니더라도 가명을 쓰거나 얼굴을 바꾸고 싶은 욕구는 아마도 거의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철들면서부터 착용하기 시작한 마스크에 식상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철들면서부터 예의라는 이름으로,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자제나 인내라는 이름으로 마스크를 쓴다. 자의식이 생기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고 단체와 조직의 일원이 되면서 그 마스크는 점점 더 두꺼워진다. 색깔과 무늬까지도 다양해지고 여러 가지, 여러 종류의 마스크도 쓰게 된다. 사스와 메르스가 유행하지 않는데도 여러 유형의 마스크를 하나 또는 여러 개를 한꺼번에 쓰기도 한다.

사람이 단체생활을 하고 질서와 윤리라는 것이 필수적인 세상에 사는 이상 그러한 마스크는 불가피한 것이다. 다만 질서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 질서에 원래의 취지가 매몰되는 것처럼 마스크도 원래의 취지를 크게 벗어나서 아주 나쁜 의미에서 횡행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어른이 될수록, 사회적 지위를 차지해 갈수록 그 마스크의 양과 질이 나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비슷한 상황, 아니 심지어는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에서도 마치 다른 사람인 듯 말하거나 행세하여 타인을 혼란케 한다. 특히 정치인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어느 것이 그의 본체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이런 것들을 매스컴은 시시각각으로 전달하여 일반인들도 잘 알게 되고 명색이 지도자란 사람들의 행태를 비난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자신이 본받기도 하면서 결국 모든 사람이 거짓말과 거짓 행태를 밥 먹듯 해 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여러모로 민낯으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친구 간에는 물론,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부부 간에도 마스크를 쓴다. 숨넘어가는 사람의 인공호흡기처럼 그것이 없으면 당장 숨이 끊어질 것처럼 마스크를 쓴다. 어떤 사람은 잠꼬대까지도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낮 동안 늘 타인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가히 마스크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스크를 얼마나 다양하게 갈아 쓰면서도 얼마나 그것을 진정성 있게, 즉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되었고, 출세의 주요한 방책이 되었다.

갈수록 사람은 자신의 실체와 진정성을 잃어 가고 있다.

 

18. 제도와 실무의 괴리

 

어머니가 며칠에 걸려서 지은 설빔을 개구쟁이가 입고 나가서 하루 만에 더럽히고 찢기고 망쳐버렸다. 어머니가 얼마나 한숨짓겠는가? 공들여 만든 법이나 제도도 그러할 수 있다.

제도와 실무는 언제나 거리를 지니고 있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어쩌면 그 사회의 발전의 척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거리가 워낙 멀다 보면 실무에 안주하는 사람일수록 제도를 무시하고 제도를 내세우는 사람을 우물 안 개구리인 양 경멸하거나 조소한다. 반대로 제도만 따지는 사람은 자칫 원칙론자가 되어 뒤처져 있는 실무를 개탄하고 무조건 무시하려 들며 때로는 고루하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는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이어서는 결코 안 되며 오히려 손을 맞잡고 서로를 끌어 주고 밀어주어야 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 최근에 내가 겪은 제도와 실무의 괴리, 그 거리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조금은 어림할 수 있는 얘기 두 가지를 소개한다.

 

내가 군법무관으로 제대한 후 실로 4반 세기 만에 군사법원에 갔다. 이번에는 변호사로서였다. 군사법정까지 가는 길 좌우에는 초가을의 아직도 따가운 햇빛에 지친 듯 서 있는 가로수들이 돌아서 있었다. 나는 훌쩍 흘러간 세월의 상념을 좇다 말고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면서 언덕을 올라갔다.

군사법정 안팎에 헌병이 장승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은 예나 이제나 같았지만, 심리절차는 꽤나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군사법원법도 대폭 개정되었고, 사회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고 소위 인권화니 민주화니 하는 외침이 울린 지도 어언 수십 년이 흘렀으니 이른바 군사재판이라는 틀을 상당히 벗어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니, 기대하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한 기일에 증인신문까지 마친 것은 군사재판이 매주 열리기 어려운 현실적 사정을 고려하여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실심리를 마치고 곧이어 약간의 평의를 거친 후 바로 선고가 행해지는 것이었다. 사선변호사가 선임되어 그 기일에 백 페이지가량의 변론 자료를 제출하였고 장시간 변론을 하다 제지되어 변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갈음하면서 변론서를 꼭 읽어 달라고 당부하였음에도 그것은 묵살된 것이다. 아마 사명당의 주마간산식 수법을 쓰지 않고서는 그 자료를 다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 읽지는 않고 요점만 파악한다 하더라도 한두 시간은 족히 소요될 분량인데 도저히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허탈감이 엄습함을 느꼈다. 철벽과 싸우는 듯한 무력감도 일었다. 그 자료를 준비하기 위하여 추석 연휴를 포함하여 며칠 동안 꼬박 매달렸는데 제대로 읽히지도 않고 일축되고 보니 일순 딛고 선 바닥이 꺼지는 듯하였다. 바깥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데 군사법정은 정지하고 있었다. 그곳은 시간이 얼어붙어 있었다. 세상에, 심혈의 결정품이 휴짓조각 취급을 받다니. 아무리 군대라는 특수조직의 특성이 감안된다 하더라도 군사재판은 어디까지나 사법작용의 하나가 아닌가?

더욱 놀란 것은 그러고서도 피고인에게 법정최고형인 징역 3년이 선고된 것이다. 구형대로 법정최고형을 선고함에 있어서 변호인이, 더구나 사선변호인이 제출한 자료를 세밀히 검토하지도 않고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같은 유형의 사건의 처리 관례에 따라 깊이 따져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군사재판에서 법률 소양이 부족한 일반 장교 중에서 선임된 국선변호인이 형식적으로 변론해 온 예가 대부분이었고 그로 인하여 형성된 아마도 잘못된 관례를 사선변호인이 선임된 마당에서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럴 바에야 누가 비싼 돈을 들여 변호인을 선임하겠는가?

징역 3년이란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다. 그것이 한 기일에 일사천리로 선고까지 이루어지다니. 하기야 한국의 국회에서 떡 먹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안의 날치기 통과이고 보면 군사재판의 날치기라고 해서 특히 이상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 못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회의 의안 심의에는 회기가 정해져 있어 쫓기는 것도 이해가 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재판에 있어서는 그런 것도 아닌데(구속 기간은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음) 굳이 서둘러 끝내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미치지 못한다. 역시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형사소송법의 이념은 그늘에 팽개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병역법 위반 피의자를 자수시키기 위하여 경찰서에 데리고 나갔다. 담당자는 병무청에서 고발장이 오지 않아서 다음에 오라고 하였다. 나는 조세범이 아니어서 고발은 소추요건이 아니며 자수가 수사의 단서가 되는 것이니 접수하여 수사를 시작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발장이 없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답답하다는 투로 말하였다. 나는 일반적으로 행정사범의 경우 일반 경찰관이 그러한 사범을 적발하기 어려워서 통상 행정기관의 고발에 따라 수사를 개시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수사 개시의 요건이 아니며, 일반 경찰이 다른 기회에 행정사범을 발견하는 경우에는 수사를 착수하여야 한다고 설명하였지만 막무가내였다. 몇 차례 승강을 벌이다가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피의자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혹시나 내가 형사소송법을 잘못 알고 있는가 싶어 사무실로 와서 법전과 교과서를 찾아보았다. 교과서는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사법경찰관은 자수를 받은 때 조서를 작성하여야 하고, 신속히 조사하여 관계 서류와 증거물을 검사에게 송부하여야 하며(형사소송법 제240조 제237조 제2, 238), 다만 조세사범과 관세사범은 세무관서의 고발이 소송조건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후 고발장이 접수된 사실을 확인한 후 다시 그 피의자를 데리고 나갔다. 자수임을 확실히 해 두기 위하여 자수진술서를 미리 써갖고 나갔다. 조사관에게도 자수한 사실을 조서에 기재하도록 특히 당부하였다. 그리고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오후에 전화로 알아본즉 긴급체포장을 발부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자수하였고 주거와 신분이 확실한 피의자에게 무슨 긴급체포냐고 물었더니, 그 조사관은 오히려 웃으면서 바로 이런 경우에 긴급체포를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잠시 후에 경찰서로 가서 그 조사관을 만나서 긴급체포의 형사소송법상의 요건과 그 제도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자수했어도 집에 돌려보냈다가 뒤에 출두하지 않으면 곤란하므로 이런 경우 통상 긴급체포를 한다고 설명하였다. 얼마간 더 입씨름을 하였지만 그는 실무상의 관행을 내세우며 되레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투로 완강히 말하여서, 이미 긴급체포장을 발부한 뒤라 포기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내 말이 씨도 먹혀들어가지 않아서 이번에도 역시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서 법전과 법서를 뒤적여 긴급체포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형사소송법 제203조의 3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거나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고 긴급을 요하여 체포영장을 받을 수 없을 때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할 수 있다. 이 경우 긴급을 요한다 함은 피의자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 등과 같이 체포영장을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때를 말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자수하여 자백한 자에게 증거 인멸 내지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하기도 어렵거니와, 여기서 긴급을 요하는 경우로 예시한 피의자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란 자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느 하나 긴급체포의 요건에 해당하는 것이 없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분개하기보다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자수한 자를 긴급체포하다니…… 바로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불법체포구속을 방지하기 위하여 형사송법을 개정하여 체포영장제도와 긴급체포제를 신설하고 종전에 남용되어 왔던 긴급구속 및 사후영장제도를 폐지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그 긴급체포는 검사의 승인까지 얻었다. 사법경찰관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를 지휘 감독하는 형사법의 법률 전문가인 검사는 또 왜 그러는가? 사법경찰관의 관례적 처리에 무심코 맞장구를 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어느 한 사법경찰관의 잘못이 아니라 사법경찰관 전체의 관행으로 행해져 오고 있는 것이라면 누구보다도 검사가 그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위와 같은 운영이 형사소송법에 맞는 것이라면 체포영장이나 구속영장은 어느 경우에 필요한 것인가?

위와 같은 사례는 더구나 변호사에 대하여 행해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법률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불법을 자행하고 물론 그들은 그것이 불법인 줄도 모르고 있었겠지만이의마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일축하였으니, 일반 문외한인 시민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렇게 하여 크고 작은 인권이 무수히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수와 긴급체포에 관한 일을 가족에게 말했더니, 그는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못 미더워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교과서적인 이론보다도, 또는 법전에 있는 법률보다도 실제의 운용 방식이 더 우선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말까지 하였다. 이렇게 법을 잘 모르는 일반 서민들은 행정관서에서 하는 대로 그것이 옳거니 하고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이고 어떤 기회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말해 주기도 할 것이며 그렇게 전전되다 보면 잘못된 법률 상식이 퍼지게 될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그 상식에 따라 행동할 때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며 그때 그것이 정확한 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어떤 종류의 피해를 입은 뒤일는지도 모르며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일선 담당자들의 만연한 일 처리가 잘못된 상식의 형성에 알게 모르게 기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연거푸 체험한 위의 사례에서 제도와 현실 또는 이론과 실무 사이에 얼마나 괴리가 있는가 하는 점을 새삼 느꼈다. 이러한 부분이 비단 이뿐이겠는가? 버젓이 법과 제도는 있지만 실제는 겉돌고 있는 것이 약간의 예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실무진에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자기가 맡고 있는 분야만큼은 법령을 정확하게 숙지하고 해석하고 제도의 취지를 잘 알아서 문자 그대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또는 전문가가 그 점을 지적해 준다면 그 점을 연구 조사하는 태도가 꼭 필요할 것이다. 자기가 그 사무의 담당자이니까, 다시 말해서 칼자루를 쥐었으니까 자기가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생각하는 독선이 늘 문제의 병인(病因)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내가 검사 생활을 할 때의 일은 너무 대조적이다. 건축법 위반 사건을 송치받아 조사하다 보면 자주 바뀌는 건축법 시행령과 시행규칙 심지어 시의 조례나 고시, 훈령까지도 알아봐야 할 때가 이따금 있었다. 법령집을 뒤져서 시행규칙까지 찾아보다가 더 하위의 규칙에 대하여는 시청의 건축과 직원에게 전화로 물어보는 경우가 있었다. 답변에 궁해진 몇 사람의 직원들이 전화를 돌려가며 받다가 종당에는 계장에게 전화를 바꿨는데 그 계장이란 분은 건축법 시행규칙은 물론 더 하위의 규칙까지 환히 꿰고 있었다. 답답한 가슴이 그렇게 시원하게 트일 수가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그 계장에게 종종 전화를 하였는데 항상 자상하고도 정확하고 친절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와 전화할 때에는 나의 얼굴이 저절로 밝은 미소로 피어나고 있었고 마음도 어느새 유쾌해져 있었다. 자기의 사무에 대하여는 그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별로 높지 않은 지위에서 성실히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공무원상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법이나 제도를 만들거나 바꿀 때에는 보통 장기간에 걸쳐 난상숙의를 거친 끝에 이루어지는데 이를 감안해서라도 이를 집행하는 일선에서 법 개정 전의 타성에 여전히 젖어 있거나 종전의 관례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하는 일이 없도록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적용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말초신경마비증 환자처럼 일선 말단에 이르러 좋은 법령의 취지가 퇴색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법이나 제도가 한 사회나 국가의 동맥이요, 중추신경이라고 한다면 일선의 집행기관은 모세혈관이나 말초신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맥과 중추신경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세혈관이 막히거나 말초신경이 마비되어도 일상의 기능에 현저한 장애를 일으키거나 괴저가 일어날 것이다.

작은 것에 충실한 자는 큰 것에도 충실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되다. 좋은 옷을 망쳐버리는 개구쟁이가 줄어드는 사회가 되어야겠다.

 

19. 인생의 기복-롤러코스터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수많은 기복으로 점철되어 있다. 내가 보거나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끝없는 상승과 하강을 경험하면서 한평생을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마냥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절망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다. 자연현상도 그러하고 만물도 그러하다. 우선 모든 생물은 크게 보아서, 생겨나기 시작하여 점점 자라나고 왕성해져서 전성기에 이르고, 반드시 하강하여 쇠약해지고 마침내 사멸한다.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허약해졌다가 강해지고 아프다가 회복되고 잘 나가다가 기울기도 한다. 꽃도 피었다가 시들고, 동물도 강해졌다 노쇠하고, 춘하추동이 거듭되면서 더위와 추위도 약해졌다가 강해진다. 산에는 언덕이 있어서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이 있게 마련이고, 바다의 물결도 오르락내리락하여 파도를 만들고 해변으로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사람도 자연의 한 개체이므로 마찬가지이다. 신체적으로도 점점 강해지다가 최강의 상태에 이르면 곧 약해지기 시작하고 점점 약해지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경제적으로도 한 평생 동안 여러 차례의 기복을 갖는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평생 동안 몇 번의 기복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조직이나 단체나 심지어 국가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가 있다. 그것들도 법적으로 넓게 보면 법인격을 가지기도 하고 법률행위와 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인격체로 볼 수 있을진대 기복을 피할 수 없다.

모든 것에는 起伏(기복)이 있다는 불변의 진리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을 준다. 마냥 즐겁고 일이 잘 풀린다는 느낌이 들 때에는 곧이어 있을 하강세를 염두에 두고 기고만장할 일이 아니다. 옛말에 旣取非常樂 須防不測憂(기취비상락 수방불측우) 라는 말이 있다. 이미 대단한 즐거움을 누렸다면 반드시 뜻밖에 찾아오는 우환을 막도록 하라는 뜻이다. 得寵思辱 安居慮危(득총사욕 거안려위), 총애를 얻거든 욕될 것을 생각하고, 안락함에 처하거든 위태할 것을 염려해야 한다는 말인데 같은 맥락이다. 榮輕辱淺 利重害深(영경욕천 이중심해)도 역시 명심보감의 성심편에 나오는 말로서 영화로움의 정도가 가벼우면 욕됨의 정도도 적고, 이로움이 많으면 해로움도 심각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우울하고 슬프고 매사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에도 너무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생각나게 한다. 임어당은 나쁜 일이 생길 때는 그보다 더 나쁜 일을 생각하면 현재의 상황을 이기기 쉽다고 말하였다. 막상 최악의 상황을 그려 보면 예상외로 별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마음이 좀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최악의 상황 다음에는 반드시 호전되는 역전 곡선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것에는 기복이 있다라는 진리를 한층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증권 시세이다. 단기간을 보면 폭락을 하기도 하고 폭등을 하기도 하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 같지만 시야를 좀 멀리하여 줌아웃해서 보면 어느 정도의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5일선이니, 20일선이니, 60일선이니 하면서 이동평균선이 생겨났고, 이를 투자의 참고 자료로 삼는다. 이보다 더 길게 보면 시세가 하강하면 언젠가 반드시 상승하고, 상승하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하강한다는 대원칙이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명한 투자가는 호흡이 길다. 단기간의 기복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물론 단기차익을 노리고 투자한 사람은 시세가 폭락하면 잠을 설치겠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투자가 아니라 투기이다. 투기하는 사람은 배짱이 두둑하여야 할 것인데 그렇지도 못한 사람이 투자가 아니라 투기를 한다면 그것은 길을 잘못 택한 것이다.

한편 투자하는 사람은 느긋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시세가 하강하더라도 언젠가는, 길게 보면 늦어도 5년 후에는 회복되고 상승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돈을 그저 묻어 둔다는 관점을 가지고, 일단 투자한 후에는 시세를 알아보는 것조차 하지 않는 대범함을 갖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주식 시장은 국내의 정세는 물론 국제 정세에도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외국의 주요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기타 상황까지도 잘 알아야 하는데, 일개 범인이 그렇게 하면서 투자하기는 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투자하고 나서 잊어버린다면 주식은 제 혼자서 널뛰기를 한참 하고 있을 것이고, 그러다가 먼 훗날 문득 생각이 나서 시세를 알아볼 때 그것은 사춘기 아이처럼 훌쩍 커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연전에 주식이 한 달 만에 반 토막이 난 일이 있었는데, 2년여 만에 원상으로 회복된 일이 있었고 그 이상으로 올랐다.

그리고 특히 주식 시세를 보면 인생살이와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컨대, 하루아침에 폭등하면 수백만 원을 벌게 되었다고 좋아하다가, 반대로 폭락하면 수백만 원을 졸지에 잃게 되어 우거지상이 될 수 있다. 환매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냥 관념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돈이 들어오거나 나가지 않으면서 좋아하다가 우울해하다가 또다시 혼자서 미소를 띠거나 심하면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서 히죽히죽 웃기도 하다가, 조울증 환자처럼 예사롭지 않게 떠들어 대거나 울기까지 한다.

그런데 특히 주식 투자에 있어서는 마치 그림자를 보고서 一喜一悲(일희일비)하는 것 같다. 주식이 올라갔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돈을 손에 쥐는 것도 아닌데 괜히 좋아하다가, 반대로 주식이 내려가면 현실적으로 돈을 손해 본 것도 아닌데 기분이 언짢다. 무슨 헛것을 보고 좋아하기도 하고 언짢아하기도 하는 것 같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언짢아하다가도 언젠가 다시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를 막연하나마 할 수 있기 때문에 언짢음이 그리 오래 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에도 가족 중에 하나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치거나 죽기도 하고, 건강에 은근히 자신감을 가졌던 자신이 정기적 건강진단에서 암으로 판정을 받기도 하는가 하면,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복권에 당첨되거나, 집값이 급등하여 큰 이익을 보거나, 사업이 갑자기 번창하거나 승진을 하거나 한다. 국무총리로 내정되었다가 청문회에서 갖은 비리가 드러나서 망신만 당한 채 정식 임명을 받지 못 하는 일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래서 일찍이 塞翁之馬(새옹지마)라는 고사도 생긴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일이라는 것도 어쩐지 그림자 같고, 나쁜 일이라도 머지않아 사라지겠지 하는 약간의 기대를 위한 기대 같은 것이 있어서 역시 그림자 같은 면이 있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아침 안개 같은 것이 아니던가(믿음이 없다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사람처럼 무서운 속도로 내리막을 내려갈 때는 무서워서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움만으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짜릿한 즐거움과 곧 있을 오르막에 대한 기대도 섞여 있다. 곧이어 오르막을 치달아 오를 때는 환호의 소리로 대번에 바뀐다. 그렇다. 내리막이라도 언제까지나 내리막길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오르막을 예기하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자. 오르막이라도 언제까지나 오르막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내리막을 대비하면서 절제된 환호를 지르자.

그리고 롤러코스터를 내리면 그것을 탄 여운은 금세 사라진다. 언제 탔냐는 듯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인생은 잠시 탔다 내리는 롤러코스터이다. 즐겁게 울고, 슬프게 웃자.

 

20. 메르스 공포

 

나라가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것이 또 한 번 드러났다.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작년 4월경에는 세월호 침몰로 나라 전체도 침몰하는 듯한 위기를 겪었다. 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아직도 그 여진이 상당히 남아 있다. 조심스럽게 숨을 돌리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중동에서 발병하였다는 호흡기 질환 메르스로 인하여 또다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작년에는 에볼라라는 처음 듣는 병이 세계를 두렵게 하였었는데 다행히 한국에는 상륙하지 않은 채 종식되어 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거의 해마다 무서운 질병이 생겨나서 이제는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금세 세계로 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조류 독감이니 광우병이니 하는 동물에게 감염되는 병까지 극성을 부려 사람들에게도 비상상태를 초래하곤 하였었다. 가히 疫病(역병)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성경은 말세의 징조 중의 하나로서 큰 지진이 일어나고 곳곳에 식량 부족과 역병이 있을 것이며, 두려운 광경과 하늘로부터 큰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다’(누가복음 21:11)라고 말하였다.

지금이 말세인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지금이 예사로운 시대가 아니라고 더러 수군거리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실 위 성구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른 징조, 즉 큰 지진과 기근의 경우만 보아도 오늘날의 세계적 현상과 일치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구태여 성경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세계가 격동하고 있고, 무언가 격변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특히 우리가 매우 유의하여야 할 점은 위에서 열거한 징조인 역병, 지진, 기근 등은 모든 정부가 그것의 발생과 피해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까지 쓰고 있는 것 같은데도 발생 빈도는 더 잦아지고 피해자는 더 많아지며 발생한 뒤의 조치도 쉽지 않으며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교통이 너무 편리해져서 사람들이 외국을 옆집 드나들 듯 다니고 있다 보니 전염병의 감염의 속도와 범위가 갈수록 빠르고 넓어지고 있다. 환경오염과 생활 방식의 혼잡으로 인하여 사람과 동물에게 새로이 생기는 병도 늘어 가고 있다. 예전에 비하면 의료의 체계와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였다고 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발전하는 病魔(병마)를 뒤쫓아가기에 급급하다. 지진의 경우에 있어서는 사람으로서는 더더욱 속수무책이다. 그 발생은 막을 수 없고 다만 미리 예측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길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구의 밀집화 현상으로 대량 살상의 피해가 속출한다. 기근은 세계적으로 富益富 貧益貧(부익부 빈익빈)의 결과이다. 식량의 세계적 총량은 모든 사람을 먹이기에 충분한데 고른 배분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비의 과다한 지출로 식량의 생산과 배분에 자금이 모자라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란다. 예컨대 세계 전체의 군사비의 1분당 지출 규모는 200만 달러를 넘는다. 그 돈의 1만 분의 1이라도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투입되면 餓死者(아사자)를 수백 명씩 줄일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지극히 뻔한 산술적 논리를 알면서도 일부러 그것에 눈을 감고 군사비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 마디로 경제와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1인당 GNP5자리 수로 급상승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복지 향상은 제자리걸음이고, 앞으로도 향상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위 행복지수라는 것은 GNP와는 반대되는 기현상(?)을 빚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기를 쓰고 경제와 과학을 발달시키려고 하는가? 더 행복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결과는 그 반대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그것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고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 想到(상도)할 때 어쩌면 성경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다분히 들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메르스가 치사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매스컴에서나 정부에서나 너무 과대 포장하여 호들갑을 떨고 있는 느낌이다. 애초 발생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도 발생 환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고, 그 외의 나라에서도 몇 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 걸로 보아서 감염률은 극히 낮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감염 예방을 위한 삼엄한 조치가 다중적으로 펼쳐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한국 전 인구에 대한 비율은 20만 명에 한 명꼴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메르스에 관한 뉴스가 연일 톱 뉴스로 다루어짐은 물론이고, 여러 면에 걸쳐서 여러 시간에 걸쳐서 보도되고 논의됨으로 인하여 국민들은 심리적으로 극도로 위축되고 신경이 예민해지게 되었다.

이것은 급기야 시장으로 관광산업으로 엔터테인먼트로 파급되고, 일파만파 경제 전 분야에까지 격랑이 밀려가서 얼어붙게 만들었다. 요즈음은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가 21세기의 세계를 뒤흔든 5대 충격 중의 하나로 꼽은 SNS 시대라 조그만 뉴스거리가 하루 만에 몇백 배로 폭발적인 덩치로 커져 버린다. 뉴스의 진위를 따질 생각도 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뉴스는 이미 다른 나라로까지 날아가 버린다. 그리하여 별로 크지 않은 일이 어느새 매우 큰 일로 변신하여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은 일이라면 호들갑을 결코 떨어서는 되지 않을 것이고, 진정 큰일이라면 SNS부터 철저히 자제하면서 문제의 진상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국민 전체가 한마음으로 단합하여 일사불란하게 대처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할 것이다. 메르스 하나 때문에 전 나라의 모든 부문이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초토화되다시피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적게는 나라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고, 크게는 인류가 무얼 가지고 발달해 왔다고 하는지 自嘲(자조)를 금할 수 없는 마음이 든다.

앞으로 메르스보다 훨씬 강력한 역병이 하나 또는 둘 이상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 상상만 해도 암담하기 짝이 없다. 아마 웬만한 나라들이 붕괴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성경이 위의 예언을 말세의 징조로 들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의학이 인류 사상 최고조로 발달해 있는 오늘날 하찮은 역병들이 온통 세상을 휘젓고 있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고 단연코 말할 수 있다.

 

21. 양심을 버림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많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든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이 없는 사람을 개돼지보다도 못한 것이라고 심하게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고 보면 양심이란 사람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즉 양심이 없다면 하기야 양심이 전혀 없을 리야 없겠지만 양심이 평균보다도 좀 적을 때 과장해서 쓰는 말이렸다사람 취급을 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사실 개나 돼지가 매우 나쁜 짓을 하는 일이 없고 보면 매우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개돼지보다도 못하다는 말을 들어 싸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용례를 보면 양심은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하는 마음의 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면 양심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의하면 양심을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정의한다. 양심은 천부적인 것이어서 미개인이나, 인위적으로 전혀 문명과 교육의 혜택을 받지 않도록 양육한 인간에게서도 양심이란 것이 있다는 것이고 보면 양심은 인간만이 지니는 고유의 특성이며, 한편으로는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 국가나 그 전 단계인 씨족사회가 형성되기 전에도 인간의 사회가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양심 때문이리라. 인류학적으로 보아도 여러 실험에 의하면 인간은 원시사회나 미개사회에서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음을 실증하고 있다. 구태여 그런 학문적 성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양심의 최초의 증거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온다.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지른 후 하느님이 불렀을 때 그분의 얼굴을 피해 동산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3:8) 바로 양심의 작용이다. 동양에서도 良知良能(양지양능)이라고 해서 타고난 지식과 능력을 말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중에서 앞부분 良知는 지적인 면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면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성경의 로마서 215절에서도 율법이 없는 이방 사람들이 본성에 따라 율법을 행하면, 비록 율법이 없어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그들은 율법의 내용이 자기들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양심이 그들과 함께 증언하여 그들의 생각이 그들 자신을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합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양심을 가장 넓은 의미의 법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양심의 기능으로서 사법적 기능과 입법적 기능을 들고 있다. 즉 사법적 기능은 양심이 이미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하여 사후적으로 자신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고, 입법적 기능은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그것의 잘잘못을 미리 생각하게 하는 기능을 말한다. 그렇게 보면 양심은 법이라는 것 이전에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켜 주고 인간사회를 형성케 하는 주축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양심은 나침반이다. 인간이 가야 할 정확한 길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침반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양심은 경고음을 발한다. 이것을 계속 무시하면 밤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양심은 가장 편안한 베개이다라는 말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그 양심의 내포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어느 정도의 변천을 겪어 왔으며, 그러한 융통성이야말로 사회의 윤활유의 기능을 담당하여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1895년 단발령이 있기까지 조선의 남정네들이 무슨 큰 전가의 보도인 양 고수해 왔던 상투만 해도 그렇다. 그것을 자른다는 것은 당시 성인 남자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될 정도이었고, 심지어 단발령에 항거하여 백여 명이 자결하기까지 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의 慣例(관례)로서는 이 冠禮(관례)는 성인 남자의 양심 속에 확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빨가벗고 다니라는 명령에 따를 수 없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투를 하고 갓을 쓰고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려야 볼 수 없다. 지금 서울 도심에 그러한 사람이 다닌다면 행인들이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동물원의 원숭이 바라보듯 흥미롭게 바라볼 것임이 틀림없다.

단발령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투를 틀고 다니는 사람은 저절로 사라졌고, 오늘날 한국의 모든 사람의 양심은 상투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눈곱만큼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양심은 스스로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 온 것이다. 미니스커트의 예도 마찬가지이다. 미니스커트가 한국에 상륙한 1960년대 후반에 경찰관이 길에서 자를 갖고 다니며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의 스커트의 길이를 재는 진풍경이 외국 언론에까지 보도되었다지 않는가! 그런데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속옷이 보일락말락 할 정도로 짧은 스커트에 대하여 다소 눈살을 찌푸리는 일은 있을지라도 보통의 미니스커트에 대하여는 무감각해져 있고, 이를 보는 양심의 바늘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렇듯 양심은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급변하는 사회상에 뒤처질세라 민첩하게 따라잡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심은 뒤쫓아가는 데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부면에서는 사회상을 뜯어고치기 위하여 앞서가기도 한다. 요즈음 특히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성추행에 관한 처벌 강화는 양심이 실정법을 이끌고 간 예라고 할 수 있다. 성도덕의 변화에 따라 간통죄가 단지 사사로운 부부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선을 긋게 된 데에도 양심이 종전보다 훨씬 덜 걸거적거리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 요지는 부부간의 애정 문제에 법이 깊이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만, 그 전에는 필요가 많았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그 필요가 이전보다 그만큼 줄었다는 것은 실제로 그 필요가 줄었다기보다는 부부간의 사생활에 대하여 양심의 활동의 필요성이 줄었다는 것이고, 법이 사생활을 기웃거리는 것이 오히려 양심에 걸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변의 양심의 내포를 이루고 있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다. 대부분 형사법상으로 중죄를 이루는 것이 거기에 속하겠지만, 그 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든가, 자녀를 부양하는 것,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 약한 사람을 돕는 것, 公平無私(공평무사)해야 하는 것, 뇌물을 수수하지 않는 것 등등이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은 철만 들면 누구나 그것이 나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러한 순수 양심의 영역에 속하는 사항까지도 저버리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대하여, 소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송받던 한국에서마저 이미 그 이름은 퇴색된 지 오래다. 50이 가까워도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일은 항다반사이고, 노부모의 유산에나 관심을 두고 위선적 효도를 하는 자식들도 숱하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 소송판에 나서는 경우까지도 있다. 부모 자식 간이 이 정도인데 형제 사이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형제들이 주로 부모의 재산을 둘러싸고 泥田鬪狗(이전투구)의 악랄한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부모, 부부, 형제 등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이용하여 보험사기를 펼치는 일도 수없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직자들은 돈을 버는 일이라면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리고 혈안이 되어 있는 개탄스러운 일들도 부지기수로 보고 듣는다. 업무상횡령과 배임, 뇌물수수, 공문서위조, 사기 등이 연일 보도되어, 과연 이러고서도 나라가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노약자를 등쳐먹는 일, 부녀자에 대한 성추행, 쥐꼬리만 한 권한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최대한 우려먹어서 자기의 잇속을 챙기는 일 등은 이미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우스개 얘기지만 어떤 사람이 고위 공직자들 수십 명에게 탄로 났다. 도망하라고 전보를 보냈더니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이런 말은 물론 지어낸 것이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을 저버린 일에 대하여 꼬리 없는 여우들이 사는 동네라는 우화까지 있다. 어느 동네에 여우들이 살고 있었는데 모두가 꼬리가 없었다. 그 동네에 꼬리가 있는 여우가 놀러 갔는데, 꼬리 없는 여우들이 이를 보고서 모두 웃고 손가락질하며 이상한 여우라고 조롱하였다. 꼬리 있는 여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동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현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꼬리 없는 여우들이 판치고 있다. 그냥 판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꼬리 있는 사람을 비난하고 중상하고 한통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상에 열거한 것들은 이미 양심의 영역을 넘어서 법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것이지만, 법으로 양심을 강제하고 있는 영역까지도 쉽사리 침범할진대, 법 이전에 순수하게 양심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는 영역에 속하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 양심의 소리를 민감하게 들을 수 있고 그 소리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법이 끼어들 영역은 넓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의 건전한 기풍을 진작하기 위하여는 각자의 양심을 갈고 닦는 일이 喫緊(끽긴)하다.

양심에 관한 교육은 일찍 시작하여야 하고, 어쩌면 유아기부터, 아니 그 이전 태아 때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의 윤리 교육도 필요하지만 성경 같은, 金言(금언)寶庫(보고)라고 할 수 있는 책으로 하는 것도 중요하고 효과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三歲之習至于八十(3세지습지우팔십)’이라고 양심 교육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22. 불과 얼음

 

철학자들은 사람의 정신을 여러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성과 감성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양자가 각자에게 어느 비율로 배분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정설이 있을 수 없고,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서 어느 비율로 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의견이 다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차라리 정답이 있다면 그 정답대로 하기가 어려울지라도 그것을 목표로 나아갈 수가 있지만 아예 정답이라는 것이 없고 보면 매 상황에서 고심을 하게 되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어느 사람의 행동들을 상당 기간 관찰하여 그것들을 모아 보면 그의 대체적인 성향은 알 수 있다. 즉 아무개는 이성적이다, 또는 감성적이다 하는 정도의 가늠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향일 뿐 그것이 언제나 그에게 적용하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어느 때에는 예상 밖으로 감성적인 행동이나 결정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감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 뜻밖에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는 예가 허다하다.

문제는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대부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도 못할뿐더러 평판도 그리 좋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즉 너무 이성적이기만 하면 소위 피눈물도 없는사람처럼 인식되어 사람들이 그에게 접근하기를 꺼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반드시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결과가 빚어진다. 감성적이기만 한 경우도 마찬가지로서 매사에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고 감각적으로 결정한다면 그 순간으로는 기분파라고 좋은 점수를 딸지 모르지만 뒤에 후회할 일이 더 많다.

주위에는 정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냉철하고 원칙적인 사람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법이나 규칙의 잣대로써만 결정하려는 사람이다. 개개인의 매우 딱한 사정이라고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다. 공과 사를 정확하게 구분하며 물론 뇌물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다. 그래서 매우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없다. ‘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라는 말도 있듯이 바르게 행하지만 따르는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이 너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에게나 선심을 쓰고 날아가는 까마귀에게도 술 한 잔 하고 가라고 하는 사람이다. 눈물이 많고 감정이입을 곧잘 하는 사람이다. 계획성이 없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이고 변덕이 심하다. 내일 어떻게 되든 오늘 쓰고 싶은 데 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사람이 많이 따르지만 공적인 일을 맡기기에는 두렵다.

나는 자랄 때부터 이성과 감성의 적절한 화합이 이루어진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비율이 일반적으로 이성 대 감성이 7 3 정도 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세파를 떠나 깊은 산 속에서 독야청청하여 근처에만 가도 써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차디찬 이성이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벙덤벙 뛰어들다 그 뜨거움이 다른 사람에게 화상을 입히기도 하는 열정의 감성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학자나 예술가 가운데에는 이성이나 감성에 치우쳐서 대가가 된 예도 흔히 있지만, 그렇게 하여 그 부문에서 대가가 되지 못할지언정 차라리 양자가 적당히 섞여 있는 것에 나는 점수를 주고 싶다.

특히 나는 어쩌다가 법률가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것이 나의 본성에 그렇게 딱 들어맞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선친의 권유로 멋도 모른 채 법대로 진학하였고, 당시 법대생이라면 십중팔구는 모두 고시 공부를 하였고 또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기계적으로 법률을 공부하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감성적인 것이 깊이 자리하여 똬리를 틀고 있어서 수시로 고개를 치들곤 하였다. 또 더 어려서부터 대중가요에서부터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각종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었고 전람회를 쫓아다녔다. 그리고 수시로 시나 소설을 습작하였고 여러 군데 투고하기도 하며 단행본으로 몇 권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속담이 뜻하는 것처럼 법을 집행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눈물과는 상반되는 개념처럼 여겨진다. 눈물과는 먼 것처럼 여겨지는 곳에도 눈물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검사 시절에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기소유예를 활용하여 많은 피의자들에게 기소유예처분을 하였다. 초범이고 비교적 가벼운 죄를 저지른 사람이면 거의 기소유예를 하였고, 심지어 구속된 피의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법과 눈물, 다시 말하면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그 제도의 틈이라고 할 수 있는 기소유예제도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신문에서 불세출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였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다. 어려서 수학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바이올린을 켜고 나면 문제가 잘 풀렸고 그렇게 하여 수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결국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할 수 없는 이성이 작용하는 대표적인 부문인 과학과 무한한 자유의, 어떤 면에서는 방종이라고 할 수 있기까지 한 바다에서 제멋대로인 감성을 풀어 놓는 음악이 氷炭不相容(빙탄불상용)의 관계가 아니라 바이올린 소나타처럼 멋진 앙상블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기만 하였다. 그 뒤 더 놀란 것은 유명한 과학자일수록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것이었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반트호프와 로알드 호프만은 시인이었고, 생물학자 헤켈은 뛰어난 화가였으며,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하이젠베르크와 양자론의 개조인 막스 플랑크는 피아니스트였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파인먼은 봉고 연주가였다. 심지어는 수학자 네 명이 모이면 현악4중주단이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이성과 감성의 화합인가!

나는 악기 하나도 연주하지 못하는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지만 딴에는 혼자서 바이올린을 배우려고 낑낑거리며 교습서인 호만을 2권까지 했지만 바이올린이 아니라 깽깽이에서 그쳤다위의 사람들이 전공분야에서 대가인 것도 모자라 예능 분야에까지 탁월할 수 있었다는 데 대하여 정말 고개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평소의 생활에서 이성과 감성을 얼마나 적절하게 나타냈는지는 모르겠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양자가 적절한 비율로 표현된다면 하루하루를 매우 풍요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나는 나름대로 그 비율을 7 3으로 想定(상정)해 놓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물론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여태 살아오면서 그 비율이 삶을 정확하게 살면서도 윤기 있게, 조금은 어긋나기도 하면서, 때로는 약간 비틀거리면서 멋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7 3이란 숫자가 어떻게 나왔느냐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없고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이성적 동물인가, 감성적 동물인가,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아무래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이성에 좀 더 점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멋도 멋이지만 멋이라는 것도 일단 삶의 정확한 기초 위에 얹어져야 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성에 상당히 더 많은 점수를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서이다.

 

23.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세상

 

뉴스를 보면서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끊일 새 없이 일어나는 각종 의혹과 비리들에 관하여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치인이라든가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이 얼마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지 알 수 있다. 진실 게임이니, 양자 대질 또는 삼자 대질이니 하는 단어들이 이어지는 것도 어느 한 쪽이 거짓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인들 모두의 면면을 보면 결코 거짓을 말할 만한 사람도 아니고 지위나 경력도 아닌데 서로의 말이 상충하는 것을 보면 그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본의이건 아니건, 아마도 주로 본의일 테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서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 한 가지만이라도 완전히 없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우선 범죄나 비리가 드러나면 그 주동자를 쉽게 가릴 수 있다. 그것이 너무 쉽게 가려져서 흥미는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흥미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의 몫일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제도나 법이 아마 반쯤은 없어질 것이다. 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조직법과 행위법인데, 행위법의 대부분은 거짓을 막기 위하여 겹겹이 첩첩이 규정되어 있다. 범죄를 수사하는 데 있어서 복잡한 증거들을 수집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혐의자를 지목하고서도 그가 부인, 즉 거짓말을 할 경우에 대비하여 보충증거나 방증을 많이 수집하는 데 얼마나 많은 정력과 경비를 소요하고 있는가! 그러고서도 법정 공방이 이어지고, 1심에서 제3심에 이르기까지 판결이 번복에 번복을 거듭하기 일쑤이며, 판결이 확정되고 나서도 그 확정된 사실과 다른 秘話가 꽤 설득력 있게 항간을 돌아다닌다. 이렇듯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 세상을 지도하고 있다니 얼마나 넌센스인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없이 배우는 것이 정직이다. 어린 마음에 겁이 나서 얼떨결에 또는 장난삼아 거짓말을 하였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난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거짓말은 매우 나쁜 행위라는 것이 각인되었건만 어른이 되기 시작하면서 맨 먼저 배우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면 순진하다든지, 어리석다든지 따돌림을 당한다.

어느 어린이가 집에 있을 때 아버지를 찾는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귀찮은 전화인 줄 눈치채고 자기가 없다고 하라고 시늉을 하였다. 어린이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터라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인상을 쓰면서 큰 손짓으로 계속하여 전화를 끊으라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어린이는 참으로 답답하게도 그대로 엉거주춤 서 있기만 하였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전화를 받았다. 끊고 나서 그는 아이에게 호되게 야단을 쳤다. ‘아버지가 끊으라면 끊지 왜 끊지 못하고 있냐. 그런 정도의 거짓말도 못 해서 앞으로 어디에 써먹겠냐라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아이가 옳고 아버지가 그르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교육하는 어른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그른 방향으로 행동하는 어른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렇게 나쁜 어른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른이 아이를 가르칠 자격이 있는가?

어느 글에 의하면 어른이 하루에 거짓을 행하는 것이 200회나 된다고 한다. 그것을 풍자하기 위하여 영화 ‘liar liar’는 거짓말쟁이 변호사인 아버지가 아들과 하루만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벌이는 행각을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하필 직업이 변호사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좀은 야속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단지 영화일 뿐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말 어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고대 역사에서부터 보더라도 나라 사이의 일들에 있어서도 모략이니 전술이니 하는 것들의 상당 부분은 위장이거나 거짓으로 되어 있고, 특히 국가 간의 일에 있어서는 거짓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마키아벨리나 미국의 전 국무장관 덜레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설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것을 얼마나 교묘하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명장이나 名臣(명신)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는 거짓을 매우 악한 행위라고 규정한다. 잠언 616절 내지 19절에서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거짓된 혀와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이니라고 하고 있고, 요한 계시록 218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라고, 2215절에서는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축복] 밖에 있으리라고 되어 있다. 나는 처음에 이러한 구절들을 접했을 때 의아해하였다. 성경에서 거짓을 이토록 나쁜 것으로 定罪(정죄)하고 있다니, 거짓이 정말 그렇게 중한 죄인가? 성경을 좀 더 알고 나서야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하였다.

애초에 인간의 첫 조상이 에덴에서 뱀, 즉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서 금단의 열매를 따 먹게 되었고 그 결과 에덴에서 쫓겨나서 험난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고 종당에는 죽음까지 겪게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탄을 거짓의 아비’(요한복음 844)라고 부른다. 그 후 세상에 쫓겨난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사탄의 농간에 따라 거짓의 행습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모든 불행, 범죄, 전쟁, 죽음 등이 모두 사탄의 그 거짓된 행동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거짓이 얼마나 나쁜 행동인가 하는 것을 족히 알 수 있다. 또 이 세상이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한 거짓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여전히 생래적인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고, 따라서 그에 따라 정직성이 미덕임을 인정하는 마음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정직하지 못하더라도 이따금 별나게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표창하고 칭찬하는 최소한의 양심은 아직 살아 있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느 골퍼가 마지막 라운드의 마지막 홀에서 1점 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가 자기의 공이 풀에서 흔들렸음을 아무도 보지 않아 모르는데도 이를 자진 신고하였음이 화제가 되고 그의 정직성이 크게 평가되었을 때 그는 오히려 의외라는 듯 이렇게 말하였다. ‘무엇이 대단하단 말인가?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회삿돈을 횡령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그렇다. 현재는 정상적인 것이 이상하게 평가되고 이상한 것이 정상으로 평가되는, 이른바 가치전도의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세상 물을 먹지 않고 산다는 것은 목말라 죽을 일이지만 돈과 수고를 들여서라도 오염이 덜 된 물을 찾아 마실 필요는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정신건강, 나아가 육체적 건강에도 결국 도움이 될 일이다.

정말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한 명이라도 거짓을 행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꿈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화가 드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을 그린다라고 하였다. 드가의 힘을 빌려서라도 거짓말 없는 세상을 그려서 마음의 벽에 걸어 놓고 이따금 감상해 보는 것도 어떨까 싶다.

 

24. 크리스마스 有感

 

우리가 무심코 관습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고, 심지어는 해롭기까지 한 것도 적잖다. 그중 하나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기념하고 있는 크리스마스이다. 거의 모두가 이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알고 있고, 한국에서도 성탄절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에서도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성탄절이 성탄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성경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만 해도 약 40년간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이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생각해 왔다. 그러다가 성경을 배우면서 성경에는 예수의 생일을 전혀 알려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예수에 관한 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구약에만 해도 예수에 관한 예언이 300여 가지나 있고 신약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특히 4대 복음서는 예수의 말과 행적에 관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복음서 중에서는 예수의 생일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위인전기를 보면 항상 맨 처음에 그 위인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언급함으로써 시작되는데, 성경을 세속적으로 말하면 예수라는 위인의 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보면 예수가 몇 월 며칠에 태어났는지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태어난 해와 장소는 나와도 생일은 나오지 않는다. 여러 가지 간접적인 증거에 의하여 추리하면 오히려 10월 초순,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01일경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언제부터 어떻게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로 둔갑되었는가? 여기에는 교묘한 인위적 조작이 개재되어 있다. 우선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로 정해진 기원 350년 콘스탄티누스 3세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리스 문화를 이어받은 로마에서는 최고의 신 쥬피터를 정점으로 한 많은 신들이 숭배받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로마 시민으로부터 가장 추앙받고 있었던 신은 쥬피터가 아니라 태양의 신 아폴로였다. 태양은 그제나 이제나 경외의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무적 태양’(sol invictus)이라고 불린 것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이러한 태양이 연중 가장 약해지는 때가 낮이 가장 짧은 동지인데, 이날은 반면에 낮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여서 태양의 재탄생일이라고도 불리었다. 따라서 태양신 숭배자들로서는 이날을 기념할 만하였다.

다음에, 당시 로마 사회는 많은 이민족들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고 있었고, 농경사회였으므로 이민족들을 로마의 통치에 순응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 줄 필요가 있었다. 즉 그들은 농업신 사타르누스를 위한 축제를 12. 18.부터 12. 24.까지 가졌고 마지막 날에는 성대한 축제를 가졌다. 게다가 로마 전역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었고 머지않아 국교로 공포되기 얼마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일을 공식화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을 포섭할 필요도 있었다. 이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여러 가지 이유에서 12. 25.을 예수의 탄생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접목이었다. 이를 알고 보면 크리스마스는 실제로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이교 신들을 숭배하고 축하하는, 일신교인 그리스도교로서는 매우 가증스러운 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현재의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점을 설명해 주면 대부분 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게 뭐 대수냐하는 표정이다. 자신들의 숭배 대상인 예수의 생일이 조작되어 있고, 나아가서 이교 신들의 축하나 숭배와 관련되어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생일을 아무렇게나 정해서 축하해도 되겠는지를 물으면 그제야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그래도 그뿐 더 이상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에서 그토록 중요한 인물인 예수의 생일에 관하여 왜 알려 주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샅샅이 찾아보아도 생일을 기념하거나 축하하라는 말은 없다. 생일잔치를 연 기록은 단 두 건,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의 생일과 예수 시대의 왕 헤롯의 생일이다. 그 두 사람은 이교도들이었고 그 날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즉 파라오는 빵 굽는 시종장을 목매달았고(창세기 40:22), 헤롯은 침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다.(마태복음 14:10) 이것만 보더라도 하느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생일을 기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전도서(7:1, 2)에서는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고, 애도하는 집에 가는 것이 (생일) 연회를 벌이는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되어 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이 많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풍랑이 거세고 차디찬 바다에 던져지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을 苦輪之海(고륜지해)라고 일컫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고생스러운 일들이 바퀴 돌아가듯 잠시 사라졌다 또 다가오고 또 잠시 사라졌다 또 다가오기를 평생 되풀이하는 바다가 이 세상이다. 어떤 글에 보면 평생 즐거운 날은 도합 30일인 데 비하여, 평생 힘겨운 날은 매일 3시간 6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인생은 가시밭으로 뒤덮여 있는 험준한 고갯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뭐 그리 기쁜 일이며 축하할 만한 일인가!

여기서 유의할 점은 위 전도서의 필자가 인간으로서는 가장 행복한 삶을 보냈을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거의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재산, 권력, 쾌락, 지혜 등을 그중 하나 또는 둘이 아니라, 전부를 다 가졌고 양적인 면에서도 넘치도록 누렸던 사람이다. 바로 고대 이스라엘의 3대 왕인 솔로몬이다.

그는 왕으로서의 권세를 누렸고, 그의 치세 40년간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권세를 더욱 한껏 누릴 수 있었으며, 妃嬪(비빈)을 천 명이나 거느렸으며, 주위의 여러 나라들이 엄청난 조공을 바쳤고 수조 원 상당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잠언을 3천 수나 지을 정도로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이 만년에 쓴 것이 바로 전도서이다.

그는 전도서에서 벽두부터 지극히 헛되다. 지극히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해 아래서 열심히 일하는 그 모든 수고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1:2, 3)로 시작하여 도처에서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쫓아다니는 것이었다’(1:14; 2:11, 17, 19, 21, 23, 26)라며 장탄식을 거듭하고 있다. 평생 달동네에서 살다가 죽어 가는 사람의 말이라면 넋두리라고 넘겨버릴 만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榮華(영화)를 평생 누리다가 인생을 돌아보면서 술회한 현명한 왕의 말이다.

그러면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허무주의를 설파하려 함이었던가? 그것은 결론에서 밝혀진다. 맨 끝부분(12:13, 14)에서 그는 일의 결론은 이러하다. “참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 본연의 의무이다. 참 하느님께서는 모든 부류의 일을, 숨겨진 모든 것과 관련하여, 선한지 악한지 재판하실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히 여기고 행하여 온 것 중 예수의 생일이라고 하는 것과 생일의 축하에 관하여 생각하면서, 우리네 인생의 본질과 참된 인생행로까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25. 사람은 자기가 걷는 길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를 혼자 걷게 두는 엄마는 없다. 엄마는 아기가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넘어질세라 양팔을 벌리고 아기를 붙잡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얼른 붙잡지는 않고 제 힘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을 조마조마하며 주시한다. 그러다가 넘어지지 않고 엄마를 붙잡지 않은 채 한 발을 내디디면 기쁨이 얼굴 가득 넘친다. 그러는 엄마를 보고서 아기도 천진한 웃음을 웃는다. 그 웃음이 또 얼마나 이쁜지 엄마는 행복한 웃음을 또 웃는다. 그렇게 하여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고, 혼자서 몇 발자국을 걸어도 엄마는 아기가 쓰러지면 냉큼 붙잡으려는 태세로 앞에서 아기를 주시하며 뒷걸음질 친다.

그렇게 인생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생을 여로에 비유하는 것은 진부한 것이긴 하지만 참으로 적절하다. 여로 중에서도 특히 처음 가는 여행길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같은 직장을 오간다고 해도 언제 무슨 특별한 일이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또는 출퇴근 길에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산에 오르기도 하고 바다를, 강을 건너기도 하고 강도를 만나기도 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관광지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꿀맛 같은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심한 경우에는 불의의 사고로 죽기까지도 한다. 그러므로 여행을 할 때는 단체 여행을 하거나, 혼자 배낭여행을 할 때에도 충분한 준비를 하거나, 가이드를 따라가기도 한다. 그 가이드가 현지의 언어와 지리와 문화, 풍속, 음식 등에 대하여 꿰뚫고 있고 건장한 체격에다 정직성과 부드러움과 사랑마저 넉넉하게 갖추고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부모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많은 도움과 지침을 주지만 그 후로는 현저히 줄어들고, 대신 아이 스스로 여러 가지 지침과 도움을 구하여 나아가게 된다. ‘나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약 있다면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도움을 별로 받지 못한 사람이거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사람은 현재 인생에서 헤매고 있거나 실패한 사람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인 것일까? 사실 사람은 크게 보면 도토리 키 재기이다. 모두가 너무 불완전하기 때문에, 과연 다른 사람에게 확실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도움을 많이 주는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하여는 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마련이지 않는가? 도움을 주는 사람의 베풂도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그래서 일찍이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사람의 길은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걷는 자에게 있지 않다’(10:23)라고 말하였다.

인간이 인간 역사 6천 년 동안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겪으면서 오늘날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참다운 행복의 길은 찾지 못하고 있다. 이것에 대하여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세계적인 석학들도 입을 모아 동의하고 있다.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은 인간은 지상에서 사회의 기존 질서의 위기와 붕괴를 거의 끊임없이 겪어 왔다고 인간 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였다. 즉 앞으로도 위기와 붕괴를 계속할 것이라는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는 인간 문명과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은 죽었다고 설파하였으며, 슬픈 열대의 저자 레비 스트로스는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요컨대 인간이 스스로 세상을 통치하여 왔으나 문제는 끊임없이 양산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 악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온갖 제도를 총동원하여 실험하여 보았으나 이것이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과학 등의 분야에서 눈부시게 발전해 온 듯이 보여도 정작 모든 인간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참다운 행복의 길은 우리가 다가가는 만큼 더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 치고 있다. 세계 각 국민의 행복지수의 통계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아이()니하다. 소위 선진국이며 경제대국이라고 하는 나라일수록 그 지수가 후순위에 처져 있다. 무엇이 선진이라는 것인가? 단지 물질이나 문명의 측면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이나 문명의 발달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나 영적인 면에서 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질이나 문명의 발달에서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바 만성 기아만 양산할 뿐이다.

그렇다. 지금이라도 인간은 영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 치중하여야 한다. 그중에서도 인간 본원의 고향인 영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 어머니치고서 아기를 낳은 직후 이제 내 임무는 끝났다. 너는 기어나가서 도랑에 처박히든가, 시궁창에 빠지든가, 차에 받히든가 나는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하라고 아기를 내팽개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머니보다 더 사랑이 많고 지식과 능력이 더 많은 하느님이 인간을 내팽개치실 리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사랑 많은 아버지 하느님은 성경을 주셨다. 첫 조상이 범죄를 저질러 불완전하게 된 후 그나마 성경을 통하여 바른 길로 나아가라는 뜻으로 주신 것이다.

즉 예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이라는 산상수훈에서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자는 행복하다’(마태복음 5:3)라고 말하였다. 행복의 길 9가지를 말하기 시작하는 첫머리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어떤 번역판에서는 이 부분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라고 했고, 이것을 혹자는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해석하면서 물질주의를 배척하는 근거로 삼았지만, 예수의 본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영적인 것이란 하느님이 계신가?’, ‘사람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며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는가?’, ‘참다운 행복의 근원은 무엇인가?’ 등등의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의 말은 영적인 부면을 끊임없이 갈구하면서 영적인 허기를 채워 나간다면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이 제시한 참된 행복의 길을 찾게 된다는 의미이다.

정말, 인생의 길은 걷는 자기에게 있지 않다. 최상의 가이드인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데 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

 

26. 誘惑魔力(유혹의 마력)

 

전직 고위 관리가 골프장에서 캐디를 성추행하였다는 뉴스가 화제이다. 어떤 형태의 성추행을 어느 정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내용보다도 그러한 신분의 사람이 그 신분에 걸맞지 않은 언행으로 만년에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또 어떤 고관은 점심 식사 시에 반주의 기운에 편승하여 말을 함부로 하여 그 비밀스러운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는 바람에 그 좋은 자리를 내놓은 것은 물론 구속까지 당하는가 하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절호의 기회를 무산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몇천만 원의 유혹에 넘어가서 이를 받는 바람에 뒤에 들통이 나서 구속되는 경우도 있다. 위에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비교적 승승장구하였고 장래를 더 기약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고위직에 오른다는 것은 단지 그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행운과 시기가 동시에 절묘하게 작용해 주어야 하고, 게다가 그것이 여러 차례 거듭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좁은 구멍을 잘 비집고 들어가서 일단 그 자리에 오르면 만인이 부러워할 정도로 권세와 재산과 명예 등이 눈부시게 증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자리는 발가벗는 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요즈음처럼 매스컴이나 인터넷이 발달해 있는 세상에서는 전자민주주의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이름 없는 길가의 잡초 같은 서민들까지도 그들의 행태를 다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들이 어떻게 숨 쉬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 알고 있다. 때로는 사실이 왜곡되어 사건화되어 입에서 입으로, 一派萬波(일파만파)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일단 파장이 일어나고 나면 뒤에 사실이 바로잡히더라도 이미 당한 망신을 온전히 씻기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보도 카메라는 이런 경우 好材(호재)를 만난 것이라, 신이 나서 그들이 가장 창피스러워할 만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찍어댄다. 일종의 악취미의 발로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공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넘어간다.

특히 그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하여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국회의원이 되거나 장관이 된 다음 계속하여 다음의 더 나은 顯職(현직)을 노리거나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수뢰죄로 구속되는 장면을 볼 때, 그가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그 굉음을 직접 듣는 느낌이다. 나의 귓전에까지 그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고 귓바퀴를 흔든다. 그 죄의 내용을 보면 불과 기천만 원을 수뢰한 것이다. 그것을 수뢰하고서 과연 단잠을 잘 수 있었을까? 속담에 깨끗한 양심은 편안한 베개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마도 잠을 설치기를 몇 날 몇 밤, 아니 몇 달 몇 년을 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워낙 강심장이라 편히 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애초 그런 강심장이었기에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전도서 512절에 부자는 가진 것이 많아 잠들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돈이란 하얀 돈일지라도 단지 많은 것만으로 잠을 편히 자기 어렵다는 것인데 하물며 검은 돈이라면 밤마다 악몽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말하면 기천만 원과 그의 전 인생을 맞바꾼 것이다. 그것도 추징을 당하여 수뢰액만큼 게워내는 경우는 발가벗은 몸에 치부조차 못 가린 꼴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그런 일이 밥 먹듯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아마 또 앞으로도 계속하여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설마 들통이 나겠느냐고 생각하였다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오래 묵은 속담을 무시한 것인지 모른다. 현재의 과학수사체제와 방범체제, 그리고 모든 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전자기기 등을 생각하면 문자 그대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매스컴에 그런 뉴스가 끊임없이 보도되는 것은 일종의 경고이다. 계속되는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혹시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은 원래 바라는 바를 믿는 경향이 있어서, 수뢰한 사람이 100% 모두 발각되는 것은 아니며 발각되는 사람이 비율로 보면 극히 미미하다는 점이 머리를 스치면서 자기는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믿음으로 굳어져 버릴 수도 있다. 일종의 맹신이려니. 그러나 연일 보도되는 수뢰 뉴스는 그 믿음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설마 들통이 나겠느냐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당장의 황금빛 유혹에 눈이 가려져 앞날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햇빛 속으로 나가면 눈을 잘못 뜨고, 심지어는 시력을 잃는 경우도 있듯이, 눈부신 황금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순간 시력을 잃은 것이다. 상대방이 황금을 꺼내려고 할 때 눈을 감거나 적어도 시선을 비스듬하게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황금의 마력은 고혹적인 미녀의 裸身(나신) 같아서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성추행으로 망신을 당하는 고관대작도 비슷한 메커니즘[機制(기제)]일 것이다. 황금에 못지않은 ()의 마력은 안목의 정욕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화려한 그의 경력에 마치 똥물이 튀긴 것처럼 추접스럽게 되는 길로 노예 같이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도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여 다니고, 얼굴을 가리며, 검찰청의 비상구로 다니거나, 출석 예정 시간을 변경하여 기습적으로 출석하는 등 또 하나의 어쭙잖은 행동을 하고 있다. 욕심에 가려져 있던 양심이 그제야 살아난 것이다. 진작 그 양심이 성능 좋은 CCTV처럼 자신을 잘 비추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솔로몬은 일찍이 죽은 파리가 좋은 향유에서 악취가 나고 거품이 일게 하듯, 조그만 어리석음도 지혜와 영광을 망친다라고 경고하였다.(전도서 10:1) 우리네 인간들은 수많은 좋은 말씀과 경고를 수없이 듣고 보면서도 왜 이렇게 끝없이 잘못을 거듭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어리석기 때문일까? 만물의 영장이며 달에까지 갔다 오는 사람들이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처럼 발 앞에 있는 시궁창을 보지 못하고 빠지고 있다.

 

27.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泰山鴻毛(태산홍모)란 말이 있다. 죽음은 태산처럼 무거운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터럭 한 올처럼 가벼운 것이라는 말이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에서 우리는 죽음이란 의미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을 느낄 수 있다. 큰 재난은 물론 작은 사고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라도 구조해 보려는 인간의 노력은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런가 하면 자연재해나 전쟁에서, 테러에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목숨이 버러지만도 못하다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지진, 전쟁, 테러, 홍수, 안전사고 등으로 인하여 한꺼번에 수백 명 내지 수십만 명이 죽임을 당한 소식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듣고 있는 경우,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숙연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아포리아인가? 수많은 사상가나 철학자들이 저마다 죽음에 관하여 천착하였건만 아직도 그것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은 사람이 없다. 한편으로 죽음의 본질 내지 의미를 파악한다 하더라도 죽음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이후 최고의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비트겐슈타인은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됨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두 번의 세계 대전에 지원했고, ‘남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는 일단 죽음을 초월하면 비록 혼돈 속에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파스칼은 인간은 죽음으로 인하여 혼자 조용히 있으면 더욱 견딜 수 없는 공포와 허무를 의식하게 되므로 이런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의식을 문제로부터 放心(방심)하는 수단을 고안하여, 방 안에 혼자 앉아 쉬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권력 투쟁을 벌이거나, 무엇인가에 대한 광적인 탐욕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화려한 의상, 훈장, 이상한 의복들을 걸치는 헛된 행동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죽음을 지독히도 의식하고 있다. 죽음을 전혀 겁내지 않는다거나 의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실상은 죽음을 더 의식하며 두려워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죽음의 원인과 극복책에 대하여 유사 이래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터무니없는 신화나 전설, 이야기, 종교 등에서 죽음의 정체를 그저 아무렇게나 끌어들이고 있을 뿐이다.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어, 인간이 달에 갔다 오기도 하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SNS 1세기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죽음의 원인은 여전히 五里霧中(오리무중)이다. 그것을 밝히기 위하여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음에도 그 조그만 단서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텔로미어와 텔로머라제라는 효소가 흥미를 끌고 있을 뿐이다. 텔로미어(telomere)는 염색체의 말단에 반복적으로 존재하는 유전물질의 특이한 형태로, 終末體(종말체)라고도 한다. 텔로미어는 세포가 한 번 분열할 때마다 그 길이가 조금씩 짧아지며, 세포분열이 일정한 횟수를 넘어서면 텔로미어가 아주 짧아지고 그 세포는 분열을 멈추고 죽게 된다. 이는 늙거나 손상된 세포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살하는 이른바 세포소멸이라고 불리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텔로미어를 생명시계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세포가 늙어도 텔로미어가 짧아지지 않으면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암세포의 경우 텔로머라제(telomerase)’라는 효소가 분비되면서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것을 막기 때문에 암세포가 죽지 않고 계속 증식하게 된다. 이 점을 유추하면 텔로머라제를 사용하여 텔로미어가 짧아지지 않도록 한다면 죽음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그 간단한 이론이 실제로 실용화된 적은 없다. 그 이론이 맞다 하더라도 텔로미어가 세포 분열에 따라 왜 짧아지는지를 모른다면 여전히 죽음의 원인은 어둠 속에 있는 셈이다. 또 텔로머라제를 사용하여 설령 텔로미어를 짧아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예상외의 어떤 부작용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쩌면 인간이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환 수술을 극단적으로 행하여 남녀의 性比(성비)를 깨뜨린다든가, 인간 복제가 진짜 인간의 수준까지 행해진다든지 해서 자연의 근본적인 질서를 깨뜨린다면 필시 자연 자체에서 오는 재앙이 뒤따를 것을 우려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유기물이나 무기물 할 것 없이 인공적으로 그것을 만들 수 없는 점을 감안하면 그 우려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길가에 돋아 있는 이름 없는 풀잎 하나도 만들 수 없고, 흙 한 알갱이인들 만들 수 있겠는가? 흙 한 점에 들어 있다는 95가지의 원소를 인간이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마침표만 한 크기의 엽록체 안에 40만 개의 엽록소가 들어 있고 그 안에서 많은 공장들이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있다는데,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신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애써 신을 부정하면서 인간적으로 규명하려고 해 온 역사는 실패의 연속일 뿐이다. 이제 그 똥고집을 버리고 창조주를 전제로 죽음의 문제를 규명해 보자. 유사 이래로 만물의 기원에 대하여 창조인가, 진화 즉 저절로 생겨났는가 하는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왔다. 후자의 견해에 따르면 신묘막측한 만물의 기원을 알 수 없고, 인간의 죽음의 원인도 알 수 없지만 전자의 견해에 따르면 창조주의 책을 통하여 그것을 의문의 여지 없이 알 수 있다.

창조주에 관한 가장 보편적이고 오래된 책으로서는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이다. 그것을 경전으로 하는 종교를 믿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 책에서 죽음의 원인에 관하여 밝힌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생각하게 한다. 창조주가 지구와 모든 무생물과 생물을 창조하였고 나아가 인간을 창조한 것을 일단 전제로 한다면, 창조주는 인간을 맨 마지막에 창조한 것이라는 성경의 구절(창세기 1)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물 중에서도 인간을 특히 뛰어나게 창조하였다. 그러면 인간에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죽게 되었는지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에 대하여도 답을 알려 주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이치적이다.

성경에 의하면, 주지하다시피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꾐에 넘어가서 하느님이 못 먹게 한 과일을 먹음으로써 죽음의 벌을 받게 된 것이다. 창세기 216절과 1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만족할 만큼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먹은 후, 창세기 319절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것이며 결국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가 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죽음의 원인에 대하여 이처럼 간명하게 밝히고 있는 책은 성경 외에 없다. 인간의 창조에 관하여서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경우에 있어서도 난삽하고 장황하게 과학적 원인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두 구절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한 많은 것을 추리할 수 있다. 그중에서 한 가지만 말하자면 첫 조상의 벌로서 징역형이나 벌금형이 아닌 사형이 선고된 것이다. 여기에서 금지된 과일을 먹은 것에 비하여 벌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 하는 으레 따르는 의문은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하필이면 죽음이라는 형벌이 주어졌느냐 하는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런데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죽음이 범죄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유전되었다는 점이다. 로마서 512절에서 알려 주는 것처럼 첫 조상의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유전된 것이다. 따라서 첫 조상에 대한 벌이 징역형이나 벌금형으로서 후손에게까지 유전되었다면, 후손들이 무슨 생각을 할 것이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수년간 반드시 치러야 할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대비하여 몸만들기를 하든가, 재산을 최대한 모으는 데 주력하지 않았을까? 징역형이라면 마치 의무적으로 군대 생활을 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며, 벌금형이라면 세금을 내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것들과 관련하여 창조주를 생각할 여지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경우는 전혀 딴판이다.

수시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중병에 걸리거나 중상을 입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느낄 것이며,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접하여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새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더 원초적으로 사람이 왜 태어났으며, 왜 사는가, 왜 죽으며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참다운 행복의 길은 무엇인가, 등등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성찰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인간 내지 만물의 근원인 창조주에 생각이 미치고, 죽음이 끝인지, 부활이라는 것이 가능한지, 생명의 원천인 분이 부활을 시킬 수 있을 것인지까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죽음이라는 형벌이 부과된 것은 인간이 한계상황에 봉착하면서 창조주를 생각하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절묘한 마련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쯤 되면 첫 조상에 대한 벌로서 죽음을 마련한 것은 단지 벌의 의미가 아니라, 후손들에게 창조주로 돌아오게 하는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허버트 스펜서가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한 것처럼 죽음을 계기로 하여 신을 찾고 종교를 만들고 신앙을 갖고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많은 학설들 중에서도 공포설을 비롯한 몇몇 학설들도 죽음과 종교를 연관시킨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원인이 대단히 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죽음을 통하여 창조주에게로 인도된다. 물론 죽음 외에 어떤 바람이나 간절한 희원을 위하여 하느님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죽음과 관련하여 창조주를 찾는 것만큼 절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죽음의 원인이 원죄라면 원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마련, 소위 代贖(대속)이라는 절묘한 마련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성경이 매우 논리적이고 이치적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도 성경의 기록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 할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죽음의 원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라고 한다면 그것을 전제로 하여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모두 풀리게 된다는 점에서 엄청난 축복의 길이 열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28.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특권성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한갓 버러지와 다를 바가 없는 점에서 동물보다 더 나은 게 없다고도 한다. 유명한 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인간에게도 결말이 있고 짐승에게도 결말이 있으니, 모두 같은 결말을 맞는다. 짐승이 죽듯이 인간도 죽으니, 그들 모두에게는 한 가지 영만 있다. 그러니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하였다.(3:19)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죽음만 제외하고는 인간과 동물은 다른 점이 너무 많다. 시쳇말로 비교하는 것이 실례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나 기타 전문적인 관점을 제외하고서라도, 인간은 우선 아놀드 겔렌이 지적한 바와 같이 문화, 언어 그리고 기술이라는 크나큰 3대 장점을 누리거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인간 외의 어느 동물도 그것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면서, 인간의 생존이 아니라 생활을 지탱시키는 큰 요소이기도 하다. 3가지가 없는 인간 생활을 상상해 보라. 바로 일반 동물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 외에도 인간만이 누리는 特長(특장)들이 많이 있다. 꼿꼿이 서서 다니며 맨 위에 머리가 위치하여 하늘을 비롯하여 멀리 내다볼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생물이 150만 종이 있다고 한다. 세분하면, 곤충류가 100만 종, 조류가 9천 종, 민물고기가 8,400, 바닷고기가 13,300, 식물이 35만 종 등이다. 이 중에서 인종만이 유일하게 서서 다닌다. 그 꼭대기에 머리가 있어 높은 지능을 구사하며 이성적으로 사고한다. 사실 서서 다니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높은 지능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위에 언급한 문화, 언어, 기술의 3가지도 지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서서 다니는 것은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여 지능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좌우의 손을 많이 쓰는 것이 지능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 아니던가? 한국인이 식생활에서 젓가락을 사용하고, 아기가 두 손으로 잼잼하며 노는 것이 지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하며, 왼손을 많이 사용하면 우뇌를 활성화시켜 감성적 영역을 자극하므로 감성을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또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양심이 있다. 후천적 도덕 교육이 없더라도 인간은 천부적인 도덕 감각을 지닌다는 것이 인류학적 연구 결과이다. 이것은 일찍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로마서에서 그들은 율법의 내용이 자기들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양심이 그들과 함께 증언하여 그들의 생각이 그들 자신을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합니다.”(2:15)라고 하고 있다. 즉 양심은 자신에 대하여 입법적 기능과 사법적 기능을 맡고 있다. 만일 인간에게 양심이 없다면 후천적인 도덕 교육만으로 세상을 꾸려 가야 되는데 그것은 쉽지 않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도덕 교육 자체가 양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양심을 일깨우며 양심을 鍊鍛(연단)시키는 것인데 도덕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뛰어난 기억력을 들 수 있겠다. 기억력은 심리학적으로 지능의 범주에 드는 것들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정신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기억력을 전제로 하지 않은 학습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학습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되풀이하여도 그 내용을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면 문화를 펼쳐 나가는 데 무엇을 사용할 수 있을까? 배우는 족족 잊어버린다면 마치 치매 환자처럼 아무것도 진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레이건이나 대처처럼 뛰어난 정치가나, 예술가 또는 석학이라도 치매에 걸리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에 빠지는 것을 우리가 종종 보고 있지 않는가?

끝으로 인간은 숭배심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껭은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누군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제4의 본능이라고 하였듯이, 모든 인간은 종교심을 갖고 있다. 그것이 각자의 머리나 가슴 밑바닥에 매장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로 건드려지면 유전에서 석유가 치솟듯이 솟아오른다. 종교심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많이 매장되어 있느냐에 관계없이 試錐機(시추기)가 정확하게 찔러 주면 놀랍게 분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에게만 왜 이런 여러 가지의 특성이나 特長(특장)이 있을까? 생명체가 생겨나기 시작한 이래 수억 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우연히 인종이라는 것에만 그런 여러 가지 특성이 생성된 것일까? 우연이라면 그 여러 가지 중에서 몇 가지 또는 한 가지만이라도 다른 생명체에도 생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문화를 누리는 능력은 사자에게,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은 호랑이에게, 기술을 개발 발전시키는 능력은 난초에게……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한 가지라도 다른 생명체에서 발견할 수 없다. 오로지 인종에게만 위에서 말한 매우 값진 특장들이 소롯이 담겨 있다. 그것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그것은 어떤 牽强附會(견강부회)를 동원하여도 우연설로는 풀 수 없다. 여기에서도 다시금 창조주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 126절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를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기어 다니는 동물을 다스리게 하자’.”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 맞다면 당연히 하느님이 주었다는 성경의 맨 앞에 인간을 창조한 이유 내지 목적을 명시하여야 할 터인데 정말 그렇다. 여기에서 인간이 이 땅에 생겨 살게 된 목적이 나타나 있다. 즉 그 목적은 인간이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사자나 코끼리 같은 맹수나 힘센 동물을 다스리려면 그들보다 힘이 훨씬 더 세거나 아니면 지능이 높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만이 뛰어나게 창조되어 있다. 맹수들도 굶주리거나 자기의 새끼를 건드리거나 자기가 직접 공격을 당하지 않는 한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은 동물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 동물을 다스릴 때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인종만의 특장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즉 다른 동식물들과는 다르게 살도록 장치된 것이다. 문화, 언어, 기술, 기억력, 양심, 직립 보행 등을 통하여 인생을 풍요롭게, 질서 있게, 즐겁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숭배심이다. 모든 인간에게 숭배심이 선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는 그 자체에서 인간은 그 숭배심을 사용하여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살라는 취지임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단지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한 것이라면 창조주가 그것을 왜 모든 사람에게 내장해 두었을까? 할 일이 없어서? 장난기에서? 시험 삼아? 실수로? 창조주의 특성에 비추어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참된 행복을 위하여서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할 말을 찾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으로, 남자로, 그리스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라고 하였고, 동양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人生三樂(인생삼락)이라는 사자성어까지 있다. 인간은 언급된 어마어마한 특장들을 깊이 인식하여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깊이 감사하고 그 감사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행동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특장 중의 하나인 숭배심을 십분 발휘하여 창조주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고 뭣이겠는가?

 

29. 진리를 감사함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이사한 집의 부근에 교회가 있었다. 그때는 교회를 보통 예배당이라고 하였다. 새벽마다 그 예배당에서 종을 쳤다. 어쩌다 새벽에 잠이 깼을 때 들려오는 종소리는 어린 나이지만 여러 가지의 상념에 젖게 하였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정도밖에 모르는 나에게 하느님을 생각하게 해 주는 종소리는 일찌감치 나의 속에서 종교심을 길어 내었다. 하느님이라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일까? 하느님과 사람이 어떤 관계일까?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이 갖고 다니는 검고 두터운 표지의 성경은 책 등의 반대쪽이 한결같이 붉은 빛으로 되어 있었다. 그 무렵에 외관이 그렇게 된 책은 성경이 유일하였기에 어린이에게는 더욱 호기심을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교인들이 그 묵직한 성경과 찬송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을 보기만 해도 보통 사람과 좀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좀은 존경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우연히 성경 중 마태복음만 낱권으로 되어 있는 책을 입수하게 되었는데, 나는 득달같이 그 책을 펴서 맨 첫 장을 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끝없이 이어지는 족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는 아이로서는 그 족보의 행렬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읽기를 중단하였다. 그토록 선망하였던 책이 기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는 세계사를 통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겉핥기는 한 상태이어서 성경의 중요성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다시 그 성경을 꺼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첫 페이지를 꾹 참고 읽었는데 전체가 족보의 기술이었다. 나는 다시 책을 덮었다.

내가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20여 년이 지나서였다. 성경은 보기만 해도 중압감을 주었다. 우선 2천 페이지가량이나 되는 두께에 질렸고, 활자도 작았으며 2단으로 되어 있고 삽화 한 컷도 없었다. 아무 데나 펴서 눈길 가는 데로 두어 줄 읽어 보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일견 정말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책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계의 정치, 군사, 문화의 역사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와 더불어 언젠가는 한 번이라도 읽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 마흔이 가까운 어느 날 다른 많은 책을 읽은 끝에 미루고 미루던 성경 읽기에 착수하였다.

주로 문학적 관점에서 읽었는데, 우선 가장 놀라운 것은 무수한 비유와 상징이 종횡무진으로 널려 있는 등 뛰어난 문학성에 놀랐다. 붉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는데 성경 전체가 불그스레할 정도였다. 아무런 종교적 선입관 없이 무신론적 입장에서 읽었는데도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주장이 꽤나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문학상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들이 성경 앞에서는 까마득하게 아래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성경은 사람이 쓸래야 쓸 수 없는 것인데 과연 누가 쓴 것인가?

그때부터 성경에 대한 조사와 탐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교파를 초월하여 성경 구절에 대한 가장 이치적인,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하여 앞뒤가 전혀 모순이 없는 해석을 하도록 애썼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의 마지막 구절에서 모든 탁월한 것은 드물고 어렵다라고 갈파하였고, 키에르케고르도 진리는 소수자에게 있다라고 한 것처럼 교파의 신도의 숫자와는 관계없이 어느 교단의 성경 해석이 가장 합리적인가에 초점을 두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그의 학설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구는 돈다고 하였듯이, 사실 진리란 그것을 믿는 사람의 유무나 多寡(다과)에 무관하다. 예수의 말이 진리라면 예수 시대에 대다수가 예수를 반대한 것만 보더라도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의 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입증된다.

어쨌든 오랜 탐구 과정을 거쳐 성경을, 그것도 거의 전체를 수미상관, 일맥상통, 전혀 모순 없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매장지를 알 수 없고 매장 기술과 장비가 없는 자가 무진장의 노다지를 발견하여 발굴한 것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이따금 돌아보건대, 그 노다지가 내 것이 되다니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하는 기분으로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서 빙긋이 미소를 짓곤 한다. 예수 시대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그 이후에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온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으나, 내로라할 만한 뛰어난 철학자나 사상가 등 석학들도 잘못 해석하고 이해한 성경을 내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뭐라고 형용할 수 있으랴!

하버드 대학교의 롤린즈 교수는 70대인데도 26세에 요절한 시인 키이츠를 평생 연구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키이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경의 전체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만족스러워할 만한 것인가! 어려서부터 알고 싶어 했던 성경, 세계사를 보면서 더욱 알고 싶어 했던 성경, 문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더더욱 알고 싶어 했던 성경,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이해한 내용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낙관적인 장래에 대하여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고, 더욱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이자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정확한 이해에 따라 느껴지는 중요한 한 가지 점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조차 본질적인 점들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또는 아버지나 선대가 교직자인 가정에서 자라나거나 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는 곳에서 성장한 명사들도 전통적인 성경의 이해에 그저 맹목적으로 따랐고, 이따금 번뜩 의문을 표시하다가도 더 이상 천착해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보면, 비단 성경의 분야에서만 아니라 우리가 전래적으로 지켜 오거나 알아 온 것들 중에는 재검토해야 할 것들도 상당히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출애굽기 232절의 말처럼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는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단지 숫자뿐 아니라,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절호의 기회를 놓친 사람의 경우 뒤를 돌아보면 그러한 기회를 한 번만 놓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놓친 예가 많다. 그 여러 차례의 기회가 지나가고 있는 중 단 한 번만이라도 그것을 감지하고 낚아챘더라면 인생이 판이하게 달라졌을 텐데, 마치 일부러 그 기회들을 피하기라도 한 양 신기하게도 그 모두의 기회를 다 놓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쳐 지나가던 기회를 순간 낚아챔으로써 신세계로의 여행에 등정하게 된 것이다. 그 감사함과 만족스러움과 행복감은 어떻게 표현하려야 할 수 없다.

 

30. 세상 지식의 허구성

 

취학 전에는 아버지가 만물박사였다. 취학 후에는 아버지를 제치고 선생님이 만물박사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어른이 되면서 선생님도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 후로는 아무도 그 자리에 오를 사람이 없었다. 그 언저리에서 맴돌 수 있는 사람은 몇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몇 사람은 물러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소위 석학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말은 권위를 달고 다녔다. 자주 인용되면서 권위의 무게를 더해가기도 하였다. 그러다 새로운 실험결과나 이론이 등장하면서 그 권위가 실추되기도 한다. 태산같이 믿고 있던 이론이 깨어질 때 그 소리는 요란하다. 그 이론이 유력한 반대설에 의하여 대치될 때 그 이론 자체의 퇴장은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에 연관된 다른 이론, 심지어 일반적인 이론까지도 불신하게 되는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일은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비일비재한 것이지만, 절대 불변의 진리이어야 할 자연과학의 분야에서조차 심심찮게 일어남으로써 세인들을 경악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동설이다.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에 의하여도 그 단초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제대로의 주장을 한 것은 니콜라이 코페르니쿠스이다. 그래서 종전의 이론을 뒤집고 그것과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라고까지 한다. 그 후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하여 더욱 굳게 입증된 바이지만, 사실이 하나이어야 할 자연과학 분야에서 종전의 지식이 깨어질 때 지식 전반에 관한 불신이 자란다. 자연과학이 덜 발전한 근대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이 달에 갔다 오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의 등장 등 과학과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있다면 과연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의 발달한 과학 때문에 과거의 과학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는지 모른다.

기하학의 가장 기초 이론인 같은 평면 위에 있는 둘 이상의 평행한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라는 것도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하여 깨어졌고, ‘광속의 공간에서는 시간이 정지될 수도 있다는 특별상대성원리와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이론 등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바가 지식이라고 하기보다는 단지 상식의 선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과학이 계속하여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면도 있다 하겠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면에서도 극과 극의 다른 견해가 있음은 심히 놀랄 만하다. 이것은 과학의 발달과는 별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수많은 신학자들이나 내로라할 만한 석학들, 특히 신구교의 토양 위에서 자란 사상가나 문학가 그리고 미술가 등이 성경에 관하여 해석을 판이하게 하고 있다는 것은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성경이 만약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정확한 하나의 해석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엉터리이어서 하느님을 왜곡하는 것이 되어 그 심각성이 보통이 아니다.

루벤스는 낙원의 정원에서 선악과를 사과라고 하였고, 밀튼도 실락원에서 이를 따랐으며, 목사의 가정에서 자란 니이체는 아예 하느님은 죽었다고 극언까지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잘못을 태연히 자행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이었다. 천국이 어디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지만 하늘 어디엔가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것뿐이다. 천국에서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인지, 천국이 어떠한지, 그러면 이 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언급이 없다. 한층 가관인 것은 있지도 않은 지옥을 설정하여 겁을 주고 있는 교직자들에게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동조하고 그림이든 소설이든 연극이든 작품에서 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창조주로서의 하느님과 그 아들인 예수가 같은 인물이라고까지 하고 있는 데서는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소박한 상식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것을 부정하면 성경은 심오하기 때문에 상식으로써 해석하여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물론 지식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긴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치에 반한다는 것과 이해하기 어렵다또는 이해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궤변이며 낭설이며 쉽게 말하면 말도 아니다라는 것이지만, 후자는 이론이 너무 심오하여 凡人(범인)으로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는 것은 그것이 동일한 인격체의 변형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한 어불성설이고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그렇게 오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알게 되면 그들에게 전적인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사실 성경을 일반 평민이 소지하거나 평민의 언어로 된 번역판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고, 그나마 성경의 해석은 성직자에게만 주로 달려 있었다. 평민이 성경에 이의를 단다는 것은 파문을 각오해야 하거나 이단의 멍에를 감수해야 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민으로서는 읽어 가다가 전통적인 해석에 의문이 생기더라도 그냥 넘기거나, 조금 탐구해 들어가다가도 참고자료도 별로 없는 데다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쓸데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을 것이다.

일례로, 소위 삼위일체에 관하여 아이작 뉴턴은 이를 부인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당대의 분위기를 염려하여 이를 겉으로 주장하지 못하였고, 사후에 발견된 글에서 비로소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당대의 유명한 윌리엄 휘스턴의 삼위일체 부정론에 대하여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향력이 매우 큰 사람의 주장은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라면 대단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 폐해가 심대하다. 그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알게 모르게 일어난다.

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벤자민 스포크 박사의 육아전서가 있었다. 당시로는 성경 다음에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하였다. 나도 그것을 사서 첫 아이의 양육에 많은 점들을 참고하였는데, 그중 뼈아픈 기억의 하나는 아기가 울더라도 다른 방에서 재우고 밤에 혼자 울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식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워낙 전문가의 이론이라는 것이어서 반신반의하며 그것을 채택하였다. 때때로 아기가 옆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매정하게도 외면하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로부터 약 35년 지나서 신문에 실린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스포크가 자기의 주장을 바꾸며 사과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위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미 엎지른 물이 마르고도 말라 그 흔적조차 지워지고 없는 때였다. 그 주장대로 아이를 키워서 결과가 어땠는지 그 인과관계를 측정할 길이 없지만 매우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주장하였다가 뒤에 취소하면 끝인가? 그로 인하여 만약 손해를 입었다면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이렇게 세상을 풍미하는 유명한 사람의 주장이나 세상의 지식이라는 것은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31. 성경과 君臣 關係(군신 관계)

 

43경을 읽어 보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2500년 내지 3천 년 전의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에는 왜 이런 명언을 하는 사람이 없을까 생각한다. 학문과 사색이 깊은 선비가 위엄 있으면서도 사납지는 않은[威而不猛(위이불맹)] 기색으로 한 말씀 하면 그것이 곧 천하의 규칙이 되고[言而勢爲天下則(언이세위천하칙)],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言而民莫不信(언이민막불신)]. 그런가 하면 성경은 또 다른 풍미를 풍기며 명언을 발한다. 아주 일상적인 단어와 비유로써 서민적으로 자상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깊이는 어떤 말에도 뒤지지 않는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무릎에 멍이 들 정도라고 다소 호들갑스럽게 과장하여 말하곤 한다. 너무 기막힌 말씀들의 연속이라 옳거니 하고 무릎을 자주 치다 보니 멍이 들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자의 차이가 많지만, 내가 한 가지 지적하자면 43경에는 국가 안에서 군주와 백성이나 신하의 본분에 대한 행동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은 데 반하여, 성경에서는 그에 관하여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성경이 형성된 지역이 엄연히 국가가 있었던 사회인데도 그렇다.

생각건대 성경은 군주나 나라의 통치자에 대한 처세술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점을 간명하게 지적한 것이 바로 예수의 말이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너의 하느님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이것이 가장 큰 첫째 계명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둘째 계명은 이러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 두 계명이 율법 전체와 예언서의 바탕이 됩니다.”(마태 22:37-40) 사실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여호와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서 여호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말을 잘 듣는 것이고, 그 말 중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 1서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되어 있다.(5:3) 그렇다면 결국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성경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예수의 산상수훈에서는 개인 대 개인의 처세에 관한 말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도 결국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여호와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이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여호와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개인적인 윤리나 도덕면에서도 본이 되는 위치에 있게 되고, 동양적으로 보면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도덕군자만 사는 세상이 되므로 언필칭 법이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현재 각 나라마다 수많은 법이 있는데, 형식적 의미의 법률 외에 시행령과 시행규칙, 조례 등을 합하면 부지기수의 법이 있다. 고조선 시대에는 8조금법이라고 해서 단지 8개의 법만 있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도 272개의 법이 있었다고 하니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러나 법이 많은 세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른바 요순시대에는 법이 없어도 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고 하지 않는가? 比屋可封(비옥가봉)이라고 하여 집집마다 표창을 받을 만하였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모두 하느님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들, 즉 도덕군자들만 모여 살므로 법이 사실상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국가가 불필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 알려 주는 하느님의 이 땅에 대한 최종 목적은 바로 현재의 모든 정부 제도를 없애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서로 부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존재하면 그로 인하여 상사에 대하여, 부하에 대하여, 직장생활에 관하여, 출세에 대하여 등등 여러 부면에서 신경을 쓰고 합당하게 처신하여야 할 매너, 예의, 요령 따위가 필요해진다.

뿐만 아니라, 국가제도하에서는 신하가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간신들이 도처에서 자기의 입지를 굳히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참된 인간으로 처신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인가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바른 말이라고 다 하여야 할 것도 아니고, 아예 침묵을 지켜야 할 것도 아니고, 충성을 어느 상황에서 어느 정도 하여야 할 것인지 실제 상황에서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처신하는 면에서 사뭇 다르다. 남자는 智仁勇(지인용) 3자를 天下之達德(천하지달덕)이라고 권장하는 데 비하여 여자는 德容言工(덕용언공)4덕이라 하여 권장하였다. 사람은 어느 정도 믿어야 하며 어떤 말을 믿어야 하는지도 중요하다. 또 재물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의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도 만인의 관심사이다.

그 외에도 크게는 국가에서 시작하여 직장, 단체, 가정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소속되는 조직에 따른 각자의 지위가 있게 마련이고 그 지위에 맞게 처신하여야 하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그것을 잘하는 것은 곧 처세를 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최고의 상위 개념인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 안에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내포가 간명하다. 즉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의 구체적 실천강령이라면 이타성, 겸손, 양보, 인내, 예의 등 굵직굵직한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황금률이라고 일컬어지는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는 말에도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여 지구 전체를 총괄하는 하나의 평화로운 정부를 주제로 하고 있으므로, 수많은 인간들[개인], 가정들, 사회들, 단체들, 민족들, 국가들을 규율하는 일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세상의 법과는 판이한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이것에서도 성경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2. 습관의 변화

 

내가 성경을 배우지 않았다면 내가 현재까지 살아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내가 성경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나는 폭음을 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술을 마셨다 하면 과음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보통 2, 3차로 옮겨 다니면서 마셨다. 대학 시절 절에서 공부를 할 때에는 같은 절에 공부를 하러 온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자주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신 끝에는 오버이트를 하든가,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였지만 해거름이 되면 목젖이 컬컬해지면서 무슨 건수가 없나 하고 기다렸다.

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술을 마실 일이 더 많아지면서 한 주일에 서너 번은 술을 마셨고, 그것도 항상 몇 차를 거듭하면서 과음 내지 폭음을 하였다. 주위에 내가 술이 세다는 소문이 나면서, 술자리에서는 내가 남보다 항상 술잔을 더 받게 되었고, 명불허전, 술 센 값을 하느라고 꾹 참으며 더 마시다 보니 남보다 더 마시게 되었다.

결국, 지방간이라는 진단까지 받았다. 선배들 중에 호주가 또는 폭주가로 소문 난 사람들이 40대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하였다는 소식도 들렸다. ‘술에는 장사 없다라는 속담을 자주 듣게 되었으며 그럴 때마다 그 말이 백 번 맞다고 수긍하였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절주하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낮의 격무를 삭이려면 술밖에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술자리를 기웃거리는 일은 여전하였다.

그러다가 성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경은 그저 좋은 말씀이 많이 들어 있는 잠언집 같은 것이려니 하고만 생각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물론 금언도 많았지만, 그런 유는 성경의 전체 가치의 몇 퍼센트밖에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이 사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사랑에 찬 관심을 갖고 계시며, 그래서 사람을 위하여 사람에게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하느님의 존부에 대하여 긴가민가하였고 더 이전에는 하느님은 없다, 나아가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나약한 자라고 생각까지 하였었는데, 이것은 대단한 변화이었다.

그런데 성경을 주신 하느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이 하라고, 또 하지 말라고 한 말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치적으로 보아서 성경이 하느님이 준 것이라면 그 말을 사람이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하지만 무신적 생활에 젖어 온 나로서는 성경의 말을 따르기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음주에 관하여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듣건대 교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데 정말인가? 다행히 마실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마실 수 있는가? 그것을 어긴다면 어떤 제재가 따르는가?

나는 독자적으로 성경과 관련 서적들을 탐구하였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술에 취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고린도 전서 6:10) 한편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고 되어 있다.(시편 104:15) 또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도 하였다.(디모데 전서 5:23) 그렇다면 술이란 하느님이 인간을 위하여 주신 것인데 마시되 취할 정도로 많이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나는 일단 한 시름을 덜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술을 마시는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술은 취하기 위하여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갸우뚱하면서, 어쨌거나 하느님이 節酒(절주)하라고 하셨으니까 절주하도록 노력하여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셔야 한다면 근원적으로 술자리를 갖지 않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있겠는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술자리에 참석하여 조금만 마시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어느 부자가 돈을 쌓아 놓고서 어떤 사람에게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였는데도 조금만 가져가는 것과 같이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위의 성구들은 하느님의 명령으로 매우 지엄한 것이고, 단지 겁이 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는 단단히 결심하였다. 본격적인 술자리는 갖지 않더라도 식사를 같이하는 경우 술을 곁들이면 술이 술을 부른다고 많이 마시게 될 염려가 있으므로 아예 한 잔도 하지 않는 길을 택하였다. 내가 술을 마시면 하느님이 이를 보고서 언짢아하실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그런 장면을 머리에 그려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술을 끊게 되었다. 이제 한 주에 한두 번 반주로 한두 잔을 하는 게 전부다. 그것도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술을 끊었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藥酒(약주) 수준으로 술이 아니라 약을 먹는 것이라고 좋게 해석한다면 술을 끊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흡연이다. 나는 성경을 알기 전에 담배를 피워 왔지만 그렇게 많이는 피우지 않았다. 2, 3일에 한 갑 정도이고 술을 마실 때는 좀 더 피웠지만 소위 골초가 아니었고, 줄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던 중 고린도 후서 71절에서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기를 깨끗이 하여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성하자라는 성구를 알게 되었다. 흡연은 분명히 육체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잘 증명되어 있고 많은 질병의 원인이기도 하다. 또 로마서 121절에서 여러분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희생으로 바치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영적 활동을 하여 하느님께 희생을 바치는 일을 할 때 폐가 새까맣게 된 몸으로, 니코틴을 입으로 몸으로 풍기면서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단호하게 금연을 하였다. 다행히 내가 골초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힘들다는 금단 증상 같은 것은 겪지 않았고 더 깨끗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여 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힘은 대단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을 발휘하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다’(히브리 4:12)라고 하는 것처럼 나는 그 어렵다는 금주와 금연을 성경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달성하였다. 게다가 덤으로 더 받은 것은 술값과 담뱃값을 절약하게 된 것이다. 주위에서 술이나 담배를 끊지 못하여 애를 먹는 사람을 자주 본다. 그들에게 성경을 알아보라고 권하면서 나의 경험담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물론 끄떡도 하지 않는다. 진정 끊기를 원하여 금연 학교를 다닌다, 여러 사람 앞에 대놓고 금연을 맹세한다, 무슨 약을 먹는다, 등등 별짓을 다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나의 권고에 귀 기울이고 실천하여 보기 바란다.

 

33. 세상의 문제들의 완전한 해결책

 

세상의 큰 문제들은 주로 다음의 9가지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자연재해, 의식주 문제, 죽음, 질병, 범죄, 불공평, 공해, 인간관계 등이다. 이 중에서 공해를 제외하고는 그 모두가 인간 유사 이래 지금까지 한 시도 한 곳도 없었던 때와 장소가 없었다. 위정자들 중에 비교적 유능하고 국민에 대하여 그런대로 진실된 애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쁜 사람들이었다. 집권 초기에는 제법 의욕을 갖고 잘해 보려고 하다가도 갈수록 시들해지고 이기적이거나 독재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심성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9가지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완전히 해결할 능력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인간의 힘으로 그 해결을 기대한다는 것은 緣木求魚(연목구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문제의 해결 가능성에 대하여 알아보려면 추세라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십 년간의 통계를 그래프로 그려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데, 예컨대 범죄 발생이나 병자 발생의 수를 그래프로 그려 보면 줄곧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범죄나 병이 일로 증가세를 보이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어서, 그 곡선을 같은 각도로 연장하면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특단의 기적적인 조처가 취해지지 않는 한 9가지 문제는 거의 모두 더 악화될 것을 예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통계를 떠나서 인간의 속성에 비추어 보아도 같은 예측이 가능하다. 전쟁은 앞으로도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세계에 국가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연방도 해체되어 여러 국가가 되며, 국가는 또다시 민족 단위로 분할되어 복수의 국가가 된다. 국가는 둘만 있어도 싸우는 것이 그것의 생리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세계의 역사는 전쟁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은 시작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유명무실한 것이다.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기 얼마 전에 그러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들을 해 왔다. 이를테면, 독일과 폴란드는 1934년에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나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독일과 소련 역시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나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였으며, 그해 일본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나 1945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병의 양상을 보더라도 이전에 없었던 병들이 새로이 생겨나고 있다. 혹자는 그 병들이 옛날에도 있었지만 과학자들이 그것을 밝히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병들도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은 현대병이라는 것이다. 그 병의 원인에 관하여 스트레스, 오염, 공해, 영양 불균형 등을 들 수 있는 데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자연재해는 갈수록 빈도가 더 많고 피해가 훨씬 더 크게 될 것이다. 무차별적 개발과 물질주의, 국가 간의 경쟁 등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구 온난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해는 북극의 빙하를 녹여 해수면을 높이는 등 엄청난 자연적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나머지 문제들도 전망은 캄캄하기만 하다.

세계 경제 포럼의 창설자인 클라우스 슈바프는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점점 늘어 가지만 그 문제들을 처리할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라고 지적한 뒤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야말로, 세계는 협력과 단호한 조처가 아울러 요구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단호한 조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협력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것이며, 설사 그것들이 이루어지더라도 인간의 선천적인 이기성과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인간이 기대하는 참다운 평화와 안전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너무 놀라운 소식에 우리는 접할 수 있다. 그 출처가 바로 성경이다. 옛날 옛적부터 있어 온 성경에는 인간이 바라고 있는 모든 것이 실현되는 세상에 대하여 거듭거듭 언급하고 있다. 예수가 간절히 기도하라고 한 소위 주기도문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오라고 기도하라고 한다. 바로 그 나라야말로 유일하게 이 지상의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라면 과연 예수가 기도할 만한 수많은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라고 손꼽을 만하지 않은가? 사실 지구 전체에 하나의 나라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보더라도 탁견 중의 탁견이다. 지구 전체에 2개의 나라만 있어도 싸울 것이다. 경제적 이유로, 모자라는 자원을 둘러싸고 또는 어느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고대 그리스의 헬렌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미인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울 것이다. 그게 인간의 속성이다. 이 점에 대하여 단테는 일찍이 세계의 참다운 평화는 하나의 통치권이어야 가능하다라고 하였고, 현대에서는 핵물리학자 해럴드 유리도 같은 말을 하였다. 시대를 초월한 탁견이다.

그리고 세계가 하나의 나라로 통치된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9가지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는 없다. 인간 지도자는 통치자의 필수 덕목인 사랑, 공의, 지혜 그리고 능력이 태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라라고 하지만 그 국민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복지의 형평을 유지하면서 부작용 없는 자연 개발을 해 나가려면 위 4가지 요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야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죽음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1세기에 사람이 달에 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텐데, 20세기에 사람이 달에 갔다. 그러나 죽음은 여전하다. 부활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1세기에 부활의 사례가 있었다. 그래서 아마 1세기 사람으로서는 사람이 달에 가는 것이 부활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사람이 달에 가는 것이 먼저 실현된 지금 사람이 사람을 부활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 과학을 앞으로도 더 발달시키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부활시키거나 나아가서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예수의 통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 214절에서는 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종합적 포괄적 해결을 밝히고 있다.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참으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일이다. 믿기는가? 단번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에 성경은 이어서 다시 다짐한다. “그리고 왕좌에 앉아 계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또 그분이 말씀하셨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여라.’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이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주겠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인 여호와(요한 계시록 1:8)의 확실한 보증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숨 막히는, 너무나도 찬란한 전망이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이를 기다리며 나날을 살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가!!!

 

34. 참다운 행복의 길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수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언급하였다. 한 마디 하지 않으면 그러한 반열에 들 수 없기라도 한 듯이 똑같게, 또는 비슷하게 말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목적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도를 포함하는 것인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애초 목적을 가지기로 되어 있었는가 여부에 따라 이에 대한 답은 180도로 달라질 수 있다. 진화론자의 주장처럼 인간도 장구한 진화의 역사 중에 우연히 태어난 한 생명체라면, 우연히 생긴 존재에 무슨 목적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인간이 그의 부모에 의하여 태어날 때 자신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목적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어떤 목적을 갖고 수태하게 하였을 때라고 하더라도 그 부모의 목적이 그 자식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모가 못다 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컨대 자식을 판사로 만들기 위하여 부부관계를 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그 아들의 삶의 목적이 판사일 수는 없는 이치와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의 뜻이나 목적과는 무관하게 자식의 독자적인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이를테면 판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경우에 판사가 되면 인생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 판사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은 아닐 것이다. 판사가 되어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 인생의 목적에 해당할 것이다. 예컨대 사회 정의의 실현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일응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따지고 보면 그것도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사회 정의의 실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할 때 그 개인적으로는 그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만족감 내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궁극적으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실현 방법은 사람에 따라 천태만상일 것이고, 아마도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보통 행복이라고 하면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정신적으로 편안한 상태라고 하는데, 반대로 일부 인도인들처럼 釣身苦行(조신고행)을 하는 것도 행복의 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쨌거나 행복의 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치고 명사들의 두 가지 견해만 살펴보자.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3단계로서 첫 단계로 쾌락만 추구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는 뒤이어 찾아오는 권태 때문에 지속적인 행복의 길은 아니라고 하였다. 둘째 단계로서 윤리적 단계를 들었는데, 이는 삶의 유한성으로 불안에서 탈피할 수 없으므로 참다운 행복의 길이 아니라고 하였다. 남에게 선행을 일삼는 생활은 거룩하긴 하지만 자신에게 신체적, 경제적, 감정적, 가정적 기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면 그래도 행복감이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최종 단계로 종교적 단계를 들었는데, 이것도 관습과 제도로 굳어 버린 종교단체들에 의하여 진리가 왜곡되고 위선이 자행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정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한 심리학자는 행복의 구성 요소로 세 가지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쾌락과 참여(일이나 가정 활동 등에 대한 참여) 그리고 의미(자신의 이익보다 더 큰 목적이나 목표를 추구하는 것)라고 하였다. 그는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쾌락을 중요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 꼽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도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 이제 너를 즐거움으로 시험하여 보리니, 좋은 것을 보아라.’ 그러나 보라! 그것도 헛되었다. 나는 웃음을 가리켜 말하기를 미친 것!’이라고 하였고, 즐거움을 가리켜 이것이 무엇을 하는가?’ 하였다.” (전도 2:1, 2) 성경에서 알려 주듯이, 쾌락에서 비롯되는 행복은 기껏해야 일시적이다. 일에 참여하는 것은 어떠한가? 단지 쾌락 추구보다는 월등히 나은 방법이긴 하지만, 일을 이룬 뒤에 밀려오는 허무감과 허탈감을 생각하면, 순간순간의 잡념을 제거하게 해 주는 면은 확실히 있다 하더라도 정답은 아니다. 박수 소리가 가라앉고 자기를 몰라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감에 따라 이것이 아닌데!’라는 짙은 회의감이 머리를 치드는 것이다.

사실 어떤 인간이든 역사상 길이길이 빛날 업적을 이룬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죽으면 그에게 무엇이 남는가? 죽은 사람이 자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역사책을 볼 수 있는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동상이 섰다 하더라도 죽은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는가? 물론 그 자신은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할지라도, 그가 죽을 때 후손들이 그로 인하여 많은 혜택을 얻게 될 것이며 그를 찬양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흐뭇하게 눈을 감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역사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인간 종말론이 끊임없이 흩날리고 있듯이, 인간은 조만간 아니면 좀 먼 장래에 종말을 고할지도 모른다. 그때 인간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설사 인간 역사가 무한히 계속된다 하더라도 개인의 이름은 갈수록 퇴색될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당대나 길어도 고려 시대까지는 혁혁하게 이름을 날렸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또 알아준들 그것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런 탁월한 이름을 후세 대대 남길 사람은 총인구의 몇 퍼센트나 될 것인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가 이 세상에 살았다고 할 만한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전혀 아닐 것이다.

이상에서 여러 관점에서 행복의 길을 찾아보았지만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인간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데 있을 것이다. 우연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그 답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소위 창조주의 의도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인간에게 목적이 있을까? 당연히 있다. 창조주가 의도 없이 인간을 창조할 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라면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가 전지전능인데, 정신병자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무엇을 만든다든가, 솜씨를 자랑하거나 익히려고 만든다든가, 심심하여 파적거리로 만든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주가 인간을 창조한 목적에 맞추어 인간이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바로 인간의 목적이자, ‘행복한 하느님(디모데 전서 1:11)’의 피조물로서 행복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의 정답은 창조주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에 들어 있다. 창세기 126 28절에서 그것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러하다. “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를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기어 다니는 동물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 그들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날짐승과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즉 쉽게 말하여 인간이 땅의 관리자로서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바로 이러한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목적을 실현하는 한 방법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일이야말로(마태 24:14; 28:19, 20) 자신의 행복의 길이며, 뿐만 아니라 이를 듣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일에 참여하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인 것이다.(디모데 전서 4:16)

 

35. 벗 관계를 통해 얻는 지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듯이, 사람은 혼자서 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서 3S를 드는데, 그중 하나가 sociality, 즉 사회성 또는 사교성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마슬로의 욕구 5단계설에서도 그중 하나로 사회성을 꼽았다. 또 우리나라 속담에 시시덕이는 재를 넘어도 새침데기는 골로 빠진다는 말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여도 사회성이 건강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정량적으로 인간관계가 한 사람씩 늘어날 때마다 우울증 지수가 0.3점 감소하고, 강한 사회적 유대관계를 유지해 온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연구 기간인 76개월 동안 생존율이 50% 이상 높게 나타났다. 사회적 관계가 건강에 좋은 까닭은 옥시토신(oxytocin) 때문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나오고 있다. 옥시토신은 다른 사람과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마다 만들어지는 호르몬이다. 옥시토신은 심장병의 위험도 감소시켜 준다.

소박한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오면 기분이 좀은 좋아지고 약간의 흥분상태가 되어 혈액 순환이 잘 되는 느낌을 갖고, 그것은 건강에 좋을 것 같이 여겨진다. 나쁜 사람들과의 교제이거나, 그 교제에서 기분이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한 교제는 좋아 보인다. 그래서 각종 모임이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공통점이 있으면 클럽’, ‘’, ‘그룹’, ‘동아리등의 이름의 각종 모임이 있다. 특히 내 나이 정도 되면 대부분이 은퇴한 터라 그야말로 시간을 죽이기 위하여 중학교 동기회와 동창회, 고등학교 동기회와 동창회, 대학 동기회와 동창회, 대학교 총동창회, 심지어 국민학교 동기회와 동창회까지 있다. 산악회, 바둑 동아리, 早起(조기) 테니스회 등 취미나 스포츠 위주로 생긴 모임도 있는가 하면, 모이는 요일에 따라 첫째 목요일에 모이는 일목회, 둘째 수요일에 모이는 이수회, 셋째 금요일에 모이는 삼금회 등이 있고, 서울에 살면 강북과 강남을 나누어서 그런 유의 모임이 있고 물론 강남에 살아도 강북의 모임에 참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사람은 한 달 동안 각종 모임에 쫓아다니다 보면 한 달이 훌쩍 지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임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대화는 대체로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저 소주 한 잔 마시면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거나, 신체 단련을 하는 정도일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지만 국외자로서 그저 안줏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 생산적인 대화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헤어지고 나면 좀은 허허로운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등산 같은 것은 그래도 좀 나은 것이 자연 속에서 전신 운동을 하는 것이라 마치고 나면 건강이 좀 향상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산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서 내내 건강하거나 더 장수하는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이상 한쪽 구석에서는 그것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냉소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게다가 사람의 모임인지라, 처음에는 좋은 취지로 결성되어 한동안 좋은 모임이었다가, 때때로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심지어 회원들 간에 반목하거나 싸우는 일까지도 벌어질 때가 있다. 사람들의 모임인 이상 적어도 남에게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써야 하고, 예의를 차려야 할 것은 차려야 하므로 경비 문제도 녹녹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또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인지라 여러 가지 이유로 실망하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하면서 즐기려고 참여한 모임이 오히려 역효과를 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이 수반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모임을 기피하고 주로 혼자만의 취미생활을 즐기거나 특기를 발전시키면서 보람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친구를 음악이나, 繪畵(회화)나 독서라고 하면서 자기 속으로 침잠한다. 그들은 주로 내성적인 사람으로서 인간관계를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여 교제를 극소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도 누군가와의 교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라, 자신과의 교제, 즉 자기와의 대화를 통하여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기도 하고, 자기 속에서 들리는 또 다른 소리, 신의 소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경청하려는 경향도 보이기도 한다. 특히 기도에 심취함으로써 절대자와의 대화를 한다고 한다. 그것도 교제라면 교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절대자와 교제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값진 것이 어디 있겠는가? 구청장과 밥 한 끼만 같이 먹어도 ’00 구청장과 밥 먹는 사이라고 떠들며 다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절대자, 다시 말해서 창조주, 성경에서는 여호와라고 하는 최고의 신과 교제를 할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는 특권 중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이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사람도 물론 많을 것이다. 하느님과 교제하다니, 무슨 말인가? 그러나 성경에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곳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아브라함이다. 야고보 223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으며, 그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졌다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고, 그는 여호와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왜 벗인가? 애초에 인간의 첫 조상 아담이 범죄를 하기 전에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는데, 에덴동산에서 범죄를 한 후 쫓겨남으로써 부자관계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손으로서는 다시 부자관계를 회복하지 못하였고 가장 가까운 관계로서는 벗 관계가 최상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여호와를 온전히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존재조차 긴가민가하는 처지에 하느님의 벗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 전체의 체제에 비추어 그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담이 상실하였던 부자관계는 앞으로 至福千年(지복천년) 후에 회복될 것이고, 그때까지는 여호와와의 최상의 관계는 벗 관계임을 성경은 분명히 알려 준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실 말할 수 없는 축복이다. 사람과 달리 하느님은 우리가 그의 뜻을 잘 따르는 한 결코 돌아서거나 실망시키거나 해를 끼칠 분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빚어질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전지전능하므로 벗의 어려움을 그냥 보고 있을 분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벗으로서 많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벗으로 줄 것이다. 하느님과 벗이 된 사람들끼리의 교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교제와는 판이하다. 서로를 진정으로 도와주고 아껴 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한하게 용서하고 오래 참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진정한 벗이라 할 수 있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독일에 사는 카트린은 동남아시아에 강진과 그로 인한 쓰나미가 덮쳤다는 보도를 듣고 마음을 졸였다. 그때 딸이 타이에 가 있었던 것이다. 32시간 후에야 전화를 통해 딸이 무사하니 안심하라는 소식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마조마했던 그 시간에 카트린에게 도움이 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카트린은 이렇게 기술한다. “그때 거의 모든 시간을 들여 여호와께 기도하였지요. 그것이 참으로 큰 힘과 정신의 평화를 준다는 것을 거듭거듭 실감했습니다. 또한, 사랑 많은 영적 형제들이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만일 카트린이 여호와께 드리는 기도의 유익과 사랑 많은 영적 형제들의 위로를 받지 못한 채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내야 했다면 그의 상황은 얼마나 더 힘들었겠는가!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밀접히 연합하는 것은 독특한 축복이며 결코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될 매우 귀중한 것이다.

 

36. 사람으로 태어난 것의 은혜로움(*28장의 보충임)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를 감사하였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그리스에 태어난 것과 남자로 태어난 것이다. 동양에서도 예부터 인생삼락이라고 해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꼽았다. 그렇다. 사람으로로 사는 것에 대하여 평소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평소 그 점을 생각하지 않고 생활에 쫓겨 살다가 그런 글을 보는 순간 아차 하는 느낌이다. 흔히 말하듯 공기 중에서 살면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다가 산소가 희박한 곳에 가면 새삼 공기의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배우자에 대하여도 그런 말을 쓴다. 사람에 대하여도 똑같다. 감사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 보면 된다. 즉 자신이 현재 사람이 아니고 개나 돼지라고 생각해 보라. 또는 조물주가 지금 당신을 개로 만들겠다고 한다면 당신의 기분이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사실 어느 문헌에 의하면 현재 지상에 150만 종의 생물이 있다고 한다. 寡聞(과문)인지 모르지만 그중에서 사람과 유사한 것이 또 있을까? 나는 길을 가다가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서 다니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하다. 형태상으로 보아서 세로로 길쭉한 것은 기대거나 누가 부축하지 않고서는 독자적으로 서기가 곤란하다. 나무처럼 땅속에 뿌리가 내려 있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서 있다. 게다가 마음대로 옮겨 다니기까지 한다. 그뿐인가? 뛰어다니거나 심지어 물구나무서기조차 한다. 直立(직립) 동물은 사람이 유일하다.

이 점은 정말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직립할 수 있음으로써 우선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인간 문명의 발달의 단초가 된 것이라는 도구를 만들고, 글을 쓰고 스포츠를 하고 예술을 하게 되었다. 머리가 몸의 맨 위에 위치함으로써 상하 전후좌우를 잘 관찰할 수 있다. 특히 머리가 하늘을 쳐다볼 수 있음으로써 장엄한 하늘과 거기 있는 천체들을 보면서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다. 기어 다니는 동물들은 온종일 내내 땅만 바라보거나, 이따금 고개를 들어봤자 앞만 바라볼 뿐이고 하늘을 쳐다볼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동물이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서서 다니며 수시로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이 구조적으로도 하느님을 지향하도록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생각하게 해 준다.

이제 五感(오감)을 보자. 눈은 40만 가지의 색을 식별한다고 한다. 색맹도 살아갈 수 있는데, 왜 그토록 많은 색깔을 식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을까? 이 점에서도 역시 반증논리를 생각해 보자. 색깔을 흑백밖에 구별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캄캄하고 삭막하고 답답할까? 봄과 가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청각 또한 어떠한가? 사람에게는 각자 다른 聲紋(성문)이라는 것이 있어서 음색이 다 다르다. 그래서 목소리만 들어도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린다. 갖가지 음색의 악기들에서 나는 다양한 음향의 향연에 젖을 때 놀라운 청각에 대하여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미각도 빼놓을 수 없다. 깨알만 한 차이의 맛을 식별하는 혀는 신비롭기만 하다. 같은 종류의 음식을 하는 음식점들이 즐비한 거리에 가 보면, 유독 한두 군데 가게에만 손님이 줄을 섰다. 그것은 미묘한 맛의 차이를 감지한 사람들이 그 소문난 집에만 몰리기 때문이다. 구태여 미식가들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맛을 식별하는데, 미식가 수준이라면 훨씬 더 미세한 맛의 차이를 느끼고 즐긴다지 않는가? 미각 역시 네댓 가지 맛만 식별할 수 있어도 먹고 산다. 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맛을 감별할 수 있게 되어 있음도 얼마나 놀랍고 감사할 일인가? 세계 여행을 해 보면 더욱 그것을 느낀다. 세계의 각 나라와 민족마다 고유의 음식과 조리법이 있고 나름대로 맛있는 걸 보면 음식의 끝도 역시 없는 것 같다.

이러한 감각기관의 경이로움도 여타 동물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지만, 언어 능력은 어떠한가? 현재 6,912개의 언어가 있다고 하는데, 각 언어마다 질서와 규칙이 체계적으로 꾸며져 있다. 단 하나의 언어라도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인위적 언어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겨우 에스페란토어 정도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도 참으로 신기하다. ‘神奇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하면 신의 기이한 솜씨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정말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미개한 토인들은 불과 몇백 명만 쓰는 언어를 쓰고 있는데 그 언어 역시 정밀한 문법 내지 어법이 있다고 한다. 그 미개한 사람들이 그 복잡한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신이 주신 것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겠다.

이제 이상의 것보다 더 놀랍고, 인간답게 해 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높은 지성이다. 인간을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기에 합당한 특성이 바로 지성 내지 이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포괄하여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인간의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간의 정신이 개재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국방, 교통(……) 등등……. 모두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인간에 가장 근접한 동물, 심지어 인간의 조상이라고까지 하는 원숭이라도 인간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는가? 이런 걸 보더라도 인종이 생물학적으로는 동물로 분류되지만 사실 동물과는 전혀 다르므로 동물계에서 분리되어 인간계로 독립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야 하는 이유 중의 또 다른 하나는 도덕성이다. 현재는 도덕성이 많이 타락되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으로서 도무지 넘어갈 수 없는 도덕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도덕의 핵심 요소인 양심이라는 것이 저마다 내재되어 있어서 인간계의 질서를 지탱하고 있다. ()은 곧 ()라고 하는 말이 나타내는 것처럼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의 행동은 정말 아름답다. 그 행위 자체가 곧 예술이다. 모두가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 바로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특성이 있으니, 그것은 곧 靈性(영성)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람에게 있어서 정신, 육체 그리고 도덕의 세 부문에서 뛰어나면 거의 완벽한 사람으로 추앙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53절에서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한 것처럼, 그가 영성이 없거나 적다면 완벽할지언정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자신이 그것을 잘 알 것이다. 앞의 세 부문에서 거의 완벽할 정도로 갖춘 사람이라고 하여 아프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고, 죽지 않는가?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주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서 그에 맞추어 생활을 틀 잡아 가는 것이야말로 영성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자리매김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위 세 부문에서 뛰어나더라도 끊임없이,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의 숱한 문제들의 해결책은 과연 있는가?, 있다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되는가?’, ‘참다운 행복의 길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철들고 나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그런 골치 아픈(?) 생각을 하기 시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써도 대답은 자명하지 않은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면 그것이 저절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프로그램에 프로그래머가 있어야 하듯이 인간에게 영성을 프로그래밍한 존재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바로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또 찾도록 영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네 사람은 참으로 뛰어나다. 그렇다면 그 뛰어난 점들을, 특히 영성을 십분 활용하여 진정한 인간으로 행세하여야 할 것이다.

 

37. 부활의 희망

 

흔히 어김없이 부과되는 세금에 대하여 세금은 죽음처럼 확실하다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세금에 대하여 한 말이지만, 뒤집어 본다면 죽음은 매우 확실하게 닥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좋은 일이 이렇게 확실하다면 좋으련만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죽음이 100% 확실하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수많은 부문에서 빌미를 제공한다. 특히 예술 부문에서는 이것이 많은 비율을 점하는 모티브가 된다. 아마 죽음이 없다면 많은 작품들이 성립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죽음 극복을 위한 노력은 끝이 없다. 특히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다 치고 부활은 어떠할까? 죽음을 극복하려는 연구는 진행되고 있지만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은 현재 실체가 존재하므로 그 실체에 대하여 모종의 과학적, 의학적 처치를 가한다면, 즉 죽음의 원인이 되는 DNA의 무엇인가를 제거하거나 변형시키는 등의 어떤 처지를 가한다면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부활이라는 것은 도대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어느 특정인을 되살리는 것이므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에 대하여 무슨 처치를 하려 들 수 있겠지만, 시체가 아예 썩어서 티끌로 돌아가 산산이 흩어진 마당에 무엇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소박한 생각으로 보면 죽음을 막는 것이 부활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게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부활에 대하여는 과학적으로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다만 신화나 전설에서만 거론될 뿐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폴뤼이도스가 꿀단지에 빠져 죽은 미노스의 왕자 리비코스를 뱀이 준 약초로 부활시키고, 에로스가 죽은 아내 프쉬케를 저승에서 데리고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오르페우스가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리고 나오다가 실패한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즉 신의 세계에서는 부활이 如反掌(여반장)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예수의 부활을 비롯하여 9건의 부활 사례가 있다. 이 기록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감흥을 갖지 못한다. 너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므로 그저 과장이거나,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생각한다. 또 성경에는 그 직접적인 부활의 사례 외에도 부활을 예언하거나, 부활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부분이 수다하게 나오는데 이에 대하여도 그냥 지나쳐 버린다. 심지어 교직자에 대한 설문 조사에 있어서도 그들이 부활에 관한 기록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이 압도적이라고 한다. 형편이 이러하니 일반인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부활은 가능하다. 우선 모든 사람이 부활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그것이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의 이론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애초 전혀 불가능한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내가 어릴 때 상상하기만 했던 일들이 불과 반백 년도 지나지 않아서 실제로 실현되었다. 예컨대, 사람이 달에 간 일, 우주선을 발사하여 목성이나 먼 천체를 탐사하고, 안방에서 모스코바에 있는 사람과 화상으로 통화하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일들이다. 근자에는 스마트폰이 만들어져 단지 상상하기만 했던 편리함을 직접 누리고 있지 않은가? 이것만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와 여자의 성별을 바꾸는 일도 상상 밖으로 나와서 실재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외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도 지금 과학의 발달 추세에 비추어 보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 같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가 상상해 마지않는 부활도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논증함에 있어서 부득이 성경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전에 여호와 하느님이 창조주라는 것은 전제하여야 한다. 여호와가 성경을 주신 것이 맞다는 것도 전제하여야 한다. 이 두 가지 중요한 전제에 대하여는 다른 기회에 말하겠지만 일응 그것을 인정하면 논리적 전개는 간단하다.

우선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성경 전체에 있어서 예수의 부활만큼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사실상 성경은 별로 의미가 없다. 첫 인간이 범죄를 하자마자 여호와는 창세기 315절에서 사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너의 자손과 여자의 자손 사이에 적의를 둘 것이다. 그는 너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기서 여자의 자손은 예수를 말한다. 그의 발꿈치가 상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사탄이 머리를 짓밟히는 것에 對比(대비)하여 치명상을 입지는 않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발꿈치가 아니라 머리를 상하게 될 것이지만, 부활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단지 발꿈치에 부상을 당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있어야 성경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왕국의 왕이 될 수 있다. 예수는 소위 주기도문에서 하느님의 왕국이 오게 하라고 함으로써 기도의 주요 주제로 하느님의 왕국을 들었다.(마태복음 610) 그만큼 하느님의 왕국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세속 국가의 3대 구성요소와 마찬가지로, 통치자인 왕과 피통치자인 백성과 영토가 필요하다. 그 왕이 예수이다. 여호와는 예수를 부활시키고 하늘에 데려간 후 그를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즉위시켰다. 시편 1101절에서 그 점을 알려 준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적들을 너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또 다니엘 713, 14절은 이러하다. “내가 밤에 환상을 계속 보고 있는데, 하늘의 구름과 함께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오고 있었다. 그가 옛날부터 계신 분에게 나아가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를 그분 앞으로 가까이 데리고 갔다. 그러자 그에게 통치권과 영예와 왕국이 주어져, 민족과 나라와 언어에 속한 자들이 모두 그를 섬겨야 했다. 그의 통치권은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통치권이며, 그의 왕국은 멸망되지 않을 것이다.”

이 하느님의 왕국이야말로 인류의 모든 숙원을 완전히 해결할 것이라고 이사야서와 계시록, 기타 성경의 여기저기에서 숱하게 알려 준다. 사실 그것 아니고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전망은 전혀 없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여호와는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사 예수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 주시고 첫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 갚도록 마련하셨고, 예수도 이에 철저히 순종하여 죽임을 당함으로써 여호와가 그를 부활시킬 수 있는 합당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예수가 자연사하였다면 부활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듯 예수의 부활은 고린도 전서 15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전파 활동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 전체의 스토리에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첫 조상의 범죄, 이로 인한 죽음의 도래, 원죄의 代贖(대속)을 위한 예수의 희생의 죽음, 부활,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서 즉위, 예수의 통치로 인한 인류 문제의 완전한 해결. 이러한 순서로 이어지는 성경의 체제에는 한 치의 모순이나 허점이 없다.

덧붙이건대, 이상의 복잡한 성경적 추리를 거치지 않더라도, 단 한 가지,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만 믿더라도 부활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즉 하느님은 거짓말할 수 없다. 그분이 성경에서 부활을 여러 차례 약속하고 실제로 맛보기로 9건의 부활 능력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때가 되면 세계적 규모의 대대적인 부활을 약속하였다. 이 세 가지 점만 묵상하여도 부활을 믿을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는지 여부는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여부에 달려 있고, 그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 조사하는 데 달려 있으며,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 여부까지도 변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는 너무너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38. 벼랑 가에서 춤추는 시각장애인들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사람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이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일들이 주위에서 수없이 일어나는데, 대부분 그냥 무심하게 흘려보낸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예사롭게 지나치고 만다. 사람은 흔히 일상사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므로, 뜻밖의 일들에 대하여도 그렇게 으레 그런 것이라는 느낌만 떠올릴 뿐이다. 일어난 일 자체는 뜻밖의 일이지만 그러한 뜻밖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자주 있는 것이므로 무심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일들 중에는 곰곰이 따져 보면 그렇게 흘려보내어서는 아니 될 일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며칠 전에 볼 때는 멀쩡하고 혈색이 좋고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든가, 생전에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별안간 이상한 언행을 한다든가, 복권에 당첨되어 졸지에 벼락부자가 되었다든가, 그 사람이 얼마 후에 피살되었다든가 하는 것 등이다. 이 모두가 우연히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시기와 우연’(전도서 9 : 11)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정밀하게 그 원인을 따져 들어가 보면 결코 우연으로 치부해서는 아니 될 것들도 많이 있다.

예컨대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죽은 경우를 보면, 그의 건강이 그를 보는 사람들의 주관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의외로 느껴지는 수가 대부분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의 혈색이나 행동거지만으로써 그의 건강을 측정하므로 그것이 부정확하기 짝이 없다. 보는 사람마다 상대의 혈색에 대하여 의견이 다를 수 있고, 혈색이 좋다고 해서 모두 건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상대가 건강해 보인다는 직관적 느낌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아마 그가 말을 힘있게 유창하게 조리 있게 하고, 안색은 연분홍빛을 띠며 얼굴 피부가 팽팽하고 허리가 꼿꼿하며 뚜벅뚜벅 활보한다면 건강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들의 總和(총화)가 건강 측정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을까? 병약해 보이고 비실비실하던 사람이 오래 사는 예도 적잖게 보고 있다.

어느 쉰 살가량의 약사 부부가 있었는데, 항상 미소를 머금고 혈색도 좋아 보여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건강해 보인다는 평가를 자주 받았었는데, 그들 중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아내가 혼자서 약국을 경영하였는데,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마저 갑자기 죽었다. 사람들은 그저 혀만 끌끌 찰뿐이었다. 언필칭 人命在天’(인명재천)이라면서 그 일을 곧 잊어 갔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충족이유율에 의하면 그들의 사인은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모든 사람은 급사할 수 있다는 명제만 생각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들 내부의 어떤 원인이 점점 자라다가 사망 시점에 이르러 한계에 달하여 폭발한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생전에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상한 언행을 하는 경우를 보자. 이때 통상 사람들은 한 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치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라는 속담으로 얼버무리곤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의 이상한 언행 역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예의염치라는 윤리에 포장되어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있던 본성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활화산처럼 겉으로 분출될 수 있는 것이다. 결과가 드러나고 나서야 심리학자들이나 정신분석학자들을 동원하여 심층적으로 조사해 보면 그럴 만한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된다.

복권에 당첨되는 경우는 순전히 우연에 속한 것이 아닐까? 일응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필연적 우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겉보기에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심층적으로 조사해 보면 거의 필연이다 싶은 원인이 개재된 것일 수도 있다. 가령 확률에 관한 수학적 이론을 동원하여 주의 깊이 장기간 복권을 산다면 그의 당첨은 필연의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흔히 사람은 운명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영적 세력이 있다면 그 운명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운명론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예정론적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닌 한 수긍할 만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불행한 사태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은 앞일을 알 수 없다는 명제에만 매달린 나머지 아예 예고된 불행을 염두에조차 두지 않은 나머지 큰 불행을 당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지진이나 화산 폭발이 계속 경고된 지역에서 빨리 피하지 않아서 마침내 지진이나 화산 폭발의 피해를 당한 경우나, 산행을 할 때 위험 경고 지역에 들어가서 함부로 산행을 하다가 추락한 경우나, 투자위험도가 높고 그 위험의 현실화 가능성이 높은데도 설마 하는 마음에 이를 무시하고 투자하였다가 큰돈을 손해 보는 경우 등등 수없이 매거할 수 있다.

심지어 천애의 절벽 부근에서 공놀이를 한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데도 그런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시각장애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찔하다 못해 안타깝고 심지어 일종의 분노마저 치솟는다. 거듭되는 경고를 왜 무시하는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라면 더더욱 겸허하게 자신의 분수를 알고서 주위의 사정에 더 면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시각장애인들이 벼랑 끝에서 벌어지는 꽃 잔치나 술 파티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면 언어도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일이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라. 그런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세상 상태는 내리막길을 무서운 속도로 내리 닫아서 거의 끝에 이르고 있다. 전쟁, 지진, 기근, 질병, 범죄, 불공평, 공해, 이기심 등등의 인류 역사 이래로 싹 터 온 문제들이 지금 어마어마하게 자라나서 대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세계적 대 변혁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라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이 곧 경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들을 경고로 보고 있지 않다. 그저 하루하루 나 또는 내 가족이 먹고 마시고 쾌락을 즐기면서 살다가 죽을 때 죽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이 팽만해 있다. 이러다가 큰 환난이 닥치면 그것을 뜻밖의 갑작스러운 재난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 우연인 것이다. 수많은 경고에 유의하지 않는 사람은 늘 우연에 빙자하게 마련이다.

 

39. 성욕의 파장

 

매스컴에 빠지지 않고 보도되고 있는 기사는 성추행이나 성폭력에 관한 것이다. 흔히 성욕을 식욕과 睡慾(수욕)과 더불어 인간의 3대 본능이라고 하는데, 식욕과 수욕의 과잉으로 인하여 사건사고가 발생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어도 성욕을 추스르지 못한 사건사고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단지 이어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갈수록 대담해지고 신분과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고 있다.

치한들이 소녀나 심지어 유아를 상대로 끔찍한 성추행을 하는 것을 비롯하여, 대학교수가 제자들을 상대로 장기간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일삼고, 판사가 전철 안에서 여성의 몸을 더듬고, 30대 간호조무사가 60대 환자를 성추행하고, 의붓아비가 의붓딸을 강간하는 것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강간죄의 객체가 여자에서 사람으로 형법이 개정된 이래 실제로 여자가 남자를 강간한 사건이 일어났고, 친아버지가 친딸을 성추행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국제적으로도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적 유명인사들도 성추문으로 똥물을 뒤집어쓰는 일이 일어났다. 나라마다 포르노 산업이 번창 일로에 있기도 하다. 가히 성폭력이 지구에 넘쳐흐르고 포르노물이 지구를 온통 덮고 있어서 지구 전체가 성에 미쳐 궤도를 일탈할 것만 같다. 미국의 포르노 산업의 연간 매출액이 2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오죽하면 포르노 산업만큼은 망할 염려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국이 아무리 단속해도 그것은 창궐하기만 한다. ()이 지니는 마력은 가히 마력적이다. 여기서 마력적이라는 말의 ()는 마귀를 뜻하는데 마귀의 주무기 중의 하나가 바로 ()이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기원전 24, 5세기경이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창세기 62절부터 7절까지) ‘참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택하는 사람을 모두 아내로 삼기 시작했다고 알려 주는데 여기서 참하느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천사들을 일컫는 관용구이다. 즉 천사들이 여자의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現身(현신)하여 이 땅으로 내려와서 사람인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고, 그로 인하여 거인인 네피림이 태어났으며 그 네피림이 거한으로서 광포한 짓들을 자행하여 온 땅이 악으로 가득 차게 됨으로써 하느님이 대청소하는 차원에서 대홍수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그리스 신화를 필두로 여러 전설과 신화에도 나타난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는 () 즉 천사인 제우스가 인간 여성인 알크메네와 관계하여 헤라클레스를 산출한 것을 비롯하여, 천사 에로스가 인간 프쉬케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마의 비너스)가 인간 남자 앙키세스와, 제우스와 여성 세멜레와, 태양 신 헬리오스가 여성 클뤼메네와 각각 관계하는 등 천사와 인간과의 성관계에 관한 얘기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처음에는 단지 누군가가 옛날 옛적 재미 삼아 지어낸 이야기로만 생각하였는데, 성경과 대조해 보고 또 세계 각국에 150여 개의 홍수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신화 후에 성경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신화보다 훨씬 이전에 기록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서 성경 기록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역사가 약 4,300년 전까지 소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의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의 성폭력이 최초로 언급된 성경의 기록은 뒤에 언급된다. 창세기 1930절부터 35절까지에서 롯의 두 딸이 롯이 만취하여 자고 있는 틈을 기화로 후손을 낳기 위하여 번갈아 롯과 성관계를 하는데, 오늘날의 형법으로 말하면 준강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은 후손을 낳으려는 의도에서 좀은 이해할 측면이 엿보이는 것이고, 그 후 창세기 342절에서 야곱의 딸 디나를 세겜이 강간한 것이 순전히 성욕을 충족시키려는 의미에서 최초의 강간이다.

그리고 驚天動地(경천동지)할 강간사건은 다윗의 밧세바에 대한 것이다. 사무엘 하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 사건은 성욕의 폭발력이 가히 핵폭발에 비길 만하다는 점을 알게 해 준다. 다윗이 누구인가? 여호와 하느님께 충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아니던가? 17세의 다윗이 9척 장신의 거한 골리앗과 싸울 때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말하며 여호와가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며 완전무장한 적에 대하여 달랑 무릿매 하나로써 싸워 이겼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올 때는 너무 기뻐서 왕의 체면을 마다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으며,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기초를 놓았고, 시편 150편 중에서 반 이상을 지으며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이런 그가 여호와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음행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랍바와의 전투가 한창인 때의 저녁, 옥상에서 거닐다가 부근 민가의 한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고 음욕이 불 일 듯하였다. 그녀의 남편 우리아가 그 전투에 출정한 것을 알고서 왕의 권세로 그녀를 불러와서 강제로 동침하였다. 그것도 월경 중인 그녀와 관계함으로써 율법이 정죄하는 범죄까지 저지른 것이었다. 더 나아가 밧세바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이를 감추기 위하여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어 아내와 관계를 할 기회를 주었으며, 충직한 우리아가 전투 중인 전우를 고려하여 아내와 관계를 하지 않자 그가 술김에 아내와 관계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그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우리아가 밧세바와 관계를 하지 않자 전선의 최전방에 내보내어 전사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성범죄와 이를 감추려는 후속 범죄 중에서 가장 극악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다윗의 하느님에 대한 열심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추악하기 짝이 없는 작태였다. 여기서 의 충동성과 핵폭탄 같은 위력을 극명하게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날에도, 아니 소위 말세라고 하는 오늘날에는 더욱더 사탄과 악귀들이 성을 강력한 주무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란 비단 최협의의 성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남녀 간의 기묘한 접촉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성교로 인한 오르가즘은 불과 몇 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맛보기 위한 아슬아슬하고 짜릿하고 조마조마하고 흥분되며 황홀해지는 얼마간의 과정은 어떤 무기의 위력도 능가한다. 전장을 휩쓸며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용장도 아리따운 미녀의 고혹적인 유혹에 농약을 먹은 파리처럼 맥을 추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쓴 리시스트라테는 특히 남성들이 여성들의 성적 스트라이크에 맥을 못 추고 항복한 풍자극이다. 전쟁을 일삼는 남성들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남편의 戰死(전사)의 비극을 수시로 겪는 여성들이 견디다 못해 남성들이 전쟁을 완전히 중단할 때까지 부부관계를 갖지 않기로 선언하여 결국 남성들이 양손을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국가 간에 평화를 가져오는 힘을 가져올 정도로 그 위력이 정말 대단하다.

또 자고로 남자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 여자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명심보감에도 남자는 酒色財氣(주색재기)를 주의하라는 경귀가 있다. 傾國之色(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의 신묘한 마력은 특히 여자가 남자에게 체력적인 열세인 것을 만회하도록 하느님이 마련해 준 공의로운 산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40. 핏줄의 힘과 부부

 

우리나라에서는 혈족 간의 가까운 정도를 촌수로 나타낸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나 참 잘된 측도라고 생각한다. 친족법에서도 핏줄이 통하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혈족과 인척으로 나누어서 친족을 정의한다. 법률상의 효과를 가져오는 친족으로서 피가 통하는 혈족은 좀 더 먼 촌수까지 친족으로 인정하지만 핏줄이 통하지 않는 인척은 그 범위가 그에 훨씬 못 미친다.

2촌인 친형제 간은 매우 가까운 관계인데, 이것은 같은 부모 슬하에 같은 지붕에서 자란 것이라는 결정적 공통점 외에도 피의 공통 인자가 3촌 이하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형제가 태어나자마자 따로 양육되어 성인이 되어서야 만났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는 3촌이나 4촌보다 더 가까운 정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피 때문이다. 여기서 피가 과연 무엇이기에 그렇게 강한 자력을 지니는 것인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피는 몸의 13분의 1(체중의 약 8%)이라고 하는데, 피도 끊임없이 바뀌고 교체되는 것이고 보면 출생 시에 부모의 피의 인자의 일부를 받아 태어난다 하더라도 성인이 될수록 부모의 피의 인자의 보유율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은 근본 인자는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그 공통인자가 그렇게 서로를 끌어당기는 모양이다. 사실 형제들 중에는 나이 차이가 많아서 같은 환경에서 자란 기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경우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형제는 형제이며 세상에서 둘도 없이 가까운 관계임은 틀림없다.

옛말에 보면 부부는 의복과 같고, 형제는 수족과 같다. 의복이 찢어지면 새 옷으로 바꿔 입으면 되지만, 형제는 수족이 잘리면 이를 고칠 수가 없다’(夫婦 爲衣服 兄弟 爲手足, 衣服 破時 更新 手足斷處 難可束 부부 위의복 형제 위수족 의복 파시 경신 수족단처 난가속)라고 하여 부부 사이보다도 형제 사이를 더 중히 여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남녀 불평등 내지 부부 불평등의 사회에서는 아내보다 형제를 더 귀히 여겼음을 엿볼 수 있다.

산아제한이라는 것이 없던 예전에는 부모가 생각 없이 수태되는 대로 자식을 낳아 맏이와 막내 간에는 스무 살 이상이나 차이가 나기도 하고, 심지어 맏이의 자식이 막내보다 먼저 나서 나이 어린 아재비가 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맏이나 형들은 막내나 기타 동생들이 태어난 데 대하여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단지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집에서 자랐거나 말거나 부양의 책임을 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맏이는 아버지나 가장을 대신하는 위치에서 집안 대소사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법적인 의무가 아니고 관습적이지만, 그 이전에 피가 부과하는 책임이기도 하였다.

형이 자신의 개인적 영달을 포기하고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아 왔으며, 특히 한국의 근대화 시대에 누나들은 소위 공순이라고 하여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면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아껴서 돈을 모아 고향의 동생들 학비를 조달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 왔지 않은가? 어찌 보면 좀 억울한 면이 있기도 한 것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낳는 데 직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하였으니 기를 책임도 당연히 따른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형은 책임의 근거가 모호하다고 할 수도 있다.

형제니까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근거는? 부모가 같으니까? 그것이 왜 부양책임의 근거가 되는 것일까? 핏줄 때문이라고? ?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것은 답이라고 할 수 없다. 관습이고 전통이고 간에 틀린 것이라면 지킬 필요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서부터 같은 부모와 함께 같은 지붕 아래에서 같은 솥의 밥을 먹고, 자라면서 온갖 희로애락을 나누며 자란 동기간이라면 정이 들 대로 들어서 스스로 부양책임을 지려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피 때문이라기보다는 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까지 부양하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비단 형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동생의 경우에도 형이 어렵게 살면 도와야 하는 것이 도의적 의무라고 생각되는데 왜 그러한가? 아니, 그 전에 도우려는 연민의 마음이 더 솟아나기 마련인데 왜 그러한가?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사람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거나 들어도 자연스럽게 연민의 정이 솟아나지만 동기간에는 그 정도가 훨씬 더하며 게다가 관습적 의무감마저 느끼게 되어 그 정도가 한층 더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그 답은 피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흔한 말로 피가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지 않는가? 피에는 아직 과학이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뭔가 야릇한 신비의 힘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성경에서는 도처에서 피는 곧 생명이다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레위 17:11, 14; 신명기 12:23) 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적혈구가 있어서 헤모글로빈을 통하여 산소가 몸 곳곳 구석구석까지 공급되게 하고 영양소도 공급되게 하므로 생물학적으로 이 말이 맞지만, 그 외에도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을 결정하는 요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동물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육식동물처럼 사나운 기질이 다분하고, 반면에 채식주의자는 초식동물처럼 온순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또 무언가 피의 공통 요소끼리 강력한 磁性(자성)을 가지는 인자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추리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부부간에는 몇 촌일까? 흔히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아서 無寸(무촌)이라고 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0촌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1촌인 부모자식 간보다 더 가깝다는 의미에서 0촌이다. 한편 이혼하거나 갈라서면 남이라는 의미에서 다시 말하여 촌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0촌이다. 원래 0이라는 숫자가 갖는 이중적 의미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부부간을 0촌으로 한 것은 참으로 적확한 표현이며, 그러면서도 교훈적인 의미도 새겨 볼 수 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부부, 부끄러움 없이 서로 살을 섞으면서 서로 의지하며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을 맛보는 관계인 부부, 늙고 병들어 벽을 지고 있어도 없는 것보다는 더 나은 배우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서로 성격, 기질, 감정, 판단, 취향, 습관, 사고방식, 경향, 체질, 능력 등 마음이 맞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면 매일 매일 식사보다 더 정기적이고 필수적으로 다투고, 격론을 벌이고 마침내 주먹질까지 하게 되다가 심지어 원수처럼 되고 이혼은 물론 심지어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이 부부이다.

그래서 부부는 물과 같다. 부부싸움을 칼로 물 베기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소용없는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냉랭해지면 물이 얼 듯 얼음이 되어 쪼개진 얼음조각의 날카로움이 상대방의 폐부를 찔러대기도 한다. 물과 얼음은 단지 온도의 약간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빚어지는 양상은 판이하다. 10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마찬가지로 0촌과 無寸(무촌)은 종이 한 장 차이 같지만 각 양상은 극과 극이다. 부부는 남보다 더 멀어지는 촌수가 없는 無寸이 아니라, 1촌보다 가까운 0촌을 유지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0일 때 비로소 사랑이 피를 능가한다. 그러나 0이 까딱하면 로 변질될 수 있다. 그래서 옛사람이 부부를 형제보다 더 못한 관계라고 생각한 것 같다.

 

41. 노인 요양 병원을 방문하고 나서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던 6월의 어느 날 88세의 아는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을 찾았다. 들어서면서부터 메르스 때문에 손을 소독하고 겨드랑을 통하여 체온 검사를 받고, 내주는 마스크를 하고 할머니에게 갔다. 도중에 휴게실에 휠체어를 탄 노인들 스무 명가량이 한 대의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모두 호호백발에다 주름살이 가득하고 무표정하며 눈에 초점이 별로 없어 보이는 노인들이었는데 여든 안팎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나보다 불과 다섯 살 내지 열 살가량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섬뜩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 그것뿐이었다. 즉 죽음 말이다. 노인 아닌 사람이 아프면 치유의 희망을 가지고 빨리 나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지는데, 그래야 퇴원 후 활기차게 즐겁게 인생을 살아갈 것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퇴원 후 처리해야 할 일들, 가족이나 친지들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일, 취미생활을 계속할 일 등을 생각하면서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이 노인들은 그러한 일들이 없다. 기껏 이따금 의무적으로 찾아오는 문병객들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처리해야 할 일도 없고, 취미생활을 할 기력도 의지도 없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조차 즐거워 보이지 않는 것을 그들의 표정이 증명한다. 그저 무료하다 보니 그냥 눈길을 주고 있을 뿐이다.

할머니가 누워 있는 병실에는 모두 여섯 명의 할머니가 누워 있었는데, 내가 아는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 누워서 자는지, 심하게 말하여 죽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 할머니와 이야기하고 있는 약 1시간 동안 다른 할머니는 찍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렇게 그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휘둘러 보았다. 그래도 가끔 꿈틀거리기는 하였다. 분명히 살아 있기는 살아 있는 것이었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 있는 것인가? 살아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러다가 머지않아 그들은 차례차례 인생무대에서 퇴장할 것이다. 누군가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였지만, 실제 인생은 연극에 비하여 훨씬 잔인하다. 어느 글에서 본 바에 의하면 사람이 평생 살면서 웃고 기뻐하고 즐기며 행복감을 느끼며 보내는 시간이 총 30일에 불과하고, 반면에 울고 아프고 괴롭고 우울하고 슬프고 외롭게 보내는 시간은 평생이 아니라 매일 3시간 6분이나 된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이며, 어떻게 조사하여 그러한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전혀 배척할 수치는 아닌 것 같다. 이 얘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해 주었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엉터리라거나 과장된 것이라거나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상당히 그럴듯하다는 반응들이었다.

이것이 인생인가? 사람이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라면, 그리고 사람이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맞다면 하느님은 잔인한 분이다. 차라리 창조하지 않은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3,500년 전에 모세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의 시편 9010절은 이렇게 읊고 있다. ‘사람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것마저 수고와 슬픔뿐이며 신속히 날아가나이다이 성구는 당시에도 사람의 평균 수명이 7, 80이었다는 점을 알려 주고 있어 참으로 놀랍다. 그렇다면 현재 평균 수명과 비슷하다. 사람이 의학과 과학을 발전시켜서 평균 수명이 많이 늘었다고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않은가?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서 돌을 지내고서야 겨우 사람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돌잔치를 크게 벌이고, 그제야 출생 신고를 해서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두어 해 더 지날 때까지 두고 보다가 출생 신고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평균 수명이 매우 떨어진 것이다. 평균 수명이 유럽에서는 1700년대에 25세에, 1800년대에 35세에 불과하였다고 하는데, 그것도 바로 높은 영아 사망률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 현미경과 세균이 발견되고 보건과 예방에 관한 지식과 기술이 현저히 발전함에 따라서 영아 사망률이 급감함에 따라 평균 수명이 쑥쑥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옛날에도 일단 서너 살을 넘기면 위 성구처럼 여든까지 산 사람도 꽤 많았음을 우리는 역사적 인물들의 생애를 살피면서 알게 된다. 결국, 당시에도 성인들은 오늘날 정도에는 못 미치더라도 보통 6, 70은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성인들이라고 해서 과학이 발달한 것에 비추어 보면 수명이 그렇게 많이 연장된 것은 아니다. 요즈음 노인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가고 평균 수명도 늘어감에 따라 백 세를 바라본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하게 되고, 그래도 웃어넘기지 않게 되었지만, 노인들이 적어도 중년기처럼 인간적 대우를 받거나 스스로 중년처럼 처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이다. 지금도 빠르면 70, 늦어도 80이면 희망이 없는 여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나는 그 병원을 나서면서 상반되는 기분을 느꼈다. 첫째는 나도 머지않아, 길어야 10년 이내에 이러한 병원에서 여생을 맞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참담한 느낌이었고, 둘째는 내가 아직은 활동적으로 이렇게 문병까지 다니면서 중년처럼 행세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병원을 다녀온 이튿날 여든 안팎의 노인들 세 사람을 차례차례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그 병원의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면서, 지금처럼 밖에서 활보하며 무엇이든 할 일을 갖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을 참으로 행복하게 여길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 모두 동감을 표하였다. 그러면서 그중 한 사람은 이러다가 자는 잠에 가는 것이 가장 다행일 것이라고 흔히 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 이것이 인생인가?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살다가 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인 것? 창조된 것이라면 여기에 무슨 창조의 목적이 서려 있는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창조하지 않은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만이 끊임없이 고통을 느끼고 허무감에 짓눌리고 희로애락애오욕에 휘둘리면서 불과 7, 80년간 살다가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동물은 내가 왜 태어났는가? 왜 죽으며,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태어난 목적은 무엇인가? 개라면 내가 왜 이 집에서 짖고 있는가?’, 돼지라면 내가 왜 이 집에서 꿀꿀거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큰 고통과 갈등을 느끼지 않는데, 왜 유독 인간만이 그 종류도 수없이 다양하게 많은 고난, 고통, 갈등, 아픔, 수고, 슬픔, 아픔, 외로움, 괴로움, 억울함, 아쉬움, 분노 등을 느끼도록 되어 있는가? 인종이 진화된 것이라면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결코 진화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진화될수록 이러한 부정적인 것을 쉽게 해소할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진화론은 많은 의문을 풀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인 창조를 믿기에도 얼른 납득할 수 없는 의문이 남아 있지 않은가? 즉 전지전능하고 사랑이 많다고 일컬어지는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였다면 그러한 부정적인 것은 왜 그토록 많게 하였는가? 이 의문에 대하여 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정말 행복하게도 성경에는 그 답을 알려 준다. 우선 성경 중 창세기 128절에서는 놀라운 점을 알려 준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날짐승과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분명히 하느님은 사람에게 축복을 주기 위하여 창조하였다는 점을 알려 준다. 그것도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의 후반, 사람의 모든 생활의 조건을 다 갖춘 다음 사람을 창조하였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되었음을 이어지는 31절에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는 표현에서 알려 준다.

이렇게 창조된 첫 사람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을 창조 때부터 안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참으로 이치적이게도 그 중요한 의문에 대하여 바로 다음의 3장에서 알려 준다. 즉 사탄의 반역으로 인하여 처음에 첫 여자 하와가, 다음에 첫 남자 아담이 범죄하였고, 낙원인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고통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창세기 317절부터 19절까지는 이렇게 알려 준다. “그리고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먹어서는 안 된다고 내가 명령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는다. 너는 평생토록 고통 속에서 땅의 소출을 먹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너는 들의 식물을 먹어야 할 것이다.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것이며 결국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가 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만 알면 뭐하겠는가? 해결책 없는 원인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단지 원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주는 조그만 지식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역시 이치적으로 그것에 대한 해결책까지 자세하고도 깊이 있게, 탄복하게도 참으로 감읍의 눈물을 철철 흘릴 정도로 합리적으로 알려 준다. 이제 그것을 믿을 것인가 여부는 사람의 몫이다. 주사위는 사람에게 던져졌다. 하느님은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올 때 양팔을 한껏 벌리고 집 밖에까지 달려나가 맞이하는 아버지처럼(누가복음 15) 지금도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거기로 달려가고 가지 않고는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병원에서 나서면서 나는 단지 내가 활보하고 있음에서 오는 다행감 외에 더욱 행복하게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성경에서 알려 주는 참다운 희망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매우 현실적이며 매우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42. 언어 有感

 

지금 세계는 영어가 공통 언어로 되어 가고 있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영어권이 아닌 외국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도 영어는 제2 공용어의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영어를 모르고서는 어느 나라 어느 부문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는 무척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내 나이에도 틈틈이 영어를 듣고 있다. 꼭 무슨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흘려버릴 시간이라면 귀담아듣지는 않더라도 듣다 보면 깨알만큼이라도 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동양인으로서, 더욱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는 중국과 일본을 지척에 두고 있는 지역에 살면서 중국어와 일본어도 조금은 알아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역시 소일 삼아 듣고 있다.

그러면서 언어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외국어는 물론 모국어조차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글을 즐겨 쓰면서도 맞춤법이나 어법에 미심쩍어하고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면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통상의 생활회화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면 잘할 수 있다. 특별히 언어 교육을 받지 않고서도 천성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를 배울라치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이렇게 어려운 언어를 다섯 살도 안 되는 아이들이 어떻게 저절로 익혀 가는지 참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어느 문헌에 의하면 이 세상에 언어의 종류가 무려 6,912개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개중에는 수백 명밖에 쓰지 않는 저 아프리카 어느 깊은 곳의 토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 포함해서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놀라운 점은 그 언어들이 모두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위 토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역시 그 토인들이 연구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언어의 문법적 구조는 영어에 못지않게 복잡하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각 종족마다 고유의 언어를, 그리고 그 복잡한 언어를 특별한 습득 과정도 거치지 않고 저절로 사용하게 되었는지 매우 신기롭기만 하다.

인간의 이성이나 추리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거나 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 보통 기적이라고 하거나 하느님을 갖다 대기 일쑤인데, 사실 神奇’(신기)라는 단어의 뜻이 신의 기이한 일인 것처럼 신 또는 하느님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공 언어라는 것도 있는데 에스페란토어 외에는 거의 다 사멸되었고, 그중 잘 만들어졌다는 에스페란토어마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것은 자연 언어에 비하면 언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엉성하고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도 인간이 고심하여 창안한 언어보다도 자연 언어, 그것도 가장 사용 인구가 적은 언어라도 월등히 낫다면 모든 자연 언어는 결국 하느님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침 이런 추리에 서광을 비추어 주는 것이 성경이다. 창세기 116절과 7절은 이렇게 알려 준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그들이 한 백성이고 언어가 하나이므로 이런 일을 시작했구나. 이제는 그들이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겠다. !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그들이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그러고 나서 여호와는 그들이 각각 다른 언어를 갖고 세상 전역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그래서 전 세계의 각 민족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언어학적인 연구 결과와도 일치한다고 한다. 각 언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귀일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창세기의 필자는 모세이고 그 기록 연대는 기원전 1513년이다. 당시 학문이라고는 전혀 불모지인 데다 모세가 언어학자이거나 역사학자도 아니고 어떤 전문가도 아니다. 역시 하느님이 모세로 하여금 이를 기록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잠시 빗나간 얘기지만, 인종의 기원도 역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시작된다. 세상의 수많은 인종의 기원을 인종학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렇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하여도 창세기 10장에서 이미 알려 주고 있다. 모세는 또한 인종학자도 아니지만 그 점을 어떻게 알고서 그렇게 기록하였을까? 결론은 언어의 경우와 같다. 즉 하느님이 모세로 하여금 이를 기록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자면 이렇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의 남편은 일흔이 되도록 무신론자였는데, 단지 그 자신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아내의 신앙에 대하여까지 극심하게 반대하여 왔다. 그는 세상에서는 상당히 출세라는 것을 한 편이어서 자신의 인생행로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만큼 자신의 무신론적 신념에 반하는 아내의 신앙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왔고 심지어 박해까지 하여 왔다. 그러다가 그 아내가 소개한 노련한 장로가 그 남편과 만나서 서재에서 대화를 하던 도중 화제가 인종과 언어의 기원에 미치게 되었다. 그 장로는 마침 그 서재에 있던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가리키며 그 남편더러 인종과 언어 항목을 찾아볼 것을 권하였다. 거기에는 인종과 언어의 기원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다음에 그 장로는 성경을 펴서 바로 위 창세기 10장과 11장을 그 남편에게 보여 주었다.

그 남편은 저절로 탄성을 발하였다. 현대 학문의 성과로서 밝혀진 그 기원이 3,500년 전에 기록되었다는 성경에 명백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서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아내어 썼다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하느님이 성령을 사용하여 모세에게 영감을 부어 주어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 남편은 더 이상 성경이 그냥 사람이 쓴 일반 책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때부터 성경 공부를 시작하여 유신론자가 되었다.

그렇다. 언어의 신기함만 좀 들여다보면 그것이 하느님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언어의 구조나 문법 같은 것을 보면 어느 언어든 일정하고도 정교한 규칙이, 그것도 매우 복잡하게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어족을 비롯하여 인도유럽어족, 일본어족 등등 언어학상으로 수많은 어족으로 분류하지만,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흡사한 규칙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증좌이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오지 같은 데서 원시적 생활을 하고 있는 원주민들 중에는 학문은 물론 문자도 없이 생활하는 참으로 미개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문법을 창안해 낸다는 것은 마치 아이가 달에 갔다 온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이라고만 한다면 규칙성을 발견할 수 없어야 한다. 그저 우연히 생겨난 것에 무슨 질서와 규칙이 있겠는가? 그러나 자연조차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어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강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이 지니는 그 신묘막측한 운행법칙과 정교한 질서가 단지 우연의 산물이라고 하면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듯이, 언어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혹자는 인간의 3대 특성을 언어, 기술 그리고 문화라고 하였다. 기술과 문화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언어의 경우 전술한바 이유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는 데는 주저한다. 장구한 세월 동안 조금씩 조금씩 살이 붙어 나가듯 언어가 제 모습을 갖추어 나감에 따라 인간의 이성에 맞추어 말에 규칙이 생기고 단어가 늘어나면서 언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고 추리하기도 한다. 이른바 언어의 진화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어는 당초부터 현재에 못지않은 복잡한 구조의 문법과 어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보면 진화론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히브리어이다.

고대 히브리어는 알파벳이 불과 22자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까지 통용되었고, 현재 통용되고 있는 모든 언어 중에도 가장 아름답고 함축적이며 잘 된 언어라고 한다. 프랑스어가 노래하듯 아름답게 들린다고 하지만, 히브리어 앞에서는 깡통 두드리는 소리에 불과하며, 마치 나이팅게일 앞에서 참새가 지저귀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한다. 언어가 진화되어 왔다면 지금쯤 우리가 쓰고 있는 주요 언어는 최상의 것이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언어의 존재의 영예는 창조주인 하느님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43. 말은 곧 그 사람이다

 

인간의 특장 중 하나가 말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부모는 아기가 말을 하기 시작할 때 그렇게 기뻐할 수 없다. 맨 처음 엄마를 말하고 다음에 아빠를 말하면서 점점 어휘를 늘여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아기를 키우는 고달픔을 반이나마 씻어 준다. 반대로 돌이 지나고 두 돌이 지나도록 말을 하지 못하면 걱정이 크게 늘어난다. 어느 천재처럼 네 살이 되어서야 말을 하기 시작한 특이한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그때까지 말을 하지 않을 때에는 부모의 걱정이 여간 아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거나 세 치 혀만 있으면 산다는 말은 말의 중요성과 가치를 생생하게 알려 준다. 이처럼 말은 인간 생활의 필수적 요소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내향성인 사람이 각광을 받았고 말의 위력에 대하여는 현대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밀턴이나 쇼펜하우어도 내향적인 사람을 지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내향적인 사람은 통찰과 몰입에 유리하고 세상의 자극에 민감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2차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도시가 더 발달하고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외향성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고, 많은 사람들과 협력하거나 설득하거나 경쟁하려면 말하는 능력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 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옛날에도 중국의 소진과 장의처럼 뛰어난 외교가 중에는 언변으로 출세한 사람도 있었고, 대장부의 요건으로 身言書判(신언서판)이라고 하여 언변도 꼽은 것을 보면 말의 중요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터키와 러시아 간의 러토전쟁에서 터키가 패전한 후 베를린 회담에서 터키인들의 민족적 특성인 눌변 때문에 러시아에 농락당하여 터키가 많은 손해를 본 것도 말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민주라는 말대로 국민이 주인이므로 국민을 상대로 말하고 설득하는 일이 요체인 만큼 오늘날 말의 중요성은 옛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말은 넓은 의미에서 언어, 즉 구두언어와 문자언어를 포괄하는 것이긴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구두언어이다. 구두언어로서의 말은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서 당장에 설득할 수 있고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자극할 수도 있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잘 거르지 않고 내뱉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話者(화자)의 속마음을 생짜배기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 그런 만큼 한 번 한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어서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말을 잘한다는 것은 우선 평소에 많은 학식과 견문과 경험을 쌓아야 하고 묵상과 되새김을 통하여 생각의 깊이를 더하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인성을 도야하는 것도 게을리하여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어떤 상황하에서도, 또한 불쑥 튀어나오는 말조차도 그 깊이와 인품이 느껴지도록 되어야 말을 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신문에 보도되는 말들을 보면 사회의 지도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거칠고 저질인 비속어들이 내뱉어지는 것을 보고서 참으로 개탄하지 아니할 수 없다. 公人(공인)인 사람들이 거의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하고, 술김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말의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말은 곧 인격이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씨와 어조에는 인격이 소롯이 담겨 있다. 어느 사람이 경우에 도무지 닿지 않는 말을 하고서 실언임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하여 그 말을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도록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 실수를 한다고 둘러대지만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이다.

그래서 말은 참으로 중요하면서도 참으로 위험하다. 마치 양날의 칼과 같다. 그것을 일깨우는 경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의 야고보서에서는 특히 그 점을 길게 말하고 있다. 32절부터 12절까지는 이러하다. 조금 길긴 하지만 멋진 명언이라 인용한다. “우리는 모두 여러 번 걸려 넘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말에 있어서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며 온몸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의 입에 재갈을 물려 순종하게 만들면, 말의 온몸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밀려가도, 키잡이는 아주 작은 키로 배를 원하는 곳으로 조종합니다. 마찬가지로 혀도 몸의 작은 부분이지만 크게 우쭐댑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숲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과 같습니다. 혀는 우리 지체 가운데서 불의의 세계를 대표합니다.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 전체를 불태우며 게헨나의 불로 타오릅니다. 모든 종류의 들짐승과 새와 파충류와 바다의 생물은 사람에게 길들여지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제어하기 어렵고 해로우며, 죽음의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혀로 아버지이신 여호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같은 샘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 나의 형제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짠 물을 내는 샘도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참으로 여러 가지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지만, 다만 말에 있어서라도 실언을 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듯 말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재갈이나 배의 키처럼 혀는 조그만 것이지만 말()이나 배()를 조종할 수 있다. 불씨 하나가 큰 숲을 태우듯 말 한 마디로 큰 사고를 칠 수 있다. 또 혀는 일구이언을 如反掌(여반장)으로 한다. 甘呑苦吐(감탄고토)는 혀의 실제의 기능이지만, 비유적으로 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같은 입으로 어제와 오늘 서로 다른 말, 심지어 반대되는 말도 예사롭게 하고, 그러고서 차라리 잠자코 있으면 좀 나으련만 구차스럽게 궤변으로 변명을 하는 것을 너무 자주 보아 오지 않는가?

중국의 고전에서도 말에 주의할 것을 수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그중 몇 가지만 추려 본다.

訥於言而敏於行(눌어언이민어행, 말은 떠듬거리듯 하고 행동을 빨리 하라)

言悖而出者 亦悖而入(언패이출자 역패이입, 말이 거칠게 나가면 들어오는 말도 거칠다)

言必有中(언필유중, 말은 반드시 맞게 하라)

言不順卽事不成(언불순즉사불성,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有德者 必有言(유덕자 필유언,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도 맞다)

半句非言 汚損平生之德(반구비언 오손평생지덕, 반 마디라도 천한 말을 하면 평생 쌓은 덕을 해친다)

一言不重 千語無用(일언부중 천어무용, 한 마디라도 틀린 말을 하면 천 마디가 쓸모없다)

口舌者 禍患之門 滅身之斧(구설자 화환지문 멸신지부, 입과 혀라는 것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요, 몸을 망치는 도끼이다.)

利人之言暖如綿暑 傷人之語利如荊蕀 一言半口重値千金 一語傷人痛如刀割(이인지언난여면서 상인지어이여형국 일언반구중치천금 일어상인통여도할,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뜻하기 솜과 같고, 사람을 해롭게 하는 말은 가시가 찌르는 것과 같다. 한 마디 말이라도 천금의 무게가 있고, 한 마디 말이라도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게 한다)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구시상인부 언시할설도,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다)

言行相違 辱及于先 行不如言 辱及于身 (언행상위 욕급우선 행불여언 욕급우신, 말과 행동이 다르면 욕이 선영에 미치고, 행동과 말이 다르면 욕이 몸에 미친다)

非法弗[보다 강함]言 非道不行(비법불언 비도불행, 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하지 말고, 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지 말라)

君者之言寡而實 小人之言多而虛(군자지언과이실 소인지언다이허, 군자의 말은 실수가 적고, 소인의 말은 잘못이 많다)

言勿異於行 行勿異於言 言行相符 謂之正人 言行相悖 謂之小人(언물이어행 행물이어언 언행상부 위지정인 언행상패 위지소인, 말은 행동과 달라서 안 되고, 행동은 말과 달라서 안 되며, 언행이 일치하면 바른 사람이라고 하고, 언행이 다르면 소인이라고 한다)

與人善言暖於布帛 傷人以言 甚於矛戟(여인선언난어포백 상인이언 심어모극, 남에게 좋은 말을 함은 비단보다 더 따뜻하게 하고, 남을 다치게 하는 말은 창보다 더 아프다)

人之過失 多由言語 言必忠信 發必已時(인지과실 다유언어 언필충신 빌필이시, 사람의 잘못은 주로 말에 비롯하고, 말은 반드시 충실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반드시 때에 맞게 하여야 한다)

敏於事而愼於言(민어사이신어언, 일은 빠르게 하고, 말은 신중하게 하라)

心定者 言寡 定心 自寡言始(심정자 언과 정심 자과언시,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말수가 적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은 말을 적게 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 말의 다른 문제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전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한 단어가 단일의 뜻을 갖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처음에는 단일의 뜻을 지녔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뜻이 변화되거나 다른 뜻도 지니게 되거나 비유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다른 쓰임새를 갖기도 한다. 그래서 화자가 의도한 뜻을 엉뚱하게 알아들어 오해를 하고 분쟁이 일어나는 예도 심심찮게 본다. 그런가 하면 한편 화자가 애초 의도한 대로 상대방이 알아듣고서 발끈하였을 때 말의 그러한 애매성을 빙자하여 황급히 다른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둘러대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경우도 왕왕 볼 수 있다. 또 처음부터 그러한 변명을 할 채비를 하고 저질의 말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말의 한계를 악용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속뜻이 없다 해도 말하는 자의 뜻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것도 말의 한계이다. 그래서 한 몸이라고 하는 부부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똑같은 단어를 쓰는데도 다른 뜻으로 알아들어 오해하고, 표현이 충분하지 못하거나 정확하지 못하여 또 오해하고, 각자 선입관을 갖고 이를 전제로 하여 말하거나 듣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여 큰 오해를 빚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의 속성이 그렇다 하더라도 부부간에조차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어느 글에서는 부부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외로움 중에서도 가장 외로운 것이라고 하였다. 가장 외로운 것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상당히 중대한 문제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또 말에는 어조로써 감정을 담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화자의 말은 단어의 사전적 뜻 외에도 그의 정서, 경험, 판단, 가치관, 직관 등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어서 書不盡言 言不盡意’(서부진언 언부진의)라는 말대로 화자의 의도 전체를 전수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의 존재 가치는 돋보인다. 단지 사랑한다라는 말 한 마디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까? 그 말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말인가, 부부 또는 연인 간의 말인가, 몇 년간을 사귄 남녀 간의 말인가, 어느 장소에서 어느 때에 한 말인가, 경제상황이나 건강상태 그리고 감정상태는 어떠하였는가 등등 수많은 인자들에 따라 그 말의 색상과 명도와 채도가 다 달라진다. 즉 말은 색이다. 색깔의 종류가 수십만 가지이듯 말의 색깔도 수십만 가지이다. 전문 화가라면 색깔 간의 미묘한 차이도 가려낸다. 마찬가지로 말에 민감한 사람은 약간의 차이를 감지한다. 그것이 또한 다른 면에서는 말의 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은 소리 언어이다. 그 점에서는 음악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음색 역시 수만 가지이듯 말의 음색도 그렇다. 음악에 음정과 강약이 있듯이 말에는 어조나 톤과 강약이 있다. 음악에 있는 단조와 장조도 말에 있다. 그래서 말을 듣는 자의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느끼는 호감도에 대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소리가 38퍼센트, 표정 35퍼센트, 태도 20퍼센트 등이라고 한다. 즉 언어를 싣는 목소리까지 신경 써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말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선물이다. 어떤 선물도 만능인 것이 없고 보면 말의 한계 때문에 말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한계를 예의 인식하고 그 부정적인 면에 주의하면서 그 선물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그 선물을 주신 이에 대한 감사함을 나타내는 일일 것이다.

44. 하와의 말을 들은 아담

 

성경을 보면서 얼른 수긍이 가지 않는 사건은 첫 조상 아담이 에덴에서 하와의 권유로 소위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믿지 않거나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그 사건이 애초 터무니없는 것이며 그저 흥밋거리로 누군가가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그것의 사실 여부에 관심이 없지만,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건을 매우 심각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즉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하여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성경의 모든 기록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과는 별도 문제이다. 현실적으로 기적적인 사건이 간혹 일어나는데, 그것이 일어나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희한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평균인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분명히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 그 중대한 사건에 대하여 꼼꼼하게 생각해 보자. 우선 성경의 맨 첫 책인 창세기 중에서 제2장의 16절과 17절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만족할 만큼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첫 사람 아담을 말한다. 아담은 그 지엄하신 명령을 얼마 후에 생겨난 아내인 하와에게 전하였다. 그래서 하와는 뱀의 꾐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하였다. 32절과 3절은 이러하다. 여자가 뱀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들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너희는 그것을 먹어서도 안 되고 만져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와는 분명히 그 명령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한 술 더 떠서, ‘만져서도 안 된다고까지 말하였다. 그런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먹었고, 더 나아가 남편인 아담에게도 그것을 먹을 것을 권유하였다. 뱀이 말한 대로 그녀가 그 열매를 먹으면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건 하지 않았건, 그녀가 아담에게 그렇게 말하였을 때, 아담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과 슬픔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이제 사랑하는 아내가 머지않아 죽게 된 것이다. 아담이 하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성경에서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있지만, 전후의 경위를 보면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선 하와는 지금의 세계적 미인이나 여배우가 감히 하와의 신 벗어 놓은 데도 못 따라갈 정도로 아름다웠을 것임이 틀림없다. 창조주 여호와가 완벽하게 사람을 만들었고, 다 만들고 나서 심히 좋았더라고 기뻐하였으며(창세기 131), 첫 조상이 범죄한 뒤 인간에게 불완전성이 유전되기 시작하여 불완전한 사람끼리 수천 년간 계속하여 결혼하여 와서 그 불완전성이 대대로 유전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미인과는 그 아름다움이나 여타 완전성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내와 아름다운 낙원 같은 동산에서 함께 살아왔으니까 아담이 하와를 얼마나 사랑했을는지 두말하면 잔소리이지 않겠는가!

그러한 아내가 죽게 생겼으니 아담도 함께 죽으려는 생각이 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엄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아담마저 거역할 염은 얼른 들지 않았을 것이므로 하와가 그것을 먹을 것을 거듭 권하였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한참 망설였을 것이다. 아니면 아내 없이 혼자 사는 세상은 적막하기 짝이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전자의 경우라면 하와는 자기 혼자만 죽으라는 말이냐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면서 애끊는 울음을 목청껏 울었을는지 모른다. 아마 아담이 그 열매를 먹을 때까지 연신 울어댔을는지 모른다. 자고로 여자의 무기는 우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상상해 보라. 지극히 사랑하고 절세미인인 아내가 구슬프게 울면서 자꾸 졸라대면 여간 心志(심지)가 강한 남성이 아니고서는 여자의 요청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한 좋은 예를 한참 뒤에 일어난 삼손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들릴라라는 삼손의 애인이 블레셋 사람의 꾐에 빠져 삼손의 그 무서운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려고 갖은 교태와 꾀를 다 부리고 강권에 강권을 거듭하는 바람에 삼손은 마침내 그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사기(16:16, 17)에서 그 사건을 알 수 있는데, ‘그 여자가 날마다 삼손을 성가시게 하고 졸라 대므로, 그가 지겨워 죽을 지경이 되었다. 마침내 삼손이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라고 알려 준다. 이렇게 자고로 여자는 졸라대는 특성을 갖고 있고, 그것은 여자의 울음과 함께 여자의 주무기가 되어 온 것이다. 완력이 약한 여자에게 하느님은 특이한 힘을 주신 것이다.

어쨌든 하와가 아담에 대하여 강권에 강권을 거듭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아담이 하와와 같이 죽을 셈으로, 다시 말하면 情死(정사) 쪽을 택하였을 것이다. 아마 전자 쪽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혹자는 이런 의문을 또 제기한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100% 믿는 사람이라면 에덴동산에 살면서 엄청난 축복을 받아 온 아담의 경우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당장 죽을 길을 택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여자의 미태나 교태가 남자를 얼마나 꼼짝달싹 못 하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휘어잡아 정치를 좌지우지한 예는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그래서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고, 여자는 그러한 남자를 지배한다라는 말이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그중 한 예로서 당나라의 양귀비를 들 수 있다. ‘開元(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뛰어난 정치를 한 당나라의 현종이 61세의 나이에 불구하고 오죽하면 며느리인 27세의 양귀비를 아내로 맞아들였겠는가? 그 양귀비의 교태에 대하여 백낙천은 장한가에서 이렇게 읊었다. ‘回首一笑百媚生(회수일소백미생)’-고개를 한 번 돌려 살짝 웃으면 온갖 교태가 일어난다. 현종은 양귀비와 놀아나면서부터 그 잘하던 정치를 팽개치고 영 딴사람이 되었다. 당시 왕비로서는 왕의 환심을 절대적으로 지속적으로 얻는 것이 자기가 살아남는 길이기도 했기에 아마 온갖 기교와 媚態(미태)를 다 부려서 현종을 녹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귀비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고 고혹적이었을 하와가 아담을 자기 뜻대로 하게 만든 것도 그리 어려웠을 것 같지 않다. 여자의 그 유혹하는 힘은 어쩌면 남자의 완력보다도 훨씬 더 힘이 셀지 모른다. 그래서 자고로 여자를 조심하라는 경구가 자주 회자되는 것이다. 대장부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酒色財氣(주색재기)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所以然(소이연)에서이다.

 

45. 교육과 변화의 상관관계

 

교육의 가치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서양의 대표적 고전인 성경에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나 그것을 아들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손에 매어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 삼고 이마에 머리띠 같은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당신의 집 문기둥과 문에 기록하십시오’(신명기 67절 내지 9)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이 기원전 1473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교육의 중요성은 옛날 옛적부터 강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이보다는 훨씬 뒤이긴 하지만 명심보감에 至樂莫如讀書 至要莫如敎子’(지락막여독서 지요막여교자)라고 함으로써 역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외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고전에서 그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음은 贅言(췌언)을 요하지 아니한다.

그런데 과연 교육이 인간의 심성을 도야하고 도덕성을 함양하는 데에도 이바지해 왔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는 무조건 긍정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할 것이다. 인간 역사를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 소위 文人(문인)이라는 사람들이 최고 권력을 잡았거나, 그 위에 왕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권은 그들이 갖고 매사에 쥐락펴락해 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자신의 개인적 이욕과 영달을 위하여 그 지식이라는 알량한 것을 사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양의 유학에서는 윤리적인 면을 매우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 임금으로서, 신하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형제로서, 친구로서, 기타 대인관계에 있어서 행해야 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수없이 강조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중에는 지금 읽어 보아도 무릎을 칠 만한 명언들이 수다하게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교육을 많이 받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한 사람들이 정치의 일선에서 나라를 이끌어 왔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배운 그 좋은 말씀대로 행동한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학교를 나오고 대학원까지 수료하고 석박사 학위를 땄다고 해서 그가 인격적으로 그만큼 존경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윤리적으로도 훌륭하지는 않다. 어쩌면 지식인일수록 더 영리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교묘하게 처신하는 길을 더 잘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도덕성이 부끄러울 정도인 점은 고위 관료에 대한 청문회에서 차마 듣기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병역 기피, 이중 국적, 탈세 등등, 별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근처에도 가지 못할 일들을 한 사람이 여러 건씩 자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도 그들에 전혀 못지않다. 오죽하면 ‘10만 원을 훔치면 감옥에 가지만, 10억 원을 해 먹으면 국회로 간다는 말이 생기겠는가!

또한, 학교 내의 분위기는 물론 사회의 분위기도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고 있어서, 남을 짓밟아야만 자기가 올라설 수 있는 경쟁심이 만연해 있어서 정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진정한 친구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대학교에서는 출세제일주의를 비롯하여 시대를 앞서가는 나쁜 사회적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소수이지만 양식과 용기를 갖춘 일부 사람들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기도 한다. 실제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 중에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찰스 디킨스, 조지 버나드 쇼, 미국의 워싱턴, 제퍼슨, 링컨, 에디슨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비록 대학 교육을 받지 않고, 미국의 교육자 윌리엄 펠프스가 말한바, ‘성경 교육 없는 대학 교육보다 대학 없는 성경 교육이 더 낫다고 한 것처럼 독학으로 성경을 탐독하고, 동양에서는 45경을 독파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도덕성의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낫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성경이나 45경에 있는 말들은 지금 보아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 많아서, 이런 말들을 배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괴물 같은 짓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할 정도이지만, 교육의 한계성을 시인한다면 슬픈 체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군가 사람을 강제적 비전 또는 비극적 관점에서 보아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반대로 비강제적 비전 또는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변한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후자는 아무래도 현실을 직시한 것이라기보다는 희망적 생각의 토대에서 말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는 교육의 가치가 크게 퇴색될 것이며, 나아가 인류의 장래가 암담할 것이기 때문에 희망을 위한 희망의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요즈음에는 학교에서 도덕이나 윤리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명문대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하여는 득점과 무관한 그러한 과목은 공허한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과목을 이수한 앞 세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 가면서 제대로 잘된 본을 보이지 못하여 왔기 때문에 그러한 과목의 이수를 주장하는 것도 설득력이 약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나마 없어서는 조금이라도 기대어 볼 데가 정말 없어지는 것 같다. 콩나물 물 주듯, 좋은 말씀을 자꾸 되풀이하다 보면 귀에 못이 박혀서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게 있을 것이고, 그것이 때로는 귀를 간질여서 나쁜 행동을 제어하는 데 조금이라도 한 몫을 담당하거나 좋은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팽팽한 천평을 기울이게 하는 데 한 알의 모래알 역할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생각건대, 교육의 무용론이 아니라 교육의 실용성에 있어서 획기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 100을 배워서 1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30을 배워서 5를 실천하는 것이 더 나은 교육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주입식 교육보다는 주동적, 창의적, 실천적 교육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46. 가치 있는 것들을 모르고 지냄

 

사람들은 이따금 자기가 가치 있는 것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지를 자문하곤 한다. 그러면서 아이()니하게도 이내 별 가치가 없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첫째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가치 있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쟁취하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그것을 추구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추구하다가도 그것이 이루어진 후 그 성과가 얼마나 지속적인지에 대하여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차례로 좀 더 살피건대, 먼저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아마 견해 차이가 좀 있겠지만, 일응 여러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많은 유익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유명한 정치가나 예술가와 사상가가 첫 손에 꼽힐 것 같다. 이를테면 세종대왕의 업적은 수다하게 많지만 그 중 한글 창제 하나만 해도 엄청나게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나 바흐의 음악 작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수백 년 동안 좋은 영향을 끼쳐 왔는가?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인류에게 대단히 좋은 유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인이니, 영웅이니 하면서 칭송해 왔고, 많은 사람들이 제2의 아무개를 꿈꾸면서 노력해 왔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소위 역사에 좋은 이름을 길이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몇 사람밖에 되지 않고, 아마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의 약 99.9%는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그가 이 땅에 살았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다. 그들은 가치 없는 사람들이며, 0.01%를 빛나게 하여 주기 위한 들러리나, 아니면 그만도 못한 허접쓰레기에 불과한 것인가?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점은 그 이름을 남긴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죽고 나면 그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가 죽어가는 침상에서 나는 비록 이 땅에서 사라지지만 나의 이름만은 대대세세 영원히 남아 있겠지하는 생각을 하거나 나의 장례식은 국장이나 그에 비길 만한 대규모의 장례식이 치러지겠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칸트가 임종 시 했다고 하는 ‘Es ist gut’을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만족해할까?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숨이 끊어지면 그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세월에 따라 사람들에게서 잊힐 것이며, 혹시 이 세상이 어떤 연유로 종말을 맞이한다면 그의 소위 업적이라는 것까지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도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가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 정도의 한계 내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전도서 95)는 점을 감안하면 그 가치라는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름을 남기는 것만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각자가 이룩한 조그만 성과들이 축적되고 그 위에 타인들의 작고 큰 업적들이 켜켜이 쌓여서 문화가 변천되고 발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개개인의 조그만 성과도 나름대로 제법 가치 있는 것일 수 있다. 근대 철학의 한 주류인 독일의 서남학파는 빈델반트나 리케르트가 주창한 바와 같이 제 가치는 학문 국가 법 예술 종교 등을 통하여 실현되며 가치의 총화를 바탕으로 인생의 참된 의미가 규정되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의 총화가 반드시 인류의 행복의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가치 있는 인생을 산다고 할 수 있을지, 선뜻 손을 들어 주기 어렵다.

둘째 가치 있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쟁취하는 길로 들어가는 것과 지속적으로 걸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엄청나게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고, 그것들을 겪고서도 나아가기는커녕 좌절하여 포기하거나 후퇴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며, 오랜 시일이 지나서 천신만고 겨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때쯤에는 그 가치가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서 처음의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이미 늙어 버려 그 가치가 주는 만족감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설사 안다 하더라도 노력하기를 단념하고 쉬운 길로 평범하게 걸어가는 것을 택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점들을 감안하면 그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적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노력을 들이고 수고하고 인내하였으면서도 그 성공이라는 것을 손에 쥐지 못한 경우가 아마 더 많을지도 모른다. 흔히 끈기와 오뚝이 같은 노력을 강조하면서 진공청소기를 시장에 내놓기까지 5년 동안 5,127개의 모형을 만들어 성공한 제임스 다이슨의 예를 들지만 그에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이고서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수다하게 많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보통의 의식주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이면 더 이상의 꿈을 꾸지 않고 가능하다면 아프지 않고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 가는 길을 택한다.

셋째 문제에 대하여는 첫째 문제를 언급하면서 잠시 건드리긴 하였지만, 인간이 이룩한 가치가 과연 얼마나 지속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업적이 당시나 얼마간의 후세에는 빛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뒤에 가서는 반대로 평가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칼 마르크스가 극심한 빈궁과 싸우면서 25년간이나 집필하다 책상에서 죽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자본론만큼 후세에 좋든 나쁘든 큰 영향을 끼친 책이 있을까? 그것은 당대에서 자본주의의 병폐와 해결책을 명쾌하게 밝힌 역작이라고 평가되었지만, 후세에 공산주의, 전쟁, 학살, 냉전, 군비 경쟁 등등 나쁜 결과를 그토록 많이 가져온 것도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차라리 저술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병 들어 죽은 세 아이의 관을 살 돈도 마련하지 못한 채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저술한 노력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차라리 피땀 흘려 기울인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 더 나을 뻔했다.

나는 성경을 알기 전만 해도 항상 참다운 가치라는 화두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술한 바와 같이 세상에서 추구하여야 할 것들 중에는 참다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내가 수긍할 만한 일들이 없었다. 인류의 大敵(대적) 죽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노력도 별로 의미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성경의 참뜻을 알게 되면서 인생의 목적 내지 참다운 의미를 찾게 되었다. 사실 창조주의 참뜻을 모르면서 사람 나름대로 생각하여 추구하는 것은 모두가 헛되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지혜의 왕 솔로몬이 갈파하였듯이 지극히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전도서 12) 그리고 사람들은 이성을 극도로 투명하게 하여 깊은 사색을 한 결과물로 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지만 정작 그 이성을 만들어 주신 분의 생각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창조주가 사람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 주제에 대한 창조주의 생각을 먼저 알아보고서 그 뜻에 자신의 행로를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골로새 28절에서는 철학을 초등학문이라고 폄하하였다. 사실 철학은 하느님이 성경을 통하여 밝힌 생각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사람들은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하여 알아보거나 감사해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 , , 공기 등 4대에 대하여 감사하는가? 감사한다면 그것들을 창조하신 분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부모에게 감사하는가? 감사한다면 부모의 부모, 그들의 부모, 그들의 부모첫 조상을 창조하신 분에게 감사하는가? 뿐만 아니라, 창조주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자비롭게 알려 주신 성경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감사하는가? 지금이라도 우리는 창조물들에 대하여 감사하고 부모에게 늘 감사하고 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께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솔로몬은 위의 전도서의 맨 끝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것을 들려주었으니, 결론은 이러하다. 참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참하느님께서는 모든 행위와 모든 감추어진 것이 선한지 악한지 판결하실 것이다.”(1213, 14)

 

47. 선녀와 나무꾼

 

어린 시절에 읽은 이야기에는 전설, 신화, 동화 따위가 있다. 현실적으로 있을 성싶지 않은 스토리인데도 어린 마음에는 그 황당함을 따지지 않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따질 지적 수준이 안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흥미 만점이기만 하였다. 그러다 좀 더 나이가 들면 그 이야기라는 것들이 모두 지어낸 것이고, 오로지 흥미 위주이거나 약간의 교훈점을 섞어서 황당함을 상쇄하는 것들임을 간파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따금 학구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 보긴 하지만 역시 그 사실성에 대하여는 전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성경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그 생각이 달라졌다. 이를테면 국민학교 시절의 교과서에 실려 있던 나무꾼과 선녀라는 이야기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완전히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리스 신화로 대표하는 각종의 신화라는 것이 역시 터무니없는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는 신과 사람과의 교류, 半神半人(반신반인)과 신 또는 사람과의 관계 등 신과 사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상상의 끝까지 달리는 스토리들이 전개된다. 그것을 읽었을 때, 신화라는 것은 원래 황당한 것이라 그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였고, 특히 그리스 신화는 대부분 로마에 수용되어 로마 신화가 되었고, 양자를 포괄하여 서양의 문화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르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는 신화에서 착상한 작품들이 대종을 이루고 문학에서도 상당 부분이 비유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범위 안에서 신화를 탐구하기도 한다.

도대체 신이 얼마나 많으며, 신들이 사람과 같은 희로애락애오욕의 7()을 과연 갖고 있는가 하는 의문들은 풀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성경에서 천사의 존재를 수없이 알려 주고 그들이 이따금 인간의 몸으로 現身(현신)하여 이 땅에 나타나기도 하고, 심지어 인간 여자와 성관계까지 가지기도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거한인 네피림이 출생하기도 하였다. 창세기 62절과 4절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참하느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택하는 사람을 모두 아내로 삼기 시작했다. ……그날에 네피림이 땅에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다. 그때에 참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계속 관계를 가졌고 이 딸들이 그들에게 아들들을 낳아 주었다. 이들은 고대의 용사들이었고 유명한 자들이었다.”

이러한 대사건이 결국 사람들의 세상을 악하게 만들었고, 하느님은 사람을 만든 것을 한탄하여 노아 시대에 대홍수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로부터 백여 년 후에 사람들은 또다시 땅끝까지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바벨탑을 하늘로 쌓아 올렸고 하느님은 진노하여 사람들이 더 이상 그 공사를 수행할 수 없도록 언어를 혼잡게 하였으며, 이제 더 이상 공동 작업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창세기 10장과 11장에서 알려 주는 인종과 언어의 기원이며, 이것은 현대의 인종학과 언어학의 과학적 탐구에 의하여서도 사실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약 150개 민족의 약 300개의 전설이라고 하는 것에 홍수 전설이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늘에 있는 영적 인격체, 즉 천사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육체를 옷 입고, 現身(현신)하여 나타난 일도 기록하고 있고(창세기 181, 2절과 191절부터 4절까지, 사사기 13), 예수도 영으로 부활된 후 그가 부활되었음을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육체로 나타난 일도 있다. 이러한 점들로 보아서 천사 내지 신은 본질은 靈體(영체)이지만 육체로 현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종래 신화나 전설이라고 하는 이야기들이 단지 지어낸 허구인 것만은 아니고, 다소 과장되었을는지는 몰라도 사실이거나 적어도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점이다. 단지 흥미 위주의 얘깃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라면 여태까지 우리가 알아 왔던 지식들의 근본 기초가 상당 부분 무너진다는 것이다. 사람들만의 관계로 엮어지는 세상에 엄연히 靈體(영체)가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 영체는 사람들이 막연히 믿고 있는, 아니 믿고 싶어 하는 혼령이 아니라, 실제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인격체로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만큼 육체를 가진 사람이나 동물보다 훨씬 뛰어나고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겠는가? 더욱이 그 영체 중에는 네피림을 낳은 천사들처럼 악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보면 부쩍 긴장이 되지 않는가?

또한,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 즉 혼백이 있기나 한 것처럼 수많은 심령술사나 점쟁이나 무당이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서 초혼 굿을 하고 죽은 자의 음성을 그대로 흉내 내어 죽은 자를 가장함으로써 유족들을 겁주고 그들로부터 거액을 뜯어내는 일도 모두 거짓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죽은 자의 혼이라는 것이 실은 악한 靈體(영체)들이 죽은 자를 가장하여 등장해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 나은 것일지 모를 혼백만의 세상에서 이를 흔히 사람들은 내세라든가, 하늘이라고 부른다이 세상보다 더 잘살게 된다는 것을 믿게 한다. 이것이 미신이라는 것을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들도 악한 靈體(영체)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더 확신하게 된다.

참으로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허황되게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쓸데없이 두려워하고 많은 비용과 정력을 탕진하는 부질없는 일들로부터 확실하게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일찍이 진리는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갈파하지 않았던가!(요한복음 832)

48. 영원한 생명

 

철강왕 카네기는 만년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파우스트의 도박을 해서라도 전 재산을 걸겠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하는 말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흔히 우스개로 하는 3대 거짓말 중의 하나가 노인이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좋다라고 하는 말이란다. 이 외에도 널리 알려진 전설 같은 이야기로,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하여 3천 명을 동쪽의 어느 섬으로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한결같이 사람은 오래 살기를 바란다. 현재 질병과 가난과 갖가지 고통과 번민으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당장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극한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자살을 결행하는 사람은 예외이다.

이렇듯 사람은 현재 평균 수명이 80세도 채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백수를 바라고 있고,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에 힘입어 그 이상까지를 바라보고 있다. 각종 문헌이나 신문기사 따위에 의하면 인간이 최대한 살 수 있는 나이를 140세까지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래 봤자 고작 140세이며, 위 카네기의 경우처럼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정도일 것이다. 그러면 정작 140세쯤 되었을 때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될까? 아마 틀림없이 지금의 70세쯤 되는 사람이 느끼는 것과 여전히 같은 심정일 것이다. 여기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오래오래, 어쩌면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을 타고 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은 족보나 가계라는 것을 만들어 죽고 나서도 자신의 이름이 대대로 잊히지 않기를 바라고,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면서 예술의 창작에 몰두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공연 등의 방법으로 그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의 그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정말, 사람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이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성경이다. 성경에는 영생이라든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가 30여 회나 나온다. 그것도 모두 현재의 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과문인지 모르지만 사람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떠한 종교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신화나 전설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 기껏해야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이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그저 상상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만 유독 영생이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개념을 왜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을 남발하면 자칫 성경 자체의 신빙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럴까? 사람을 현혹하기 위하여서나, 달콤한 미끼라면 차라리 믿을 수 있을 만한 것을 사용하여야 하는데 지나치게 얼토당토않은 것을 사용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그렇다면 성경이 그런 단어를 많이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고서도 사상 초유의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고 세계의 역사를 좌지우지하여 온 이유가 무엇일까? 상식을 훨씬 뛰어넘어 믿을 만한 어떤 근거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에는 그것을 확신할 만한 수많은 근거가 들어 있다. 우선 성경은 하느님이 성령으로 기록하게 한 책이다.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 역시 수많이 있지만, 그것에 관하여는 다른 기회에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성경은 하느님이 인간 필자 40여 명을 사용하여 성령으로 기록하게 한 책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글을 전개하기로 한다. 즉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이고 필자는 40여 명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우주의 창조주라는 내포를 지닌 개념이므로 일개 미물에 불과한 사람을 상대로 책까지 주시면서 거기에 거짓말을 기록하게 하였을 리는 전무하다. 성경이라는 책을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짓말을 기록하게 하였다는 것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시면서 그것에 유해한 성분을 주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가 하느님이라는 것만으로 거짓말할 수 없는하느님의 약속인 영생이 가능하다는 간명한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너무 간단해서 믿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보자. 개나 돼지나 소 등 가축이나 기타 짐승이 영원한 생명을 바랄까? 그들이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짐승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나타낸 행동으로 보아서 영생을 바라고 있다고 여겨질 만한 흔적이 전혀 없다. 사람은 역사를 기록하고, 비석을 세우고, 족보를 만들고, 건축물이나 예술 작품을 통하여 이름을 남기고, 종교를 통하여 생명을 연장하려 하고(비록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닐지라도), 건강을 엄청나게 챙기고……. 이렇듯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수많은 행위를 한다. 이 점을 성경의 전도서 311절에서는 하느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다라고 말하고 있다. 동물에 있어서는 그런 표현이 없다. 사람만이 태어나면서부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철이 들면서부터 영생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이 개개 사람에게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서, 실제로는 70이나 80세 정도만 살고서 죽게 만들었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태어날 때부터 그런 마음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때가 되면 죽음을 기다리고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되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하느님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마음을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사람은 애초부터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고 풀이하는 것이 더 이치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관점에서는 족히 가능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성경 중 창세기 2장을 들 수 있는데, 하느님은 첫 조상 아담에게 그가 살던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두 가지를 언급하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16, 17)고 일러 주셨는데, 그 말을 뒤집어 보면 그것을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의 담보로서 그 곁에 생명나무를 두신 것이다. 그 생명나무가 괜한 것이겠는가? 뒤에 첫 조상 부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그들이 그 생명나무에 접근할까 봐 그 입구에 화염검을 두었고 그룹 천사로 하여금 그것을 지키게 하셨다. 역시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면 이 성구들 역시 사람의 영생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인간의 뇌는 죽을 때까지 원래의 잠재 용량의 수만 분의 일 내지 수억 분의 일밖에 쓰지 못한다고 과학계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뇌를 거의 쓰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롤즈로이스 차를 수억 원에 구입하여 단지 1분간만 운전하고 폐차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재벌이라도 그런 짓을 하겠는가? 하물며 하느님이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겠는가? 또는 호화 객실 1천 개의 7성급 호텔을 수년간의 공사 끝에 지은 다음 그중 한 객실을 하룻밤만 사용하고서 호텔 전체를 폭파하는 것과 같다. 그것도 지상에 있는 그러한 호텔 모두를 그렇게 하다니, 말이 되는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생은 분명히 가능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쉽사리 믿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짧은 지식과 경험 때문이며, 그것에 터 잡은 강력한 선입관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1세기에 누군가가 사람이 달에 갔다 올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면 그를 한 사람이라도 믿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이루어졌다. 1세기에 누군가가 스마트폰 같은 기기에 관하여 말하였다면 돌아도 보통 돈 것이 아니라고 지탄받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이루어졌다. 1세기에 위와 같은 말을 한 것과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더 실현 불가능하다고 했겠는가? 결국, 모두 이루어진다.

그리고 흔히 영생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과학이라는 것이 현재의 수준으로 보아도 겨우 걸음마 하는 정도일 뿐이다. 아인슈타인도 현대 과학이 이룬 것은 달을 지면에서 보다가 지붕 위에 올라가서 보는 정도이다라고 한 것처럼 그 정도밖에 나아가지 않은 상태이다. 유명한 과학자 루이스 토마스 박사도 현대 과학이 이룬 업적은 인류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러한 과학으로써 영생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넌센스도 한참 넌센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세기의 과학으로 그것들을 가늠하는 것은 표주박으로 바다를 재는 것과 같다[이려측해 (以蠡測海)].

또 혹자는 지금까지 영원히 산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영생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것도 바로 전항에서 언급한 논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은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발명품은 그때까지는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사람과 물건과는 다르다고? 지금 동물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변종이나 신종을 출현시키고 있지 않은가? 유기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죽음의 원인을 알아내면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이 가능해질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컨대 암세포가 죽지 않는 것은 그 세포에 있는 텔로머라제라는 효소 때문인데, 이것이 시한폭탄의 꼬리처럼 생긴 텔로메레라는 것이 점점 줄어들어서 결국 그 세포가 사멸하게 하는 것을 막는다는 데서 착안하여 인간 세포에도 그와 유사한 뭔가를 생성시키려는 노력이 있다. 그 외에도 과학자들이 노화 내지 사망의 원인을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도 역시 성경은 빛을 비추어 준다. 즉 첫 조상의 범죄로 인하여 들어온 죽음의 원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하여 없앰으로써 영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로마서 5:12, 19) 이것을 믿으려면 성경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어야 하지만, 어쨌든 원인 제거의 방법이라는 것에 열쇠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하겠다.

결국, 관념론자의 말처럼 관념하는 것은 존재한다 사람이 언젠가 관념한 것은 다 이루어져 왔다. 20세기에 이루어진 수많은 과학적 발명품들은 훨씬 전에 인류가 상상했고 관념했던 것들에 불과하였다. 사람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만 관념하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상상으로써 무한정 꿈꿀 수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상상에도 한계가 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상상의 한계를 결국 하느님이 설정해 놓으셨고, 그 한계 내에서는 언젠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은 가능하다. 더욱이 그것은 인류 태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상상해 온 것이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의학적 근거를 보기로 하자. 요즈음 유전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우리가 더 이해하기 쉽게 되었다. 죽음이란 로마서 512절에 의하면 첫 조상의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인간에게 들어와서 후손에게 유전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이라는 유전병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유전병의 원인과 치유책을 생각해 보면 영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전학적으로 볼 때, 유전병은 녹내장이나 혈우병처럼 유전자 이상으로 인한 것과, 다운증후군처럼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것, 그리고 돌연변이로 인한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유전학이 더 발달하면 머지않아 유전병들의 전부 또는 일부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병의 유전적 요인이 제거되면 죽음이 사라질 것이 간명한 이치인데,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써는 되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이 때가 되면 유전자 조작에 의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역시 과학이 발달한 우리 시대에 영생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끝으로 성경적 근거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창세기 217절은 문리해석상 영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알려 준다. 그리고 창세기 29절에서 생명나무를 굳이 언급하고 있는데, 에덴동산에 있었을 수많은 나무들 중에 같은 절에서 언급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외에 나무 이름을 언급하는 것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그것도 두 나무를 나란히 언급함으로써 두 나무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하고 위 217절과 관련지어 보면 선악의 나무에 대한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면 생명나무로써 영생을 주실 것을 알 수 있다. 생명나무의 열매가 직접적으로 영생의 효력을 주든가, 아니면 그러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최소한 영생을 가져다주는 모종의 역할을 하거나 상징적 역할을 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할 것이다. 창세기 322절에서도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사는 일이 없도록이라고 기술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34절에서 사탄은 그 선악의 과일을 먹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함으로써 사탄 역시 영생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영생을 거듭 확인하였다. 거짓의 원조인 사탄이 만약 영생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느님의 사탕발림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점을 회심의 미소로써 논파하지 않았을 것인가? 사실이 아닌 것도 조작하여 거짓을 지어내는 자가 사탄인데, 영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 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을 것이 아닌가? 따라서 당시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를 포함하여 아무도 영생이라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않았고, 그것이 의당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로 하여금 매우 흥분하게 만드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그 시기가 목전에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49. 알파고

 

프로 최강 기사와 알파고 사이에 있었던 사상 초유의 바둑 대국은 시작 전보다 대국이 진행되면서, 그리고 한 국 두 국 진행되면서 그 파장이 예상을 훨씬 초월하여 전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시작 전에는 거의 대부분이 다섯 국 전국을 이세돌의 완승으로 예상하였고, 이세돌 본인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이 완승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세돌의 예상은 그의 태도로 보아서 단지 자신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짐짓 해 보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나 역시 그랬다.

도대체 바둑은 한 수마다 무궁무진한 수가 있고, 따라서 여태까지 같은 형태의 대국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며, 상하좌우 어느 쪽이든 한 칸만 다르게 두어도 그 후의 양상이 영 딴판이 되는 것이므로 사람의 뇌로써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수읽기가 어려운데, 기계가 어떻게, 그것도 세계 최강급의 기사와 대적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이다. 알파고의 알고리즘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바는 없지만, 대체로 수많은 대국의 기보를 저장하여 두었다가 주변의 돌들이 놓인 모양이 동일한 경우유사한 것으로는 안 될 것에 그 저장된 기보의 다음 수를 갖고 온다는 식이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유럽 최강 기사를 5전 전승으로 꺾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의아해하면서도 심심풀이로 결과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 대국이 시작 전부터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든 것은 각종 매스컴에서 일찌감치 크게 보도하고 있는 데다 대국일이 다가올수록 그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전날에는 웬 난리냐 싶도록 신문 방송에서 떠들어댔다. 나는 처음에는 무슨 장난인가 싶었는데, 매스컴에서 워낙 관심을 많이 가지다 보니까, 나도 그 의미가 점점 크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알파고가 이긴다면 그것은 큰 사건이었다. 주요 신문 1면에 대서특필할 만한 대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컴퓨터가 서양 장기, 즉 체스의 세계 챔피언을 이긴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체스와 바둑은 그 복잡성과 수의 미묘함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인데, 알파고가 만일 이세돌, 아니 인간을 이긴다면 음양의 두 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관심이 점차 고조되어 갔는데, 그러나 첫 대국은 실황중계를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이세돌은 첫판에서 돌을 던졌다. 알파고의 (신의 수)로 불계패한 것이다. 그제야 나는 놀란 나머지 녹화 영상을 보았다. 그 수가 나오기까지의 수순도 완벽하였다. 적어도 1, 아마 3단 격인 나의 기력에 비추어 나무랄 데가 없었다. 게다가 그 수가 놓이고 이세돌을 완전히 압도하였을 때에는 나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다음 날 신문 방송은 예상대로 난리였다. 어떤 신문은 성급하게 인간의 위기라고까지 진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매스컴의 논조는 이세돌이 아직 알파고의 수법에 적응되지 않았고, 알파고는 이세돌의 수많은 기보를 이미 다 검토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우연 정도로 돌리고 있었다. 사실 이세돌은 일방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투명인간과 싸우고 있는 격이었다. 정체를 잘 모르는, 따라서 알파고의 능력과 秘策(비책)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감감한 상태에서 벽과 싸우고 있었고, 표정과 감정의 기복을 전연 드러내지 않는 상대와 싸우고 있었다. 이제 전문가들의 예상도 점점 알파고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예상대로 알파고는 2국과 3국을 내리 불계승으로 이겨 53승으로 사실상 승부는 끝났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은 적어도 한국 사람은 모두이세돌을 응원하는 가운데 그는 제4국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어 귀중한 1승을 거두었고, 그는 일반적으로 불리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흑을 제5국에서 들겠다고 선언하여 인기를 더 모았다. 그러나 5국에서 접전 끝에 알파고가 이김으로써 전 국이 끝났다. 이세돌은 나름대로 대단히 선전하였다는 평이었다.

여기에서 놀라운 일을 또 하나 적어야 하겠다. 내가 구독하고 있는 한국 굴지의 신문은 시합 기간 내내 일주일 이상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5, 6면의 지면을 알파고와 이세돌 간의 대국에 관한 기사로 도배를 한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건대 단일 사건으로 이러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처참했던 세월호 사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과연 이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일까? 이것이 그렇게도 센세이셔널한 사건이란 말인가?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이 사건의 의미를 곰곰이 새겨 보았다. 비록 알파고는 전자기기이지만 그것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니까, 기계 대 인간의 대결이 아니라, 결국 인간 대 인간의 대결이 아닌가? 누군가 말했듯이 어느 쪽이 이기든 결국 인간의 승리라고 한 말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이세돌이 한 명언(?)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인류가 진 것이 아니라, 이세돌이 진 것일 뿐또한 많은 사람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에 의하여 언젠가 인간이 지배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점과 유사한 일들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부정의 변증법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물화, 조직화, 관리화된 현대 문명은 그 자체가 과거의 신과 마술적 존재나 조금도 다름없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고, 그리하여 신화의 세계로 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찍이 루쏘가 주창한 바와 같이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오늘날도, 아니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구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알파고를 만들어 낸 인간에 대하여 인간 예찬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인간을 만들어 낸 분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이 혀가 닳도록 예찬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보도된 신문이나 방송 그 어느 것에서도 그분에 대하여는 한 줄 언급한 것조차 볼 수 없었다. 진정 자연으로 돌아가려면 첫 인간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때까지 돌아가서 그 인간을 만든 분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50. 우주는 리듬

 

삼라만상에는 리듬이 있다. 온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네 계절은 만고불변의 리듬이다. 하기야 세상이 온통 뒤숭숭한 요즘에는 그것마저 조금 변화할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서 태양을 도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근본적인 리듬은 불변이다. 우리네 인생도 큰 리듬의 틀 속에 수많은 작은 리듬이 병행되거나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사람이 태어나서 점점 성장하여 20대 중반에 신체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되었다가 그때부터 점점 하강하여 장년기와 중년기를 거쳐 점점 쇠락해지면서 노년기로 접어든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도 영고성쇠가 있다.

사람의 경우 신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인 면에서도 기복이 있다. 전성기를 향해 발전해 가다가 정점에 도달하면 하락세로 반전되기 시작한다. 예외적으로 전성기에서 죽거나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서서히 상승하여 정점에서 반대로 서서히 하락한다. 그래서 인생을 계절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대체로 일치한다. 태어나서부터 청년기까지를 봄으로, 장년기를 여름으로, 중년기를 가을로, 노년기부터 사망까지를 겨울로 비유한다.

그리고 생체 리듬이라는 것도 있다. 피는 46초 만에 전신을 한 바퀴 돌고, 피부는 4주마다 완전히 새로 바뀐다. 수면 중에도 렘수면과 비렘수면이 90분마다 교체된다. 규칙적인 생활을 계속하면 생활 리듬이 형성되어서 생체 리듬과 조화를 이루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는 말은 이러한 관점에서도 지당한 말이다. 이렇듯 우리네 삶은 리듬을 바탕으로 하여 짜여 있기 때문에 리듬에 부합되는 것은 좋은 느낌을 주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북하거나 불편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기회에 있어서도 리듬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자주 실감한다. 인생에 있어서 좋은 기회는 서너 번 온다고 하는데, 이 기회를 잘 낚아채야 한다는 말도 있다. 기회의 신 오카시오는 이마 위에만 머리카락이 있고 정수리부터 뒤통수 쪽에는 머리카락이 없고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서 다가오는 기회는 빨리 잡아채어야 하지만 일단 놓치면 붙잡을 머리카락도 없고 날개로 재빨리 사라져서 잡지 못한다고 한다. 이렇듯 기회도 파도처럼 밀려 왔다 밀려간다. 증권 투자에 있어서도 이 리듬의 원칙은 적용된다. 이에 따라 기술적 분석의 핵심인 이동평균선이라는 것이 고안되었다. 단기로는 5일선부터 장기로는 60일선에 이르기까지 주가의 그래프를 보면, 주가라는 것도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오르내린다. 그래서 투자의 귀재라고 하는 워렌 버핏은 위기가 기회라고 하는 말을 남겼다. 주가가 형편없이 추락할 때, 바로 그때가 매수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가는 언젠가 반드시 오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수를 기피할 때 대량으로 매수하여 끈기 있게 기다리면 언젠가 짧게는 한두 달 이내에, 길게는 3, 4년 뒤에 반드시 반등한다. 그래서 그 무렵에는 대박이 터뜨려지는 것이다.

또 동네의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이소오에서부터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에 이르기까지 오르내리는 놀이 기구들이 많다. 높이 치솟았다가 급전직하 떨어지는 데서 써늘하고 짜릿한 스릴을 맛보는데 인기가 매우 높다. 이 역시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리는 리듬을 갖고 있는데, 이로써 보아도 사람들은 리듬을 타는 것을 좋아하고, 본능적으로 그러한 것에 끌리게 되어 있다. 요즈음 유행하는 서핑이라는 것도 같다. 사나운 바다 물결에 적절하게 기술적으로 편승하여 잘 오르내리면 서핑만큼 재미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이제 그 바다로 나가 보자.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물결만 자세히 응시하고 있어도 리듬을 느낀다. 바다는 사람을 두렵게 하면서도 무한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그 옛날 배라고는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 리드미칼한 바다의 마력에 끌려서 조각배를 만들어 조금씩 먼바다로 나아가 원양항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역시 리듬의 힘이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리듬의 양상을 보면, 우리는 생활의 기복에 있어서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자만하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모든 일에는 절정과 나락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절정에 있을 때 항상 주의를 게을리하여서는 안 되고, 반대로 나락에 떨어져 있을 때라도 너무 낙심하지 말고 절망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명한 사자성어인 塞翁之馬’(새옹지마)의 일화가 인생의 그런 면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예술 부면에 있어서 리듬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이 맨 처음으로 한 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로 되어 있는 점은 매우 흥미 있다. 창세기 223절은 이러하다. “드디어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이 나타났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최초의 여자인 하와를 보고서 처음으로 한 말이다. 물론 그 전에는 아담 혼자이었기 때문에 대화의 상대가 없었긴 하지만, 아마 혼잣말로도 무언가를 표현하였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하여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적어도 기록된 것으로는 최초가 라는 점은 그저 우연이라고 돌리기에는 무언가 놓치는 듯한 기분이다. 나아가 성경 내용의 약 10분의 1이 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시와 노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는 예술의 한 갈래로, 문학의 여러 양식들 가운데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인류가 지닌 모든 예술의 종류는 제천 의식에서 행해진 원시 종합 예술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러한 원시 종합 예술에서 먼저 민요와 무용이 갈라져 나왔고, 다시 민요에서 가락은 음악으로, 노랫말은 시로 갈라져 나왔다라고 백과사전은 설명한다. 이렇듯 시는 인류와 거의 동시에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사람은 리듬적인 것을 즐기고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시와 노래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일찌감치 자리잡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주와 인생이 리듬으로 짜여 있기 때문에 그것에 부합되는 시와 노래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예술에 있어서는 시를 다른 장르를 통합한 종합적인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음악이 표현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繪畵(회화)가 표상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면 시는 양자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며, 시를 음악이 있는 감광막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生者必滅’(생자필멸)이라는 것이 봄이 오면 반드시 겨울이 온다는 리듬의 이치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리듬의 법칙에서 예외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법칙이다. 현재 지구가 태양을 도는 범위 안에서는 리듬의 법칙이 작동될지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면 우주과학이 발견한 여러 가지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있듯이 生者必滅(생자필멸)의 법칙도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빛의 속도로 비행하는 물체 안에서는 시간이 정지한다는 그 유명한 상대성원리를 고려하면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리듬의 존재에 관하여 말하여 오다가 왜 갑자기 그것이 없는 별천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리듬에 의존하여 살아오고 있지만, 언젠가 리듬의 틀에서 벗어날 때 지금까지의 불멸의 여러 가지 법칙들도 무너지고 따라서 우리의 고정관념도 깨지고, 우리 쪽에서도 그것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生者必滅(생자필멸)의 법칙도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바닷가에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직선인 것과 같다. 즉 노자가 말한바 大方無隅(대방무우)인 것이다. 즉 가까이에서 보면 모난 것이라도 아주 멀리에서 보면, 또는 무한하게 확대하면 모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유클리드 기하학에서도 두 개의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가 아니라, 결국 만난다는 것을 증명한 것과도 같다. 이렇게 보면 거의 무한의 경지에 이르면 리듬이 해체되는 것이며,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발전적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영원한 생명또는 영생이라는 단어를 30회가량 언급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리듬에 맞추어 살아야 건강한 생활, 즐거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인간이 달에 갔다 온다든가, 컴퓨터를 만들고 인터넷을 하며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등, 몇십 년 전만 해도 생각조차, 엄두도 내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고정관념도 과감히 깨뜨려야 할 때가 되었지 않나 싶다.

! 리듬이여! 그 아름다운, 그 위대한 리듬이여! 그러나 우리가 어머니에게서 나서 어머니를 극복하여야 하듯, 리듬 위에서 생장하였지만 머지않아 그 리듬의 바탕에서 이륙하여 영원한 생명의 길로 비상하여야 할 것이다.

 

51. 본성이 충족되는 세상

 

사람의 본성을 알려면 미취학 어린이들, 幼兒(유아)를 관찰하면 된다. 예컨대 유아 두 명에게 빵을 나눠 줄 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 아이에게는 두 개를 주고 다른 아이에게는 한 개를 주면, 한 개 받은 아이는 필경 시큰둥하거나 뾰로통할 것이다. 왜 그럴까? 바로 公義(공의)의 관념 때문이다. 시험 점수를 더 받았다거나, 달리기를 더 잘했다거나 어떤 선행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차별하면 적게 받은 아이는 물론 많이 받은 아이조차도 속으로 의아해한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에게 천성적으로 공의의 관념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의란 공평하고 의롭다는 뜻이다. 떡을 아이들에게 똑같이 하나씩 주는 것은 공평이고, 그들 중 아침을 굶은 아이에게 떡을 하나 더 주는 것은 의로움이다. 양자가 합쳐진 것이 공의이다.

그런데 세상은 어떠한가? 공의로운가? 누구에게 물어도 부정적일 것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공의로운 세상이 되려면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소득, 기회 그리고 재산 등에서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어져야 한다. 유사 이래 원시공산주의에서부터 시작하여 노예제도, 봉건제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수많은 제도를 통하여서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공평한 세상을 외치면서 현대를 피비린내 나는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공산주의는 이념뿐이었고, 실상은 그와 정반대이어서 가난에 있어서 공평함을 낳은 것뿐이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역량에 따른 실질적이고 배분적인 정의를 주창하였으나 부익부 빈익빈의 극대화를 향하여 치닫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제도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도 특혜 시비가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특혜 시비는 끊이지 않는다. 조그만 떡 하나라도 아무런 잡음 없이 적절하게 누구에게 줄 것인가가 쉽지 않거늘 하물며 큰 이권을 주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것은 대상자를 정말 공평하고도 적절하게 선택하는 일 자체도 어렵거니와, 그것을 주는 권한을 갖고 있는 자의 私心(사심)이 얼마나 개재되지 않는가 하는 것도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다음에, 인사의 면에 있어서 공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국가를 비롯하여 어느 조직에서건 그 시스템을 꾸려 나가는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공평하게 배치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인사를 둘러싸고 떠도는 뒷이야기들은 시궁창에서 풍기는 악취보다 더하다. 민주사회에서는 선거에 관련된 논공행상이 불가피하므로 그것도 정실인사를 부추기는 주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의 이기적 성향을 깡그리 없애지 않는 한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 재판에 있어서 공정성이다. 한국 사회만의 대표적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전관예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부정부패의 온상이 사법부와 검찰, 그리고 그 언저리라고 할 수 있다.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큰 재산이 오갈 뿐 아니라, 징역을 사느냐 모면하느냐 하는 문제가 좌우되고 그에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러 가지 파생적 영향을 고려할 때 재판의 공정성을 지키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재판 자체가 실체적 진실을 과연 어느 정도까지 精緻(정치)하게 밝힐 수 있는지 의문이므로 재판의 3대 이념 중 첫째라고 하는 適正(적정)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현재의 사법제도로서 밝힐 수 있는 실체적 진실이란 실제의 반 정도라도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의 큰 변수는 재판관의 黑心(흑심)이다. 뇌물과 정실과 인간관계 그리고 감정 등 재판관 개인을 흔들어 대는 폭풍이 세차기 한량없다.

따라서 공의감이라는 인간의 본성은 이 세상 제도하에서 충족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지금껏 어느 나라 어느 정부 하에서 위 세 가지 면에서 완벽한 공의가 실현된 적이 있었는가? 완벽이 아니더라도 반쯤이라도 실현된 적은 있었을까? 대답은 부정적임이 명백하다.

다음에, 유아들은 동물원에 가면 사자, 호랑이, 코끼리 등 맹수를 보고서도 마냥 좋아하고 철창 사이로 조막손을 넣어 동물을 만져 보려고 한다. 여기에서 애초 사람의 본성은 모든 동물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신화나 전설, 그리고 사자성어 따위를 보면 동물과 관련된 것들이 무수히 많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가 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는 속담도 있고, 騎虎之勢(기호지세), 야호승기등의 사자성어가 있고, 한겨울에 감을 먹고 싶어 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어느 효자가 감을 찾으러 나섰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등에 태우고 감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동물 연구가에 의하면, 맹수라도 사람을 두려워하며, 굶주려 있지 않는 한, 사람이 먼저 해코지를 하지 않으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사람이 식량이나 가죽 등을 얻기 위하여 맹수를 함부로 사냥하면서부터 사람과 맹수와의 관계는 더 멀어졌을 것이란다.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옛날처럼 다시금 오랜 세월 동안 맹수를 사냥하지 않는다면 맹수의 본성이 다시 온순해지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도 사람은 맹수 아닌 동물을 좋아하고 각박한 인간관계에 지친 나머지 애완동물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더해가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그러면 이렇듯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물과의 친교, 그중에서도 맹수와의 관계가 애완동물과의 관계처럼 사랑하고 귀여워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인가? 학자들은 이 부면에 관하여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런 문제에 대하여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맹수와의 그런 관계의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맹수와 소원한 관계를 갖고 있다 보니 그것에 대한 기억이나 바람조차 잊은 것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유아들은 어머니에게 무엇이든 물어댄다. 6세 때 가장 많은 것을 섭취한다는 심리학적 연구 결과도 있지만, 3, 4세 경 말문이 터지게 되면 질문을 쏟아 내어 많이 알게 된다. 정말이지, 유아들은 온통 궁금한 것에 둘러싸여 있다. 엄마는 대답해 주느라 진땀을 뺀다. 적당히 둘러대어 대답하고 나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말꼬리를 잡고 또 질문을 한다. 엄마가 그 대답을 모르는 질문도 많아 좀 망설이고 있으면 아이는 계속 졸라댄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적 욕구가 또 하나의 본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왕성한 지적 욕구가 오늘날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여기까지 발전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 이후의 지식의 양은 기하급수로 늘어나서, 30년 만에 두 배라는 둥, 10년 만에 두 배라는 둥, 아니 그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인터넷 검색을 비롯하여 도서관 이용이나 기타의 방법으로 웬만큼 다 알 수 있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은 달을 땅 위에서 쳐다보다가 지붕 위에 올라가서 본 정도만 알게 되었다고 했다. 또 미국의 시인이자 의사인 루이스 토마스는 과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단일 업적은 우리가 매우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것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지당하다. 우리는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숨을 쉬고 있는 공기에 대하여는? 날마다 1리터 이상을 마시고 있는 물에 대하여는? ……

하지만 인간의 하늘만큼 무한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현재 과학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한 세기가 지나더라도 아인슈타인의 어법을 빌리자면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서 달을 보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어느 세월에 달에 이르겠는가?

이상에서 흔히 우리가 일컫는 인간의 3대 본능을 제외하고도 천성적으로 갖고 있는 본성들 중 3가지만 살펴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 그렇기에 그것은 그저 우연히 지니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연한 것이라면 사람마다 그런 본성을 갖고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해야 할 것인데 예외 없이 모두가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점에서도 우리는 창조주의 입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창조주의 존부는 논외라 하더라도, 창조주의 입김이라면, 즉 창조주가 애초 첫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위의 본성들을 프로그래밍하였다면 그것들이 충족되지 않고 있는 현실, 나아가 충족될 가능성도 없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면 애초부터 프로그래밍하지 않았어야 하지 않을까? 충족되지 않을 것을 괜히 만들어서 사람들을 애타게 만들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마치 탄타루스처럼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면서 안타까움에 시달리게 할 목적이었다면 참으로 창조주는 야속하기 짝이 없는 분이다.

그러나 아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에 눈이 꽂혔다. 이사야 113절부터 9절까지이다. 우선 11:3-5은 이러하다.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재판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낮은 자들을 공평하게 재판하고 땅의 온유한 자들을 위해 올바르게 책망할 것이다. 자기 입의 지팡이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바람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다. 의가 그의 허리띠가 되고 충실이 그의 허리끈이 될 것이다.” 꿈만 같다. 그래서 동화 같은 한갓 이야기일 뿐인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성경의 주제라고 하는 하느님의 왕국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 역시 진실이다.

다음 성구를 보자. 이어지는 6절부터 8절까지이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지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사자와 살진 동물이 모두 함께 있을 것이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닐 것이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누울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젖 먹는 아이가 코브라의 굴 위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댈 것이다.” 두 번째의 본성이 충족된다는 것이다. 이건 더욱 동화 같다. 동화책에서나 수없이 본 그림들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의 본성을 이렇게 프로그래밍한 하느님은 때가 되면 하느님의 왕국의 통치에 의하여 이 성구처럼 실현되게 한다는 것이다.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추호의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지적 욕구의 본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만은 여전히 그 실현이 불가능할 것 같다. 또 이어지는 성구를 더 보자.

이사야 119절이다.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고 있듯이, 땅이 여호와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에 관한 지식이란 곧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다. , 공기, , 흙 등 4대를 비롯한 만물에 관하여 수많은 것들이 밝혀질 것이다. 인간의 지능도 그때에는 지금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향상되어 그 지식들을 다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뇌의 연구가에 의하면, 인간의 뇌의 뉴런이 수용하는 지식의 용량이 현재 사람이 살아서 쓰는 뇌의 그것의 적게는 수천 배, 많게는 수십억 배에 이른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창조주는 어느 것 하나 헛되이 창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성들을 창조하였을 때에는 필경 그것이 모두 충족되고 실현되게 하기 위하여서일 것이고, 놀랍게도 그 점을 성경에서 미리 밝혀 두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성경은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기록하게 한 것임이 틀림없다. 하느님은 일개 미물에 불과한 인간의 본성 하나하나까지 챙겨서 그 모두가 다 충족되고 다 실현되게 하시며, 더욱이 훨씬 이전부터 그것을 예언하시고 같은 곳에서 연달아 차례차례 기록되게 하시니 참으로 사랑이 많고 위대하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52. 성경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택시 기사를 비롯하여 만나는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적에 관하여 질문한다. 사람이 왜 사느냐? 태어난 것이 자기의 임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인생의 목적조차 없겠는가,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뜬금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일반적으로 잘 묻지 않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택시를 타고 꽤 오랜 시간을 한 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함께 가노라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마련인데, 아마도 이런 질문을 하는 손님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런 질문을 하면 택시 기사의 첫 반응은 한결같다. “? 인생의 목적이라고요?” 그러고는 씩 웃고는 대답을 얼른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살짝 채근조로 다시 묻는다. “그냥 되는대로 사는가 보죠?” 그러면 그는 황급히 사래 치듯 말한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목적 없이 산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한가 보다. 잠시 생각한 다음 그는 던지듯 대답한다. “자식새끼 잘 키우기 위하여 사는 거죠.” 그러면서도 뭔가 자기 자신도 별로 좋은 대답이 아닌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힐끗 바라본다.

자식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 그럼 자식 없는 사람은 사는 목적이 없다는 걸까요?”

그는 대번에 대답이 궁해진 것을 알아차리고 멋쩍게 웃으며 마무리하듯 말한다. “그냥 적당히 사는 거죠, .”

동물들이야 자기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생각지 않겠죠. 그러나 적어도 사람 시늉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몇 번 생각합니다. 맞죠?”

기사는 끄덕끄덕하거나, 당연지사라는 듯 큰 소리로 맞장구를 친다.

몇 번이 뭡니까? 수십 번도 더 생각하죠.”

그런데도 답이 없다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역사상 수많은 현자나 학자들이 있었고, 실제로 인생의 목적에 관하여 저마다 한 마디씩 했는데 그것들이 답이 아닌가 보죠?”

정답이라는 게 있겠어요? 저마다 적당히 답이라고 생각하며 살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거죠.”

이쯤에서 나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의 속도를 말하면서 거시적으로는 우주의 광대무변함과 미시적으로는 인간 세포의 극도로 치밀함을 설명하고 창조주의 존재를 슬쩍 언급한다. 미리 이 정도의 자락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창조주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하지는 못한다. 어물쩍 인정하는 셈이 된다.

창조주에 대한 논증을 하려면 밤이 새도 다 못하지만, 우선 창조주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말하자면 인생의 목적에 관하여 자꾸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답이 있다는 거예요. 창조주가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기 위하여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끔 애초부터 프로그래밍했다는 거죠. 동물의 삶의 목적은 없어요. 소나 개나 돼지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지라고 자문할까요? 그저 이럭저럭 살다가 제 명이 되면 죽는 게 전부죠. 그러나 사람은 그 답이 없다고 하면서도 문득문득 그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창조주가 사람을 장난삼아 만든 것이 아니라면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그것은 결코 아니다분명히 목적을 갖고 만들었다고 말하는 데서 어느 정도 동의를 받아 낸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인가? 창조주가 이성 있는 사람을 목적적으로 만들었다면 그 목적을 알게 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한 이치적이지 않은가? 개개인이 나름대로 심사숙고하여 그 목적을 찾아내도록 하기보다는 동서고금을 통관하는 하나의 확실한 지표를 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통일적이다. 개개인이 그것을 찾아내기로 한다면 시대와 장소와 사람마다 그 답이 다 다를 것이므로 창조주가 애초 정한 단일 목적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표는 인류의 시작 이래 비교적 빠른 때에 주어져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능가할 만한 책이 없다. 그러한 지표로서 어떤 책을 주기로 한 것이라면 그 책의 저자는 인간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흔히 언급되는 세계적인 고전이라는 것들은 모두 어떤 특정의 사람이 쓴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할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 책의 저자의 일개 생각일 뿐이고, 그것으로써 인류 전체의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소위 역사적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보편적으로 인생의 목적이라고 누구나 쉽게 수긍할 만한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책을 몇 권이나 쓸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근거에 의하여 창조주가 인간 필자를 사용하여 기록하게 한, 저자가 창조주인 책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책이라면 당연하게도 인생의 목적에 관하여 명백하게 알려 준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도대체 아무런 목적도 없이 풍타죽낭타죽으로 살 수밖에 없다면 말이 되는가?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아무도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다른 정답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편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 가다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그 문제에 계속 집착하다가는 뒤의 문제들을 풀지 못하고 끝내야 하므로 일단 제쳐놓고 넘어가듯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후에도 조금 짬이 나면 불쑥 고개를 쳐드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네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사라지곤 하는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왜 죽는지, 또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역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 세상에 일어나는 끝없는 문제들과 불공평 등은 항구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인지, 이러한 것들의 배후에 창조주란 존재가 과연 있는지 등등이다. 이러한 주제에 관하여서도 사람들이 쓴 책들을 통틀어 봐도, 특히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뛰어난 名著(명저)나 고전이라고 알려진 것들을 봐도 그것들에 대한 답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의문투성이라서 정답이라고 내세울 정도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창조주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창조주는 논리적으로 排中律(배중률)을 적용하여,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 두 가지 가능성을 하나씩 전제로 하여 위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먼저 창조주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 보자. 위 문제들은 어느 것 하나 풀리지 않는다. 즉 지금 우리가 품고 있는 그 문제들이 문제로서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 보자. 창조주가 있다면 모든 창조작용에는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이고, 모든 창조물 중에서 유독 인간만이 창조의 목적, 좀 더 좁히자면 인간의 창조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부단히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서 인간에게만은 특별히 무엇인가 그것을 알 계기를 마련해 주지 않았을까 하고 추리할 수 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러한 추리와 일치하게 창조주는 그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치적이게도 그 성경에는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아포리아를 풀 수 있는 길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도 성경의 맨 첫 책인 창세기에서부터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거듭거듭 재삼재사 동일한 또는 유사한 단어나 어구, 혹은 비유와 상징으로써 제시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의 66권은 약 1600년간에 걸쳐 40여 명의 필자들이 기록한 것임에도 전혀 모순이 없고 전후에 걸쳐 완전히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필자들이라고 해야 모세, 누가 그리고 바울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경이롭다.

논증의 근거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간략하게 결론을 지어 보자. 인생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다. 그것이 창조주의 책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히 믿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위에 예시한 많은 의문들에 대한 정답까지 매우 이치적으로 잘 설명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한 우리 앞에는 거룩한 大路(대로)’(이사야 35:8)가 탄탄하게 놓여 있다.

 

53. 특히 성경 중 창세기에 있어서 완벽한 문장은 성령의 작용의 증거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구약성경의 성립은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걸친 1천 년 이상의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생활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의 원류에 해당하는 유대인의 성경 타나크는 대략 B.C. 1500~400년대 사이에 오랜 세월을 거쳐 바빌로니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의 지역에서 전해지던 이야기들이 기록된 경전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구약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는 기원전 1513년에, 그리고 마지막 권인 말라기는 기원전 443년에 각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건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창세기는 기원전 13세기 내지 15세기에 기록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소위 정경이라고 하는 66권 전부에서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지만, 특히 가장 오래된 창세기에서 더욱 놀라운 점은 모든 문장에 있어서 한 문장, 한 단어, 한 자도 문법적으로나 어법적으로나 문장상으로나 틀린 데가 없다는 것이다. 人智(인지)가 최고조로 발달되고 매일 태산 같은 분량의 글이 쏟아지고 있는 오늘날 명문장가가 쓴 글이라도 분명 한두 군데는 틀린 데가 있게 마련인데, 그 옛날 옛적의 창세기에는 그런 데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창세기의 필자로 알려져 있는 모세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인 이집트의 왕자 노릇을 하면서 많은 학문을 닦은 사람이기는 하지만(사도행전 7:22),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기적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글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을 많이 닦은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잘 쓴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더욱 놀랄 수밖에 없다. 그 무렵이나 그 이전의 문헌들이 별로 남아 있지도 않지만 가장 오래된 글이라고 하는 길가메시 이야기도 오늘날의 동화 수준으로 유치하다고 할 수 있으며, 문자 그대로 옛날 얘기로서 한갓 파적거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창세기는 단순한 얘깃거리가 아니라, 종교적, 문학적, 과학적, 철학적, 생물학적, 역사적, 도덕적, 언어학적, 인종학적 등등 제 분야에서 깊이깊이 음미할 내용으로 꽉 차 있다. 이를테면, 창세기 1장에서 인류가 생겨나기까지의 과정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과학자들도 그 발생 순서가 하나 틀림없이 정확하고 그것을 모세가 우연히 정확하게 기술할 확률은 3,628,000분의 1이라고 한다. 물론 모세는 그 방면의 전문가가 전혀 아니고, 당시 그 분야의 학문이 전혀 싹 트지 않았다. 또 같은 장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일찍이 밝혔다.(26, 28) 나아가서 인간이 이 땅의 관리자이자 주연이라면 당연히 가정이 그 기초가 될 것이므로 가정의 마련이 이루어진 경위에 관하여도 일찌감치 알려 주고 있다.(2:18-24) 얼마나 적절한 서술 순서인가?

이제 3장으로 가 보자. 이 장은 아마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의문을 품고 있는바, ‘사람은 왜 죽는가?’ 하는 것을 비롯하여(1-5, 19), 가부장사회의 형성 근거와 苦輪之海(고륜지해)의 인생의 원인(19)도 밝혀 주며, 무엇보다도 15절에서 성경 전체, 즉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연면하게 흐르는 성경의 주제의 발단이 기술된다. 6장에서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의 근원이 되는 사건인 노아 시대의 대홍수와 그 전후의 사건들에 대하여 알려 준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는 신화와 전설이 단지 허황한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것이거나 있을 수 있었던 일을 지어내거나 과장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그러한 배경을 지닌 채 세계 전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오늘날 9천 종이 넘는 언어를 갖고 살아가고 있는 과정도 10장과 11장에서 알게 된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 아브라함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것을 단지 특정한 한 나라인 이스라엘만의 역사라고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인류 전체에게 확장 적용될 수 있는 계기를 감추어 두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12:3; 22:18: 26:4; 28:14)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나라를 모형으로 사용하여 모든 나라의 왕이신 여호와 하느님이 어떻게 役事(역사)하시고 어떠한 성품과 행동 양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리브가,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과 라헬 간의 부부관계와 각각의 자식들과의 사랑과 애환 따위도 간략하지만 행간에서 많은 것을 엿볼 수 있도록 기술되어 있다.

이렇듯 엄청난 내용과 교훈들이 한 절 한 절, 한 단어 한 단어에 듬뿍 담겨 있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통속소설 읽듯이 그냥 슬쩍 훑어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또한, 상징과 비유 특히 은유가 많이 깔려 있기 때문에 이들을 주의 깊이 알아내어야 하고, 그것을 용케 알아낸다고 해서 그 뜻을 아는 것은 별개 문제이므로 더 깊은 연구 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3장의 벽두부터 14절까지 이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보통 이 뱀을 사탄이라고 생각하지만 3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도 사탄이라는 암시조차 없다. 결국, 성경의 맨 나중 책인 요한계시록의 129절에서 원래의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로서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자이다라고 한 데서 그 연결 고리를 비로소 찾게 되는 것이다. 그 글은 모세가 죽고 나서 약 1600년이나 지난 뒤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인데, 이 두 성구가 장구한 세월을 뛰어넘어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는지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창세기 하나만 해도, 이것이 모세라는 일개 사람 하나가 그의 학문적 역량에 따라 자신의 머리를 짜내어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즉 모세는 단지 창세기의 골자 되는 사상을 전달받아 이를 당시의 히브리어 문자로 풀어서 기록한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 사상이 전달된 통로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여호와의 활동력인 성령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창세기 외에도 소위 모세 5경이라고 불리는 다른 4권과 욥기 등을 더 기록한 것도 당시 모세만 한 지적 역량이 있는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므로 그가 선택되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실행한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를 율법에 정통했던 사도 바울만이 기록할 수 있었던 이치와도 같다 하겠다.

 

54. 낙원에 대한 소망

 

인류는 유사 이래 죽음을 비롯하여, 전쟁, 자연재해, 의식주 문제, 질병, 범죄, 불공평, 인간관계의 문제 등 8가지가량의 주요 문제들을 겪어 왔다. 그것들은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나 어느 한 때에도 없어진 적이 없는 참으로 인류 행복의 大敵(대적)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가장 번성하였다고 할 수 있는 과거의 로마나 현대의 1950년대 미국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또 어느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 8대 문제의 해결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고 할 만한 인물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거를 통해서나, 혁명을 통해서, 또는 제도의 대혁신을 통해서 그러한 세상의 출현을 학수고대해 왔다. 역시 지금까지 이렇다 할 만한 제도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소설이나 글로써 상상의 나래를 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양의 무릉도원과 서양의 유토피아를 비롯하여, 엘리지움, 엘도라도, 샹그릴라, 에르혼(Erehwon), 공화국, 신의 나라, 태양의 나라…… 등이 이상향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유토피아와 에르혼이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없다라는 뜻)토피아’(‘장소라는 뜻)의 합성어로서 그런 곳이 없다는 의미이고, 에르혼은 그 스펠을 거꾸로 하면 ‘nowhere’로서 역시 같은 뜻이 된다. 즉 저자가 그 책을 집필할 당시 그런 장소가 없음은 물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를 넘어서 너무 놀라운 것은 유토피아의 작가가 토마스 모어라는 점이다. 그가 누구인가? 그 유명한 헨리 8세 시 대법관을 지낸 인물로서 영국 왕의 수장령에 반대하여 결국 처형된 인물이다. 그만큼 카톨릭의 골수이다. 후에 그는 카톨릭의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그 정도라면 성경을 꿰고 있을 법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성경의 요한계시록과 이사야서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산재되어 있는 지상 낙원에 관한 구절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인가? 아니, 애당초 그는 성경을 직접 읽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소를 먹이는 樵夫(초부)까지도 읽을 수 있는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겠다고 선언하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윌리엄 틴들을 그가 처형되게 하였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지상낙원에 관한 성구들 중 몇 가지만 들어 보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지내고 표범이 새끼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사자와 살진 동물이 모두 함께 있을 것이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닐 것이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누울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젖 먹는 아이가 코브라의 굴 위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댈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이사야 11:6-9) ‘그때에 눈먼 사람들의 눈이 뜨이고 귀먹은 사람들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때에 저는 사람은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사람의 혀는 기뻐 외칠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 평원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다’(이사야 35:5,6) ‘사람들이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원을 만들어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다. 그들이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살지 않고, 그들이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65:21,22)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요한계시록 21:4)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평화 가운데 더없는 기쁨을 얻을 것이다(시편 37:11,29) ‘올바른 자들만 땅에 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자 들만 땅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악한 자들은 땅에서 끊어지고 배신자들은 땅에서 뽑힐 것이다(잠언 2:21,22)…… 그 외에도 지상낙원에 관한 구절은 부지기수이다.

위에 열거된 책이나 글 중에서 무릉도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카톨릭 국가나 개신교 국가에서 생장한 사람들이 쓴 것인데도 그들은 성경을 직접 읽지는 않은 것 같다. 하기야 루터가 종교개혁을 표방할 때까지만 해도 성직자 외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당하였거나 백안시당한 형편이었고, 루터가 ‘sola scriptura’를 외치면서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지만 실상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의 지상 상태로 보아서 지상낙원이란 허황한 꿈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막연하게 아무도 가보지 못하여서 거짓말이라고 단정적인 어조로 말할 수는 없었을 하늘에 천당이라든지 무언가 좋은 데가 있다는 희망을 그려 왔기 때문에 아예 지상낙원이라는 개념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수백 년 내지 수천 년 내려온 전통이나 인습이라는 것이 인간의 뇌리에 얼마나 깊은 고정관념을 형성하는지 무시무시하다. 지상낙원은 어불성설이며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는 오로지 하늘에 있다는 천당이 뇌리에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알기 쉬운 성경 번역판으로 읽고 또 읽어도 지상낙원의 구절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여호와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성경 전체에 무려 7216회나 산재되어 있음에도 그것이 하느님의 이름인 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늘이 아니라 인간 역사 이래로 살아온 이 땅, 지구라는 이 땅이 가장 친숙하고, 이 땅에 낙원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전개되기를 바란다. 어떠한 곳인지를 전혀 모르고, 따라서 무섭고 두렵기까지 한 하늘에 좋은 곳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얼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실제로 천당을 믿는 교인들에게 천당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상낙원이 어떠해야 할 것이라는 데 대하여는 그림이 그려진다. 처음에 열거한 인간의 8대 문제가 다 없어지는 세상을 그려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성구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실제로 그 세상이 올 것이다. ‘거짓말하실 수 없는하느님의 거듭거듭 재삼재사 명시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55. 배우지 않으면 늙는다

 

대부분의 늙은이는 스스로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뭔가를 가르쳐 주려고 하면 노인은 이 나이에 그걸 배워서 뭣 하겠느냐?’ 또는 내가 그걸 알아듣겠느냐?’는 식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정말 진심으로 펄펄 뛰면서 손사래를 세게 치며 말한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늙어서 배우기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말해 준다. 이를테면, 리버맨이라는 사람은 81세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101세에 개인 전시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고 여러 점을 판매하였다. 늙어서 창의성 있는 일을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하여 여자의 경우 4, 남자의 경우 2배 더 즐겁다고 한다. 그렇게 더 즐거워하다 보면 공부를 더 하게 되고, 공부를 더 하게 되다 보면 더 즐거워하게 된다. 양자가 서로 맞물면서 상승작용을 하는 것이다. 리버맨의 경우 초장수를 한 것이 아마 늙어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데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 배우기를 그만둔 사람은 20세이든 80세이든 늙은 것이다. 계속 배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젊음을 가지고 있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신의 마음을 젊게 유지하는 일이라고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말하였지만, 젊은이가 젊게 사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겠으나 젊은이 중에도 늙은이처럼 맥없이 사는 사람도 상당수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늙은이가 젊게 사는 것은 정말 존경스러운 일이다.

한국 고시조 중에 늙어서도 설어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서 은 작가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의 짐을 의미하였지만, 우리는 이를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은 남이 지운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지운 것이다. ‘나는 늙어서 못 한다. 배우지 못한다라는 생각 자체가 짐이다. 그 생각이 클수록 그 짐의 무게는 무겁다. 그 무게에 짓눌려 종당에는 꼼짝달싹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닌 녹슨 삶이다. 오래된 기구나 기계는 쓰지 않으면 새것보다 훨씬 빨리 녹이 슬고 망가진다. 오랜 것일수록 무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따금 적절히 사용해 주어야 수명이 오래 간다. 사람 같은 유기체는 한층 더 그러하다. 소위 用不用說’(용불용설)에 의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기능이 저하되고 급기야 쓰지 못하게 된다. 뼈를 다쳐서 깁스를 하여 상당 기간 관절을 사용하지 못하면, 깁스를 풀고 나서 그 관절을 곧바로 사용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재활 훈련을 거쳐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두뇌도 꾸준히 적당한 운동을 해 주어야 한다. 물론 두뇌에는 근육이나 관절, 뼈 같은 것이 없지만, 늙은이나 공부를 오랫동안 하지 않은 사람은 머리가 굳었다라고 표현한다.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머리가 굳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기름칠을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학습이다. 정신력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늙으면 그 정신력이라는 것이 현저히 감퇴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제로는 잘못인 것 같다. 주위에 여든이 넘은 사람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중 어떤 노인은 聰氣(총기)가 젊은이 못지않게 총총하다. 요즈음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인터넷, 스마트폰, SNS, 영화나 동영상 등 정신을 자극하는 것들 역시 많이 늘어났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전자문명화는 복잡한 것들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게 해 준 반면, 복잡한 것들을 대거 양산하여 사람의 정신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50년 전보다 세상이 엄청나게 복잡해졌고, 그 변화도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세상의 발전 속도에 바싹 따라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웬만큼 따라가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만난 전직 교수는 85세인데도 만물박사처럼 여러 분야를 통섭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여러 분야의 학문을 종횡무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감탄하면서 그 말의 내용에 귀 기울이기보다 그렇게 박식하도록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 그 원인이 무엇인가 궁금해하곤 하였다. 아마도 현재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피스텔의 사무실에 출근하여 무엇인가를 읽고 쓰고 하여 온 데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나도 적잖이 격려를 받는다. 나도 저 나이가 될 때까지 잘하면 맑은 정신력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렇게 많은 지식과 경험을 소유한 사람이 머지않아 죽어서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매우 진한 의구심이 든다. 창조주가 없다면, 즉 사람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라면 어떻게 인간만이 독특하게 머리를 사용하여 무궁할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가? 반대로 창조주가 있다면 이토록 기막히게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이 많은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게 해 놓고서는 불과 80가량의 나이에 폐기 처분을 하여 평생 쌓은 것을 ()로 돌리는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보다가 다시 책을 읽고 묵상하고 외우기도 한다. 위의 교수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나 자신이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역시 지식욕을 충족시키면서 성취감을 맛보아서 즐겁다. 몽테뉴가 말한 것처럼 가장 값싸게 가장 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독서이다’. 독서를 좀 더 확장하면 학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이든 배우기 시작하면, 곧 그다음이 궁금해지고, 그다음을 배우고 나면 또 한 단계 더 올리고 싶어지니, 무엇인가를 알아 가는 것과 함께 흥미로움을 느끼는 것도 여간 값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육체적으로 조금 힘든 것도 사실이다. 육체적인 힘이 나이와 함께 다소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므로 학습을 지나치게 하면 피로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이지 말고 머리도 식히면서 설렁설렁 살아가자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이 오래 가지 않는다. 몇 번이고 그렇게 시도하다가 며칠을 못 견디고 또 무엇인가를 독파하거나 해내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정말 못 말리는 자신이다. 그야말로 手無釋卷(수무석권), 성균관 개구리이다. 아내도 수없이 내가 쉬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하여 가끔 불만을 나타낸이 대단하. 그래서 아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더 늘리려고 노력하고 실제로 더 늘리기도 하였지만, 나머지 시간을 학습하는 데 바치는 나의 습벽은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

나는 그러면서 이것이야말로 나의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비결이라고 자위한다. 즐거우면 면역 임파구들을 자극하는 인터페로감마가 200배 증가하고, 면역 글로블린도 증가해 호흡기와 소화기질환을 예방하며, 모르핀보다 200배나 효과가 있다는 엔돌핀을 생성할 뿐만 아니라, 심장을 강화하고, 혈전 생성을 방지하며,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심장박동을 느리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고 한다. 또 종양세포를 공격하는 killer-cell이 많이 생성되고,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여 소화를 강화하고, 변비에도 효과가 있으며, 간 기능도 강화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익이 있다고 한다. 힘을 들이는 양보다 얻는 즐거움의 양이 더 많으면 이를 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학습을 계속하기 위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건 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학습을 계속하고 싶고 또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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